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찰·열정·소통의 리더 이순신 51편 
많은 전과 올린 당항포해전
굴욕적 통지문 받은 이순신
힘 없는 조선 깔본 명나라
전염병에 취약한 조선 수군
전쟁보다 무서웠던 전염병
이순신도 피하지 못한 역병

1594년 봄, 이순신은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을 들었다. 명나라에서 날아온 패문牌文(통지문)이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적을 치지 마라.” 분노가 치밀어 올랐지만 천하의 이순신도 어쩔 수 없었다. 명나라에 의존하는 외교정책 때문이었다. 어쩔 땐 미국, 또 어쩔 땐 중국 때문에 오락가락하는 지금의 대한민국은 이때와 뭐가 다를까. 힘이 없으니 ‘전략적 관계’를 택해야 한다는 우리의 오랜 외교 전술은 옳은 걸까.

국제관계는 신의보단 힘이 지배한다.[사진=게티이미지뱅크] 

이순신은 1594년 2월 13일 선조의 출전 명령서를 받고 경남 창원의 저도에서 소비포 만호 이영남, 사량 만호 이여념, 영등포 만호 우치적과 합류한 후 오후 6시쯤 한산도로 들어왔다. 이순신 일행이 도착하자 원균의 군관이 찾아와 “적선 8척이 춘원포春院浦에 정박했다”며 출전을 허락해줄 것을 요청했다. 

이때 순신은 나대용을 불러 원균에게 가서 이렇게 전하라고 지시했다. “작은 이익을 보고 들이치다가 큰 이익을 거두지 못할 우려가 있으니, 지금은 가만히 뒀다가 적선이 많이 나오면 기회를 엿봐서 무찔러야 합니다.” 순신은 아픈 몸을 추스르며 부대를 점검하는 등 출전 준비에 들어갔다. 그러던 중 경상우수사 원균이 거느린 전선이 고작 20척에 불과하다는 보고를 받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순신은 그날 일기에 “한심스럽다”고 적었다. 

당시 조선의 수군의 전력을 살펴보면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다. 전라좌도의 경우 판옥선은 42척(임진왜란 당시 24척), 전라우도는 52척으로 늘어나 있었다. 규모가 가장 작은 충청수군의 9척을 포함하면 모두 123척 규모였다. 조선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했던 경상우도의 전선 규모가 이처럼 초라한 까닭은 원균의 지도력이 그 정도였기 때문이다. 

출전 준비를 하는 동안 정찰과 탐문에 나섰던 삼도수군통제사 휘하의 포작선들로부터 크고 작은 내용의 보고가 잇따라 올라왔다. 당항포에 있는 적선들의 규모가 가장 컸다. 3월 3일 저녁, 이순신은 제장들을 불러 모아 함선들을 집결하라는 명령과 함께 작전을 지시했다. “대군은 흉도 앞바다에서 진을 치고, 우조방장 어영담은 정예선 30척을 거느리고 적을 무찌르시오.”

이에 따라 전라좌수영, 전라우수영, 경상우수영에서 각각 10척의 정예선이 선발됐다. 여기엔 전라우수영의 거북선 1척이 돌격선으로 포함됐다. 이순신은 또 주장인 어영담 외에 좌척후장 사도첨사 김완, 일령장 노천기盧天紀, 이령장 조장우曹長宇, 좌별도장 전 첨사 배경남裵慶男, 판관 이설, 좌위장 녹도만호 송여종 등 30명의 최정예 장수들을 뽑아 별동대의 각 함선을 이끌도록 했다. 당항포는 포구가 좁아 삼도수군의 판옥선들이 동시에 진입할 수 없는 지역이다. 이순신이 별동대를 구성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3월 4일 새벽 2시. 한산도의 삼도수군의 함대가 일제히 당항포를 향해 출항했다. 함대 중 20여척은 견내량에 잠복시켜 웅천·김해 등지의 적이 배후를 칠 경우를 대비했다. 당항포로 가는 도중 진해 앞바다에서 적선 6척을, 저도에서 적선 2척을 발견하고 불태워 수장하고 고성땅 아자음포에 도착해 진을 치고 밤을 보냈다. 

이때 이순신은 당항포 외에 그 안쪽의 소소강에도 14척의 적선이 들어와 있다는 보고를 받고 어영담과 원균에게 모두 토벌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3월 5일 새벽, 조선 삼도수군이 공격을 시작했다. 이순신은 이억기와 더불어 당항포 포구 바깥 큰 바다에서 학익진을 펼쳐 만약의 사태에 대비했다. 

