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스쿠프 공병훈의 맥락
구텐베르크 혁명❹
유럽으로 뻗어나간 인쇄술
책 대량생산과 자국어 출판
인쇄기술, 문학뿐만 아니라
지식 보급에도 영향 미쳐

15세기 대항해시대에 출현한 뉴스, 16세기 마르틴 루터가 단행한 종교개혁, 18세기 산업혁명 이후 매스미디어로 자리 잡은 신문과 잡지…. 이 서로 다른 일들을 관통하는 주제는 무엇일까. 다름 아닌 구텐베르크(Johannes Gutenberg)가 개발한 인쇄기술이다. 그의 인쇄기술은 문학에만 영향을 미친 게 아니다. 지식혁명이란 거대한 흐름을 열어젖히는 ‘방아쇠’ 역할도 해냈다.

중세 유럽 중산층이 글을 배울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 준 건 구텐베르크였다.[사진=연합뉴스]
중세 유럽 중산층이 글을 배울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 준 건 구텐베르크였다.[사진=연합뉴스]

구텐베르크의 인쇄 기술은 그가 활동한 독일에만 영향을 미친 건 아니다. 구텐베르크 인쇄기는 1462년께 독일과 유대 관계를 맺고 있던 로마 근교의 베네딕토회(Bene dictine Order)의 수도원을 통해 이탈리아에 전해졌는데, 여기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이탈리아와 갈리아 지방에서 확산한 베네딕토회는 535~540년께 성 베네딕토(Saint Benedict)가 만든 모임이다. 복음에 바탕을 둔 자기 향상에 매진하는 모임으로, 교육ㆍ학문ㆍ선교ㆍ교구 활동에 종사했다. 역사적으로 많은 선교사를 배출해 서유럽의 그리스도교 확산에 큰 역할을 했다. 특히 문헌 보존과 사본 제작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독일처럼 이탈리아에서도 거대한 상업 도시를 중심으로 인쇄와 출판이 발달했다. 1500년께 베네치아에는 150대에 이르는 인쇄기가 있었다. 각각 15세기와 16세기에 활동한 니콜라스 젠슨(Nicolas Jenson)과 알도 마누치오(Aldus Manuzio)란 2명의 인쇄업자가 서적 출판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중 젠슨은 뛰어난 인쇄기술자로 1470년 로마체(Roman type) 활자를 완성한 사람으로, 구텐베르크의 제자다. 

구텐베르크에게 인쇄술을 익힌 후 베네치아에 인쇄소를 설립해 고전 베네치아체로 알려진 읽기 쉬운 서체를 개발했다. 이게 바로 어도비(Adobe)사의 젠슨체인데, 분류하자면 세리프(serif)체에 속한다. 세리프는 타이포그래피에서 글자와 기호를 이루는 획의 일부 끝이 돌출된 형태로 한글에선 명조체가 여기에 속한다.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이 이탈리아를 넘어 네덜란드의 위트레흐트(1470년), 헝가리의 부다페스트(1473년), 스페인의 발렌시아(1473년), 폴란드의 크라쿠프(1474년) 등의 도시에 영향을 미쳤다. 특히 스페인의 책은 대부분 고딕체로 인쇄해 독창성과 품위가 있었다. 

영국은 유럽 대륙에 비해 다소 늦은 1476년에야 인쇄 기술을 접했다. 영국에 인쇄술을 도입한 사람은 영국인 윌리엄 캑스턴(William Caxton)이다. 1471~1472년에 독일 쾰른에서 인쇄술을 배운 그는 1474년께 벨기에 브뤼즈에서 인쇄소를 경영하기 시작했다. 

사진=Vassar college 홈페이지]

50세가 넘어 영국으로 돌아온 그는 리처드 3세와 헨리 7세의 적극적인 후원을 받아 출판업을 부흥시킨다. 그는 처음부터 라틴어가 아닌 영어로 서적을 출판해 그때까지 정형화하지 않았던 영어를 공식 언어로 끌어올리는 데 큰 기여를 한다. 그가 인쇄한 90여권의 책 중 74권은 영어로 출판했고, 그중 22편은 직접 번역했다. 

이처럼 구텐베르크가 선보인 인쇄 기술이 사회ㆍ역사ㆍ경제에 끼친 영향은 매우 크다. 구텐베르크 인쇄술은 ▲많은 활자를 정확히 주조할 수 있도록 자모字母를 각인한 주형과 활자 합금, ▲프레스(압축기)를 응용해서 만든 인쇄기, ▲인쇄잉크 등 혁신적인 기술의 조합이었다. 그의 인쇄기는 책의 대량 생산을 가능하게 만들어 중산층들이 글을 배울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줬다.

그의 인쇄 기술이 바꿔놓은 흐름은 또 있다. 작가들이 라틴어가 아닌 자국어로 출판하는 흐름을 만들어낸 거다. 대표적 인물은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다. 독일의 가톨릭 수사이자 사제, 신학교수였던 그는 종교개혁의 핵심 인물이다. 

아우구스티노회 수사였던 루터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여러 가르침과 전통을 거부했다. 대사의 오용과 남용을 강하게 성토한 그는 1517년 95개 논제를 게시하면서 도미니코회 수사이자 대사령 설교 담당자인 요한 테첼에 맞섰다. 1520년 그는 교황 레오 10세로부터 ‘모든 주장을 철회하라’는 요구를 받았지만 거부했고, 이듬해 교황에게 파문破門(신도자격 박탈)을 선고받았다.

그후 루터는 바르트부르크성에 은둔하면서 논문을 저술하고 신약성서를 번역했다. 루터는 이때 독일어로 성서를 번역했는데, 1522년 9월에 출판했기 때문에 「9월 성서(Septemberbibel)」라 불렸다. 루터의 독일어 성서 번역은 독일 기독교인을 교회의 권위에서 해방하고, 독일어 발전에 이바지한 신학적ㆍ언어학적 사건이었다. 

독일 종교개혁 이전에 사용한 성서는 라틴어로 쓰여 있어서 소수의 귀족과 성직자만이 읽을 수 있었다. 그래서 성직자들은 자신들의 목회적 필요에 따라 성서를 자의적으로 해석해 기독교인들을 조정했다.

하지만 루터가 독일어로 성서를 번역하면서 독일 기독교인들은 성직자들의 지배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성서를 읽을 수 있게 됐다. 아울러 루터가 성서 번역에 사용한 고지독일어는 훗날 현대 표준 독일어가 됐다. 루터의 성서 번역이 독일어와 문법이 통일되는 기폭제 역할을 해낸 셈이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사진=게티이미지뱅크]

구텐베르크의 눈부신 인쇄기술은 르네상스ㆍ계몽주의ㆍ종교개혁과 맞물려 유럽을 중세의 우매함과 암흑에서 벗어나게 하는 원동력으로 작용했다. 특히 소수가 독점하던 성경이 구텐베르크의 인쇄기 덕분에 다수가 공유할 수 있는 지식으로 변화한 건 혁명적인 사건이었다. 이 변화는 엘리트 집단의 폐쇄성을 무너뜨리고 대중 교육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나 다름없었다. 

이뿐만이 아니다. 대항해시대에 뉴스를 공유하기 위한 신문이 출현하고 산업혁명을 거쳐 신문과 잡지가 매스미디어로 자리를 잡는 데도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이 결정적인 역할을 해냈다. 구텐베르크가 지식혁명의 방아쇠를 당긴 셈이다.

공병훈 협성대 교수 | 더스쿠프
hobbits84@naver.com

최아름 더스쿠프 기자
eggpuma@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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