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conomovie] 상황논리와 정당방위
[Economovie] 상황논리와 정당방위
  • 김상회 정치학 박사
  • 호수 329
  • 승인 2019.03.13 10:5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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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회의 영화로 읽는 한국사회 | 라쇼몽羅生門❹

한 노파가 여자 시체의 머리칼을 뽑아 가발을 만들어 판다. 죽은 여자는 뱀을 말려 어포로 속여 팔던 여자다. 직장을 잃은 한 남자는 머리칼을 뽑던 노파의 옷을 벗겨 달아난다. 문루에 버려진 갓난아기를 데려가는 남자를 보며 사람들은 그가 아기를 삶아먹기 위해 가져간다고 의심한다. 환란의 헤이안 시대 라쇼몽에서 벌어진 참상이다.

상황논리란 욕망과 게으름, 그리고 무능에 대한 ‘비겁한 변명’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끊이지 않는 전란과 기근, 그리고 역병까지 마치 ‘재앙 3종세트’와 같은 혼동 속 헤이안 시대(약 800~1200년), 서울의 남대문에 해당할 법한 수도 헤이안쿄平安京(현재의 교토)의 대문 ‘라쇼몽’의 무너져가는 문루에서 벌어지는 ‘삽화’들이 시대의 참상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가히 토마스 홉스(Thomas Hobbs)가 말한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All against all)’의 극적인 장면들이다. 

17세기 영국의 법학자이자 사상가였던 토마스 홉스는 인간의 본성을 지극히 이기적이고 악한 것으로 결론 내린다. 그렇기 때문에 ’강력한 국가‘가 인간의 악한 본성을 억누르고 제재를 가하여야만 사회가 유지될 수 있다고 본다.

국가가 무너진 ’자연상태(State of Nature)’에서는 서로가 서로를 죽이고 잡아먹는 투쟁이 벌어져 결국은 모두가 죽게 될 뿐이라고 경고한다. 동물의 생태계는 국가권력이 통제하지 않는 자연상태에서도 유지되지만, 인간은 욕망이 끝이 없고 서로가 서로를 죽일 수 있는 동등한 능력(무기)이 있기 때문에 국가권력의 통제가 없으면 결국 공멸할 것이라고 진저리 친다.

사람들은 상황논리의 불가피성을 내세워 자신들의 행위를 합리화한다. [사진=더스쿠프 포토]
사람들은 상황논리의 불가피성을 내세워 자신들의 행위를 합리화한다. [사진=더스쿠프 포토]

그러나 토마스 홉스가 우려한 ‘서로가 서로를 죽일 수 있는 동일한 능력(equal ability to kill each other)’보다 더 끔찍한 것은 인간들 사이에서 매우 익숙해진 ‘상황논리에 따른 자기합리화’다. 죽은 여자의 머리털을 뽑아 파는 노파나 그 노파의 옷을 벗겨 달아나는 사내 모두 그것이 나쁜 짓이기는 하지만 그짓이라도 안 하면 당장 굶어 죽게 생겼다는 상황논리를 내세워 자신의 행위를 합리화하고 시치미를 뗀다. ‘사흘 굶어 남의 집 담장 넘지 않는 사람 없다’는 상황논리를 닮았다. 

상황논리는 항상 그 불가피성을 내세워 마치 ‘정당방위론’처럼 펼쳐진다. 자신의 목숨이 위협받는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다른 사람의 목숨을 해칠 수밖에 없었다고 변명한다. 그러나 상황논리와 정당방위논리는 엄연히 다르다. 정당방위가 인정되는 범위는 자신을 해하려는 자로부터 자신을 지킬 수 있는 권리지만, 라쇼몽의 노파와 사내가 동원하는 상황논리 속 여자 시체나 노파는 그들을 해치려 한 것이 분명 아니었음에도 오직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해친 것에 불과하다.

모두가 상황논리를 펼치며 당당해 하는 사회는 토마스 홉스가 두려워한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상태가 될 수밖에 없다. 우리가 동원하는 상황논리는 많은 경우 자신의 욕망에 대한 변명이거나 혹은 자신의 무능과 게으름에 대한 변명에 불과하다. 과연 노파는 여자 시체의 머리털을 뽑지 않았다면 정말 굶어 죽을 수밖에 없었을까. 사내는 그 노파의 옷을 벗겨 팔지 않으면 굶어 죽을 수밖에 없었을까. 아마 그렇지는 않을 듯하다. 

'친일파'와 '5·18'을 둘러싸고 라쇼몽의 노파와 같은 상황논리가 판치고 있다. [사진=뉴시스]
'친일파'와 '5·18'을 둘러싸고 라쇼몽의 노파와 같은 상황논리가 판치고 있다. [사진=뉴시스]

어쩌면 상황논리란 모두 자신의 욕망과 게으름, 그리고 무능에 대한 ‘비겁한 변명’에 불과할지도 모르겠다. 대통령이 삼일절을 맞아 70년 묵은 ‘친일청산’을 다시 말한다. 5·18 처벌문제도 40년이 지나도록 논란이 계속된다. ‘친일파’나 ‘5·18 가해자’로 지목된 쪽 모두 상황논리를 내세운다. 그 당시 상황에서 친일행위나 시민에 대한 발포가 불가피했다는 논리다.

친일파 재판에 넘겨진 안타까운 문호 춘원 이광수는 ‘친일파 숙청 운운은 공산당에 동조하는 것’이며 ‘병자호란 때 청나라로 잡혀가 몸을 더럽힌 사대부 집안의 여인들도 조선으로 돌아올 때 모두 홍제동에서 목욕을 시켜 귀가시킨 다음 더럽혀진 정조를 불문에 부쳤다’는 참으로 신묘한 논리를 내세운다. 청나라로 끌려간 여인네만큼이나 ‘불가피했던’ 자신의 친일 행적을 더 이상 논해서는 안 됨을 선언한다. 

‘친일파’와 ‘5·18’을 둘러싸고 라쇼몽의 노파나 사내와 같은 상황논리가 판을 치고, 춘원 이광수 선생이 반민특위에서 특위 심판들을 준엄하게 가르쳤던 신묘한 논리들이 끈질긴 생명력을 발휘하며 횡행한다. 모두 어지럽다.
김상회 정치학 박사 sahngwhekim5353@gmail.com | 더스쿠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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