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스쿠프 공병훈의 맥락
구텐베르크 혁명 ➌
교회 체제 유지한 성경
구텐베르크가 대중화
종교개혁의 단초 마련
독일부터 이탈리아까지

인쇄기가 없을 때 성경은 사람들의 ‘필사筆寫’로 만들어 배포됐다. 성경 66권을 묶은 ‘1질(일종의 세트)’을 사려면 집 10채값을 지불해야 했다. 당연히 성경을 소유할 수 있는 곳은 돈이 많은 수도원이나 교회밖에 없었다. 문제는 수도원이나 교회가 자신들의 방식으로 교리를 해석해 체제를 유지하려 했다는 점이다. 이런 점에서 성경을 널리 확산하는 데 일조한 구텐베르크의 인쇄기술은 ‘혁명’이라고 할 수 있다. 

구텐베르크의 인쇄기는 교회의 기득권을 깨는 데 불씨 역할을 해냈다.[사진=게티이미지뱅크]
구텐베르크의 인쇄기는 교회의 기득권을 깨는 데 불씨 역할을 해냈다.[사진=게티이미지뱅크]

구텐베르크는 1448년 재정가 요한 푸스트(Johann Fust)를 설득해 인쇄기와 800굴덴(Guldenㆍ독일어권 금화 단위)이란 꽤 많은 돈을 빌렸다. 구텐베르크가 꿈꾸던 것은 중세 전례典禮의 필사본들을 색깔이나 디자인의 아름다움을 손상하지 않고 기술적으로 재생하는 거였다. 그 중심에는 ‘구텐베르크 성서’라고 부르는 「42행 성서(42-line Bible)」가 있었다. 

그럼 「42행 성서」란 뭘까. 연구에 따르면, 모두 2권에 분량은 총 1272쪽이다. 당시 제작 공정을 고려하면 25명 정도의 장인이 참여했을 것으로 보인다. 전문가들은 「42행 성서」를 180질帙(일종의 세트)을 제작한 것으로 추정한다. 그중 48질이 남아있는데, 상태가 완벽한 건 21질에 불과하다.

구텐베르크는 「42행 성서」를 인쇄하기 위해 290개의 서로 다른 자모字母를 만들었다. 삽화로 그린 머리글자와 부호를 채색공이나 식자공들이 삽입해 넣었다. 전체 180질 중 150질은 종이에, 나머지 30질은 값비싼 양피지에 인쇄했다. 오늘날 현존하고 있는 48질 중 2질을 구텐베르크 박물관이 소유하고 있다.

구텐베르크의 인쇄 기술은 ‘기득권’에 도전하는 도구에 가까웠다. 오랜 필사 작업으로 만들어진 성경 66권으로 묶인 1질을 사려면 집 10채값을 지불해야 했다. 따라서 성경은 수도원이나 교회만 소유할 수 있었다. 

성경을 독점한 교회는 교리를 자신들 방식으로 해석하고 체제를 유지하려고 했다. 이런 기득권을 깨버린 게 다름 아닌 구텐베르크의 인쇄 기술이었다. 구텐베르크가 「42행 성서」를 인쇄한 이후 성경이 대량으로 보급됐고, 사람들은 교리를 손쉽게 접했다.

이를 바탕으로 수도원과 교회의 교리해석을 비판할 수 있는 근거도 마련됐다. 인쇄기 개발이 종교개혁에 불씨를 제공한 셈이다. [※참고: 그렇다고 구텐베르크가 인쇄한 「42행 성서」가 저렴했다는 건 아니다. 당시 판매 가격은 기관의 서기 한명의 3년치 봉급에 해당하는 30굴덴(Guldenㆍ독일어권 금화 단위) 정도였다.] 

이렇게 혁명적인 기술을 개발했지만 구텐베르크는 재정적으로 파산했다. 1454년 구텐베르크에게 자금을 댔던 푸스트가 제기한 소송에서 패배했기 때문이었다. 이 소송의 자료는 독일 괴팅겐대 도서관에 1455년 11월 6일에 작성한 ‘헬마스페르거 공증문서’로 남아 있다. 

