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스쿠프 공병훈의 맥락
맥주 또다른 이야기➋
수도원 운동이 키운 맥주
금식 기간 허락된 음료
자립 생활하는 수도회
라벨 없는 심플리시티

종교인의 의복이 단순한 건 ‘신神’과 연관돼 있다. 1960년대 패션 용어로 쓰였던 심플리시티(simplicity)는 사실 신의 단순성(divine simplicity)에서 유래한 개념이다. 이는 신이 그 자체로 궁극의 존재란 뜻인데, 종교 의복이 단순한 것도 신의 단순성을 표현하기 위함이다. 흥미로운 점은 맥주에도 ‘신의 단순성’을 구현한 제품이 있다는 거다.

시음하는 수도사를 그린 요셉 바그너 퀠른의 작품.[사진=위키피디아]
시음하는 수도사를 그린 요셉 바그너 퀠른의 작품.[사진=위키피디아]

맥주는 기원전 때부터 제조해 먹었던 기록이 남아있다. 다만, 양조기술이 본격 발달한 건 중세시대다. ‘교회 세속화’에 반대해 8세기 때 불붙은 수도원 운동이 발단인데, 양조기술이 진화한 원인은 흥미롭다. 수도사들이 금식 기간에 기분 좋은 맛을 내는 음료를 마시길 원했는데, 그게 다름 아닌 맥주였던 거다.

이는 우리가 1편에서 이야기했던 트라피스트(Trappist) 맥주의 탄생 배경과도 맞닿는다. 트라피스트회 수도자들이 유독 엄격한 규칙에 따라 수도 생활을 했기 때문이다. 트라피스트회 수도자는 봉쇄구역에서 성 베네딕트의 규칙에 따라 공동생활과 관상생활을 영위한다. 하루 7번의 성무일도와 기도ㆍ노동ㆍ독서ㆍ채식 등 엄격한 수행 생활을 감수한다.

[※참고: 트라피스트는 프랑스 노르망디의 오른에 있는 개혁수도원 라 트라프(La Trappe)에서 나온 명칭이다. 트라피스트 수도회는 시토회(Ordre cistercien)에서 시작해 1098년 프랑스 시토에서 창립했다. 공식 명칭은 ‘엄률嚴律 시토회(Order of Cistercians of the Strict Observance)’다.]

1편에서 말했듯 트라피스트 맥주는 트라피스트회 수도사들이 빚는 맥주다. 벨기에 2개소, 네덜란드 2개소, 오스트리아ㆍ이탈리아ㆍ잉글랜드ㆍ프랑스ㆍ미국 각 1개소 등 세계 13개 수도원만이 트라피스트협회가 인정하는 트라피스트 맥주를 만들고 있다.

‘평화’와 ‘기도하며 일하라’란 규칙을 갖고 있는 트라피스트회는 전통적으로 농업ㆍ맥주ㆍ도자기ㆍ잼ㆍ젤리 등을 만들어 자립적인 생활을 해왔다. 맥주를 위한 원료도 농업 활동을 직접 펼쳐서 만들어냈다. 당연히 맥주를 통해선 영리를 추구하지 않는다.

이를 엿볼 수 있는 트라피스트 맥주는 ‘베스트블레트런(Westvleteren)’이다. 이는 1838년부터 성식스토수도원(Sint-Sixtusabdij)에서 양조해온 맥주다. 애호가들 사이에서 ‘맥주의 왕’으로 불린다. 수도원의 수요와 자선 활동에만 맥주를 활용하기 위해 재판매를 엄격하게 제한한다. 맥주병에 라벨을 부착하지 않는 전통은 ‘심플리시티(simplicity)’를 구현하기 위해서다.

사실 심플리시티는 신의 단순성(divine simplicity)에서 유래한 개념이다. 신이 단순한 존재라는 뜻은 신이 그 자체로 궁극의 존재이며 불변과 영원의 특징을 갖는다는 거다. 고전적 유신론의 교리 중 하나인데, 종교 의상이 단순한 것도 신의 단순성을 표현하기 위함이다. 

종교적 언어에서 유래한 심플리시티는 1960년대엔 장식이 없는 단순하고 검소한 디자인으로 ‘세련됨’을 표현하는 패션 용어로 쓰였다. 이후 많은 전문가들이 광고, 디자인, 라이프스타일, 과학철학에서 새로운 흐름을 나타내는 말로 사용했다. 베스트블레트런 맥주병은 심플리시티 디자인의 전형을 보여준다.

[사진 | 게티이미지뱅크]
[사진 | 게티이미지뱅크]

트라피스트 맥주를 영리에 활용하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는 사례는 또 있다. 트라피스트협회는 트라피스트 맥주에 적용하는 ‘세가지 기준’만 맞으면 트라피스트 육각형 라벨을 부착해준다. 이 세가지 기준을 보면 트라피스트회 수도사들이 ‘품질’만 관리하고 이윤과 효율성은 배척했음을 알 수 있다. 

첫째, 맥주는 수도사 자체 또는 감독하에 트라피스트 수도원 안에서 양조해야 한다. 둘째, 양조장은 수도원 생활 방식에 적합한 사업적 관행을 유지해야 한다. 셋째, 양조장은 수익 창출을 위한 것이 아니다. 수입은 수도사들의 생활비와 건물ㆍ부지의 유지ㆍ보수에 사용한다. 남은 건 사회사업을 위해 자선단체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기부한다.

공병훈 협성대 교수 | 더스쿠프
hobbits84@naver.com

최아름 더스쿠프 기자
eggpuma@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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