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스쿠프 공병훈의 맥락
구텐베르크 혁명➋
포도주 압착기 모티브
20세기 전까지 유지돼
동료와 방향 놓고 갈등
갈등 속에서 만든 성서

중국은 3세기부터 목판 인쇄를 했다. 금속활자를 세계 최초로 개발한 나라는 고려다. 그럼에도 15세기에 개발된 구텐베르크(Johannes Gutenberg)의 인쇄기가 ‘혁신의 산물’로 꼽히는 건 여러 장을 한번에 인쇄할 수 있는 ‘압축기술’ 때문이다. 구텐베르크의 기계식 인쇄 방법을 오프셋인쇄(offset printing)가 출현하는 20세기까지 그대로 사용했다는 건 더 놀라운 일이다. 

구텐베르크는 활자판을 위한 각 글자를 한묶음으로 정밀하게 절단할 수 있는 주형틀도 고안했다.[사진=위키백과]
구텐베르크는 활자판을 위한 각 글자를 한묶음으로 정밀하게 절단할 수 있는 주형틀도 고안했다.[사진=위키백과]

15세기 서양의 지식 혁명에 불을 지핀 주인공인 그는 포도주를 짤 때 사용하는 압착기를 개조해 근대적 인쇄기계를 만들었다. 그럼에도 그를 ‘근대 활판 인쇄술의 발명자’라고 정의하는 건 무리다. 중국은 3세기께부터 목판 인쇄를 했고, 14세기 들어선 유럽 여러 곳에서도 목판 인쇄를 하고 있었다. 고려는 금속활자를 개발해 경전까지 인쇄했다. 그럼 구텐베르크의 위대함은 뭘까.

답은 간단하다. 그의 위대함은 불편하고 번거로웠던 인쇄술을 기계식으로 개발해 대량 인쇄를 가능하게 했다는 점이다. 구텐베르크 인쇄술의 혁신적인 점은 세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많은 활자를 정확히 주조할 수 있도록 인쇄기에 자모字母를 각인한 ‘펀치 모형’을 부착했다. 이에 따라 구텐베르크의 인쇄기는 필요에 따라 낱개의 글자를 새겨 글자들을 끼웠다 뺐다를 할 수 있어서 속도가 빠르고, 편의성과 인쇄의 품질이 좋았다. 

둘째, 포도주 제조 및 제지ㆍ제본할 때 쓰이는 프레스(압착기)를 응용해서 만들었다. 구텐베르크보다 앞서 개발된 중국 한자의 인쇄기도 낱개의 글자를 움직일 수 있었지만 기계로 눌러서 인쇄하는 방법은 아니었다. 눌러서 인쇄하는 방식이 아니면 여러 장을 인쇄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셋째, 유성 인쇄잉크를 사용했다. 중국이나 한국의 인쇄술, 또는 여러 종류의 목판에 활자를 찍었던 유럽의 인쇄기술에서 이런 특징은 볼 수 없다. 

놀랍게도 구텐베르크의 기계식 인쇄 방법과 원리는 오프셋인쇄(offset printing)가 출현하는 20세기까지 그대로 사용했다. 따라서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을 컴퓨터나 인터넷의 개발보다 더 중요하게 취급하기도 한다. 그럼 구텐베르크는 인쇄를 ‘압착’하는 아이디어를 어디서 착안했을까.

답을 찾으려면 구텐베르크의 생애를 살펴봐야 한다. 일단 그의 아버지가 금화를 제조하는 조폐국에서 일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압착 아이디어는 거기에서 가져왔을 가능성이 높다.

구텐베르크는 1398년께 독일 마인츠(Mainz)에서 태어났다. 당시 서류를 보면, 그는 금세공사조합에 가입해 금속세공기술을 익혔다. 1430년 마인츠의 조합 측과 귀족계급이 오랫동안 벌여온 싸움 와중에 도시에서 쫓겨난 그는 프랑스의 슈트라스부르로 갔다. 

그는 프랑스에서 동업자들과 함께 보석세공과 거울을 만드는 일을 했다. 많은 학생에게 기술을 가르치기도 했다. 그가 부유한 방문판매원에게 보석들을 광택 내는 방법을 가르쳤다는 기록도 있다.

[사진 | 게티이미지뱅크] 
[사진 | 게티이미지뱅크] 

이런 사실은 구텐베르크가 금속 작업에 상당한 수준의 노하우를 지니고 있었다는 점을 시사한다. 아버지로부터 압착기술의 아이디어를 가져왔다면 금속세공 기술은 금속활자를 개발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을 것이다. 

1448년 10월 마인츠로 돌아온 구텐베르크는 재정가인 요한 푸스트(Johann Fust)를 설득해 인쇄기와 800굴덴(Guldenㆍ독일어권 금화 단위)이란 꽤 많은 돈을 빌렸다. 2년 뒤 푸스트는 800굴덴을 더 투자해 사업 동업자가 됐다. 그런 푸스트는 자신의 투자가 안전하고 신속한 결실을 맺기를 바랐다. 

반면, 구텐베르크는 속도보단 완전성을 지향해 둘 사이는 이내 멀어졌다. 어쨌거나 1448년 푸스트의 자금으로 구텐베르크는 인쇄소를 차렸다. 구텐베르크가 꿈꾸던 것은 중세 전례典禮의 필사본들을 색깔이나 디자인의 아름다움을 손상하지 않고 기술적으로 재생하는 방법을 고안하는 것이었다. 그 중심에 ‘구텐베르크 성서’라고 부르는 「42행 성서」가 있었다. 

공병훈 협성대 교수 | 더스쿠프
hobbits84@naver.com

최아름 더스쿠프 기자
eggpuma@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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