이 문서에 따르면, 푸스트가 승소했고 2번에 걸쳐 빌린 원금과 복리이자를 합한 2026굴덴을 갚으라는 판결이 내려졌다. 인쇄기 한대와 몇가지 물건만 가지고 쫓겨난 구텐베르크는 성서를 출판하는 작업에서 제외됐다. 자신의 발명품을 완성할 수 있는 기회를 잃고 재정적으로 파산한 거였다. 

파산한 구텐베르크는 1459년 밤베르크(Bamberg)란 도시에서 작은 인쇄소를 열어 성경 인쇄 작업을 계속했다고 하는데,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인쇄된 성경에 이름을 남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 전기에 의하면 그는 말년에 이르러 거의 실명했다고 한다. 1468년 사망한 그는 마인츠의 프란체스코 교회(Franciscan church)에 묻혔지만, 그후 그 교회와 묘지가 파괴돼 유골이 남아있지 않다. 

이처럼 구텐베르크는 가난하고 고독한 말년을 보내야 했지만 그의 인쇄술은 유럽 전역에 급속하게 확산됐다. 그가 인쇄술을 발명한 지 불과 50년이 흐른 1500년께 유럽에선 900만권이 넘는 책들이 출판됐다. 구텐베르크가 개발한 인쇄기가 유럽사회에 얼마나 커다란 영향을 미쳤는지 보여주는 지표다. 그렇게 인쇄기와 기술이 자리잡히면서 인쇄업자들이 책 출판 활동을 주도해 활자 주조鑄造, 편집, 출판, 판매 활동까지 겸했다. 

특히 구텐베르크가 활동한 독일은 수혜를 톡톡히 입었다. 당시 사람들이 인쇄를 ‘독일의 예술’이라고 불렀으니, 두말하면 잔소리다. 구텐베르크가 활동한 독일의 마인츠(Mainz)는 로마시대에 개발한 라인강 주변의 상업도시다.

16세기 초 독일이 종교개혁의 중심지로 떠오른 것도 발달된 독일 인쇄술과 관련된다. 인쇄기술은 독일상인의 교역로를 따라 널리 확산해 로마시대부터 상업도시로 발달한 라인강 주변의 쾰른(Cologne)이 인쇄 중심지로 떠올랐다. 남부지역에서는 바젤ㆍ뉘른베르크ㆍ아우크스부르크 등 거대한 교역 중심도시들이 인쇄 중심지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구텐베르크가 인쇄한 「42행 성서(42-line Bible)」의 본문.[사진=게티이미지뱅크]
구텐베르크가 인쇄한 「42행 성서(42-line Bible)」의 본문.[사진=게티이미지뱅크]

얼마 지나지 않아 출판업의 선두자리를 차지한 뉘른베르크(Nuremberg)에는 국제적으로 활동하는 출판업자도 등장했다. 안톤 코베르거(Anton Koberger)라는 업자였는데, 그는 24대의 인쇄기를 보유하고 바젤ㆍ스트라스부르ㆍ리옹ㆍ파리 등 다른 많은 도시들에 국제 지사를 두고 출판 활동을 했다. 

15세기 말 베스트셀러인 「뉘른베르크 연대기(Nuremberg Chronicle)」가 바로 안톤 코베르거가 펴낸 책이다. 창조의 순간부터 1490년까지 역사를 담은 이 책은 세계사 그림책이다. 이 책에는 유명한 화가이자 일러스트레이션의 선구자로 꼽히는 알브레히트 뒤러(Albrecht Dürer)의 판화 등 645점의 목판화가 들어가 있다.

구텐베르크의 인쇄 기술이 비단 독일에만 영향을 미친 건 아니다. 구텐베르크 인쇄기는 1462년께 독일과 유대 관계를 맺고 있던 로마 근교의 베네딕토회(Benedictine Order)의 수도원을 통해 이탈리아에 전해졌는데, 여기서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공병훈 협성대 교수 | 더스쿠프
hobbits84@naver.com

최아름 더스쿠프 기자
eggpuma@thescoop.co.kr

저작권자 © 더스쿠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