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착륙 국제관광비행의 함정

항공업계와 면세점업계가 코로나19의 직격탄을 맞았다. 분위기를 반전시키기 위해 정부가 특단의 대책을 내놨다. ‘무착륙 국제관광비행’이다. 명칭은 국제 비행이지만 사실상 외국 땅에 발을 딛진 않는다. 그럼 굳이 국제 비행이어야 할 이유가 뭘까. 면세혜택 때문이다. 문제는 무착륙 국제관광비행이 과세원칙의 본질을 흔들어놓을 수 있다는 점이다. 더스쿠프(The SCOOP)가 무착륙 국제관광비행에 숨은 함정을 취재했다. 

제주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이 지난 12일 첫 무착륙 국제관광비행 항공편을 띄웠다.[사진=연합뉴스]
제주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이 지난 12일 첫 무착륙 국제관광비행 항공편을 띄웠다.[사진=연합뉴스]

승객을 가득 채운 여객기가 인천공항 활주로를 달린다. 창공을 힘차게 가르던 여객기는 약 1시간 30분 뒤 목적지에 도착한다. 착륙한 곳은 다시 인천공항. 인천공항을 떠난 여객기가 다시 인천공항으로 돌아온 건 항공기에 문제가 발생해서가 아니다. 이는 지난 10월부터 국내 일부 항공사가 운행한 코스였다. 목적지나 착륙지가 없다고 해서 ‘무목적’ ‘무착륙’ 비행이라고 불렀다. 

이 이상한 상품은 코로나19로 하늘길이 꽉 막힌 상황에서 인기를 끌었다. 여행 가는 기분이라도 내려는 사람들과 저렴한 가격에 ‘비즈니스’ 좌석을 경험하고픈 이들의 욕구를 자극한 결과였다. 

일종의 ‘투어용’ 국내 무착륙 비행의 가능성을 본 정부는 사업을 더 키웠다. 국내 상공만 비행하던 무착륙 항공편을 국제선으로 확대했다. 11월 19일 홍남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피해업계를 지원하고 소비 분위기 확산을 위해 새로운 관광 형태인 ‘무착륙 국제관광비행’ 도입을 추진하겠다”고 말했다. 

그로부터 한달여 만인 지난 12일, 제주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이 첫 무착륙 국제관광비행 항공편을 띄웠다. 인천에서 이륙한 여객기가 일본 상공을 비행한 뒤 인천으로 돌아오는 코스였다. 비행시간은 2시간에서 3시간 20분가량. 오는 19일엔 에어부산이 무착륙 국제관광비행을 띄운다. 2021년 1월 2일까지 총 26편의 무착륙 국제관광비행 항공편이 운항될 예정이다. [※참고 : 에어서울은 코로나19 확산세가 거세지자, 19일과 25일 예정돼 있던 무착륙 국제관광비행 항공편을 취소했다.]

그런데 이 지점에선 궁금한 게 있다. 목적지가 없고, 착륙도 안 하는데 국제선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무착륙 국제관광비행의 초점이 국내 무착륙 비행처럼 ‘투어’에 맞춰져 있다면 ‘아무런 의미’도 없다. 하지만 무착륙 국제관광비행의 방점은 ‘쇼핑’에 찍혀 있다. 정부는 무착륙 국제관광비행 승객의 경우 일반 해외여행자와 동일한 면세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허용했다. 

무착륙 국제관광비행 승객이라면 출국장ㆍ시내ㆍ온라인 면세점을 이용할 수 있다는 얘기다. 무착륙 국제관광비행이 항공업계와 함께 면세점업계를 살리기 위한 정책이었던 거다. 

정책의 취지는 이해할 만하다. 면세점업계는 코로나19 여파로 여행객이 급감하면서 부진의 늪에 빠졌다. 통계청 서비스업동향조사에 따르면 면세점업계의 올 3분기 누적 판매액은 4조1798억원으로, 지난해 3분기 누적 판매액인 6조4415억원 대비 35.1% 줄었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는 무착륙 국제관광비행을 통해 항공사와 면세점이 ‘윈윈’하는 그림을 그렸을 수 있다. 

문제는 소비자가 응답하느냐였는데, 가능성이 없지 않다. 무엇보다 무착륙 국제관광비행 승객이 누릴 수 있는 면세 혜택(면세한도 600달러ㆍ약 65만원)이 만만치 않다. 관세율이 8%인 600달러짜리 가방을 구매했다고 치자. 여기에 붙는 관부가세는 13만원꼴이다. 교육세ㆍ개별소비세 등의 세금도 제외된다. 면세한도 600달러 외 별도로 세금이 면제되는 주류(1Lㆍ400달러 이하 1병), 담배(1보루), 향수(60mL 이하)까지 포함하면 면세혜택은 더 크다.

항공권 가격 역시 괜찮다. 무착륙 국제관광비행을 편성한 항공사들의 항공권 가격은 에어부산 11만9000원, 에어서울 19만7000원, 제주항공 19만8000원, 아시아나항공 25만~40만원(비즈니스 좌석)이다. 면세혜택을 잘 활용하면 항공권 가격을 충분히 메울 수도 있다. 소비자의 수요가 어떨지는 좀 더 지켜봐야겠지만 무착륙 국제관광비행이 항공업계와 면세점업계의 숨통을 틔워줄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다는 얘기다. 

하지만 그전에 따져봐야 할 문제가 있다. 무착륙 국제관광비행 승객에 면세혜택을 주는 게 과연 합당하느냐는 거다. 면세점의 본질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면세점에서 세금을 면제해주는 이유는 간단하다. 국내에서 사용하지 않을 제품이라서다. 당연히 원칙적으로는 출국장 면세점에서 구입한 제품을 다시 국내에 반입하려면 면제받은 세금을 뱉어내야 한다. 여기엔 소비지 과세 원칙이 전제로 깔려있다.

[※참고 : 일반 여행자들은 국내 입국 시 600달러 한도 내에서 면세혜택을 받는다. 1974년 발효된 교토협약에 여행객의 휴대물품ㆍ선물 등은 면세혜택을 줄 수 있도록 정한 조항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해외에 발도 내딛지 않은 무착륙 국제관광비행 승객들이 국내 면세점에서만 구입한 제품에 똑같은 기준을 적용해야 할지는 논의가 필요하다.]

관세청 관계자는 “국내에서 소비하지 않는 제품에 과세하는 건 과세 논리에 부합하지 않기 때문에 ‘면세제도’가 성립된 것”이라면서 “이런 맥락에서 무착륙 국제관광비행 승객에게 주는 면세 혜택은 본래 취지와 맞지 않는 게 사실”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무착륙 국제관광비행이 효과를 내려면 면세점 이용이 관건이어서 국토교통부에서 검토 요청이 왔고, 면세점업계와 항공업계가 어려움을 겪고 있는 상황을 감안해 일반 여행자와 동일한 조건으로 면세혜택을 제공하기로 결정했다”고 덧붙였다.

익명을 원한 한 업계 관계자는 “출입국 절차를 밟는다고 하지만 무착륙 국제관광비행을 통해 실제로 해외여행을 가는 건 아니다”면서 “사실상 면세점 소비를 진작하기 위해 내놓은 상품이나 다름없는데, 이는 주객이 전도된 것이나 마찬가지다”고 지적했다.

정부가 내놓은 무착륙 국제관광비행이 침체된 항공업계와 면세점업계에 활기를 불어넣을지 아직 알 수 없다. 하지만 무착륙 국제관광비행이 면세와 과세 원칙의 본질을 흔들어놓진 않을지 걱정이다. 

고준영 더스쿠프 기자
shamandn2@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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