이민우 랩장의 1인칭 책읽기
박일문 작가의 「살아남은 자의 슬픔」
후일담은 어제의 내일일 뿐인가
우리의 일은 쌓아 올리는 것들

후일담은 결국 어느 날의 다음을 말할 뿐이다.[일러스트=게티이미지뱅크]
후일담은 결국 어느 날의 다음을 말할 뿐이다.[일러스트=게티이미지뱅크]

박일문 작가가 지난 16일 죽었다. 자살로 알려졌다. 그는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라는 책으로 알려진 작가다. 1992년에 발간된 이 소설은 ‘후일담 문학’으로 분류된다. 그는 민주주의가 이뤄진 1990년대에 자신이 관통해온 운동권 세대의 방황을 그렸던 작가였다.

그래서 나에게 박일문 작가의 죽음은 한 세대의 마침표처럼 느껴졌다. 글이 발표되고 10여년 뒤 그는 성범죄로 교도소에 갔다. 그가 운동권 성폭력 실명공개의 대표 사례로 뽑혔음을 생각했을 때 그의 삶은 어떤 면에서 ‘클리셰(clich·진부한 틀)’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은 주인공 화자와 라라, 디디의 연애담을 다룬다. 어머니의 죽음과 대학생활에서 갈피를 못 잡는 주인공은 어느 날 라라와 디디를 만난다. 사회 운동을 하던 라라는 결국 바뀌지 않을 세상의 단단함에 자살해 버린다. 개방적이고 개성 넘치던 디디는 화자를 문학으로 이끈다. 생존했음에 자책하는 화자는 디디와도 이어지지 못한다. 소설 속 세 명의 인물은 화자의 자아인 셈이다. 후일담 문학은 이미 다 지나가 버린 것을 다룬다. 세 갈래로 나뉜 화자의 자아는 그래서 불안하다. 

시대가 바뀌었다. 학생회는 이제 대학 축제나 등록금 협의를 한다. 더 이상 학생회는 투쟁의 장소가 아니다. 이데올로기는 자신의 피부에 와닿는 젠더, 동물, 환경 등 더 세부적인 것으로 향해 갔다. 라라로 대표되는 통일과 민족을 위한 투쟁이 디디로 대표되는 개인의 삶과 개성을 중시하는 시대로 바뀐 것이다. 내가 다니던 대학 어디에도 라라를 찾긴 어려웠었다. 그렇기에 「살아남은 자의 슬픔」은 과거를 말하는 내밀한 기록이다. 끝난 시대의 기록인 것이다.

시대의 화두는 바뀌었다.[사진=게티이미지뱅크]
시대의 화두는 바뀌었다.[사진=게티이미지뱅크]

그렇다면 ‘운동’이 사라졌으니 ‘살아남은 자의 슬픔’도 끝났던가. 사실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라는 제목은 박일문 작가가 만들어낸 것이 아니다. 원래 그 문장은 독일 출신의 시인이자 극작가인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시의 제목이다. 나치를 피해 모스크바를 탈출하면서 그는 자신의 사랑하는 연인 스테핀을 모스크바에 남겨야 했다. 스테핀은 결핵으로 도망을 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고 결국 결핵병동에서 홀로 생을 마감했다. 

물론 나는 알고 있다.
오직 운이 좋았던 덕택에
나는 그 많은 친구들보다 오래
살아남았다.
그러나 지난밤 꿈속에서
친구들이 나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강한 자는 살아남는다.”
그러자 나는 내 자신이 미워졌다.

- 베르톨트 브레히트 ‘살아남은 자의 슬픔’

권력과 맞붙던 운동의 시대는 끝났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이 시대에서 살아남았다는 아픔을 가진 이들이 이토록 넘치는 것은. 차가운 겨울 이태원 유가족들은 1만5900배를 한다. 전세 보증금을 잃은 이들이 법정에서 눈물을 흘린다. 하지만 누군가는 돈이 많이 들어가니 노인들의 이동의 자유를 뺏어야 한다 이야기하고, 언더도그마(Underdog’s dogma·힘의 차이를 근거로 선악을 분류하는 오류)를 깨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베르톨트 브레히트가 말했듯 서정시를 쓰기 힘든 시대다. 누군가는 이럴 때일수록 후일담 소설이 필요하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그렇지 않다. 어떤 한 세대가 갔다고 해서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더 이상 다루지 못할 것도 아니다.

후일담이란 것은 무언가가 지나간 이후를 기록한다는 것이다. 무엇인가를 후일로 치부한다는 건 결국 그 과거에 더 큰 의미를 둔다는 뜻이다. ‘클리셰’처럼 보이는 이전 세대의 성범죄나 현재 세대들이 받아들이지 못하는 행동 방식은 어쩌면 이 모든 것을 ‘후일’로 치부하고 있는 행위의 부작용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나가는 것이란 없다. 쌓일 뿐이다. 하나의 조각 위에 다른 조각을 올리듯 천천히 쌓아 올라가는 것. 그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그렇기에 후일담 문학이란 것은 없다. 쌓여 올려진 하나의 블록일 뿐. 녹록지 않은 세상이라는 표현으론 부족한, 살아남은 자의 슬픔 정도는 돼야 할 작금의 시대에도 슬픔은 계속된다.

이민우 더스쿠프 기자
 lmw@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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