역병으로 몸이 불편했던 때라 이순신은 이날 따라 민감했던 모양이다. 보고가 들어오기도 전에 겸사복 윤봉을 당항포로 보내 결과를 탐문해오도록 지시했다. 어영담이 긴급보고를 올렸다. “왜적들이 우리 군사들의 위엄을 겁내 밤을 틈타 도망쳐 버렸습니다. 그래서 빈배 31척을 모조리 불태워 버렸습니다.” 원균도 같은 내용의 보고를 올렸다. 

조선수군의 출정 소식에 왜적들이 전날 밤을 틈타 모두 도망친 것은 아니었다. 전투 당일 방어에 나서긴 했지만, 수세에 몰리자 결국 부리나케 육지로 도망쳤다. 조선 수군은 1차 당항포해전(임진년 6월 5일)때보다 이번 2차 당항포해전에서 훨씬 많은 전과를 올렸다. 1차에서는 ‘전함 26척 전파, 2700여명 사망’이었으나 2차 당항포해전에서는 적의 전함 31척 전파에 사망자는 4100명에 달했다. 

3월 6일, 조선 수군들의 사기가 충천한 가운데 한산도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거제로 향하는 저녁 항해에 거센 역풍이 불어 힘겹게 흉도에 도착했건만 이순신은 청천벽력을 맞았다. 남해현령 기효근의 보고 때문이었다. 

“명나라 군사 2명과 왜놈 8명이 패문牌文(중국에서 조선에 칙사를 파견할 때 파견목적, 일정 등을 기록해 사전에 보내던 통지문)을 갖고 왔기에, 명나라 군사 2명과 패문을 보내드립니다.” 이순신이 패문을 보니 명나라 도사부 담종인이 ‘적을 치지 말라’는 내용이었다. 이 패문을 본 순신은 나라가 없는 듯한 서러움과 분노에 치를 떨었다. 이순신은 이날 일기에 “나는 몸과 마음이 몹시 괴로워 앉거나 누워 있는 것조차 불편했다”고 기록했다.

다음날인 3월 7일, 이순신은 아랫사람에게 회답 패문을 만들도록 지시했다. 원래 이순신은 글짓기나 쓰기를 남에게 대신 시켜본 적이 없었지만, 이날은 몸이 극도로 불편했던 데다 조선의 처지를 깔보는 명군의 처신에 분통이 터져 붓을 잡을 마음도 생기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글귀가 마음에 들지 않아 못마땅한 표정을 드러냈다. 이때 원균이 자처하고 나섰다. 글을 잘 쓴다고 소문난 손의갑에게 회답문을 만들게 했는데 이마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순신은 가까스로 몸을 일으켜 세워 글을 짓고, 쓰기와 전달은 정사립에게 맡겼다. 

회답문의 내용은 이러했다. “왜적은 간사스럽기 짝이 없어, 예로부터 신의를 지켰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습니다. 게다가 교활하고 흉악해 그 악랄함을 감추지 않습니다.” 이순신은 당항포해전에서 전공을 세운 휘하 장수들의 공을 일일이 점검한 뒤 오후 2시쯤 흉도에서 출항해 밤 11시에 한산도 본영으로 돌아왔다.

한산도에 돌아온 이후 이순신에게 편한 날이 없었다. 갑오년의 봄은 이순신에게도, 조선 수군에게도 잔인한 계절이었다. 조선 수군은 전염병에 취약했다. 육군과 달리 함선의 좁은 장소에서 생활하다 보니 집단감염에 무방비로 노출될 수밖에 없었다.

이순신은 명나라의 굴욕적 통지문을 받았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사진=더스쿠프 포토] 
이순신은 명나라의 굴욕적 통지문을 받았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사진=더스쿠프 포토] 

봄이 오면서 전염병이 엄청난 기세로 퍼졌다. 하루에 200여명이 전염병으로 죽기도 했다. 이로 인해 전라좌수영 소속 수군의 10분의 1인 600명이 사망했다. 그동안 왜적과의 해전에서 사망한 조선 수군은 39명이었다. 조선 수군에겐 전투보다 더 무서웠던 것이 전염병이었다. 

그처럼 강인했던 이순신도 이를 피해가진 못했다. 급기야 당항포 토벌작전을 마치고 한산도에 돌아온 직후인 3월 7일부터 2개월 동안 때로는 인사불성이 될 정도로 병에 시달려야 했다. <다음호에 계속> 

이남석 더스쿠프 발행인
cvo@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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