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아파트 ‘허리’가 사라졌다

2015년 현대건설이 강남을 겨냥한 아파트 프리미엄 브랜드 ‘디에이치’를 론칭한 이후 시장엔 ‘고급화 바람’이 불었다. 롯데건설, DL이앤씨(옛 대림산업) 등 대형 건설사들이 프리미엄 브랜드를 줄줄이 론칭하고 나섰던 거다. 그러자 서울 아파트 시장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프리미엄 브랜드가 시장을 파고들면서 중견 건설사들은 입지를 잃었고, 더 작은 건설사들은 다른 곳에서 일감을 찾았다. 양극화가 깊어졌다는 거다.

2015년 현대건설 ‘디에이치’를 시작으로 아파트 프리미엄 브랜드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사진은 DL이앤씨가 2019년 리뉴얼한 아크로.[사진=연합뉴스]
2015년 현대건설 ‘디에이치’를 시작으로 아파트 프리미엄 브랜드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사진은 DL이앤씨가 2019년 리뉴얼한 아크로.[사진=연합뉴스]

많은 기업이 상품을 업그레이드한다. 시장경제체제에선 당연한 일이다. 소비자들은 항상 자신이 만족할 수 있는 ‘더 좋은 것’을 원하기 때문이다. 아파트도 마찬가지다. 강남 등 집값이 비싼 지역에 만들어지는 신축 아파트엔 이전엔 없었던 새 ‘브랜드’가 붙곤 했다.

현대건설은 2015년 고급 아파트 브랜드 ‘디에이치’를 선보였는데, 구체적인 타깃은 ‘강남’이었다. 현대건설은 3.3㎡(약 1평)당 분양가 3500만원이 넘는 고가 아파트에만 ‘디에이치’를 적용하겠다는 기준을 세웠고 ‘프리미엄 브랜드’ 효과는 실적으로 이어졌다. 디에이치를 론칭한 그해, 현대건설은 강남 삼호가든3차 아파트 재건축 수주를 따냈다. 그 이듬해엔 개포주공3단지 재건축에 ‘디에이치’ 브랜드를 붙였다.

현대건설의 성공은 후발주자도 만들어냈다. 디에이치 탄생 후 2년이 지난 2017년 대우건설은 ‘정상’이라는 뜻의 써밋(Summit)을 붙인 ‘푸르지오써밋’이라는 프리미엄 브랜드를 공개했다. 다시 2년이 흐른 2019년에는 10대 건설사들이 프리미엄 브랜드를 앞다퉈 발표했다.

DL이앤씨(옛 대림산업)는 1999년 발표했던 고급 주거 브랜드를 그해 ‘처음’ ‘정점’이란 의미의 영어 접두사 ‘아크로(ACRO)’로 변경했다. 롯데건설은 한정판(Limited Edition)과 롯데의 상징으로 사용하고 있는 ‘엘(EL)’을 결합한 프리미엄 브랜드 ‘르엘(LE-EL)’을 선보였다. 호반건설도 대우건설과 마찬가지로 ‘써밋’을 이용해 프리미엄 브랜드 ‘호반써밋’을 론칭했다.


하지만 대형 건설사들이 줄줄이 선보인 아파트 프리미엄 브랜드는 후유증도 남겼다. 프리미엄 브랜드가 늘어나는 동안 중견 건설사(시공능력평가순위 11~50위)는 상대적으로 서울에 아파트를 만드는 게 어려워졌다. 이 자리를 비집고 들어온 건 아이러니하게도 시평 순위 50위권 밖 중소 건설사들이었다. 소규모 주택정비사업이 활발해지면서 이 틈을 치고 들어온 거다.

쉽게 말해, 프리미엄 브랜드처럼 값비싼 대단지 아파트와 200세대 이하로 작게 공급되는 아파트 브랜드는 늘어났지만 중간은 비어버린 셈이다. 이런 상황은 디에이치가 막 탄생한 2015년과 2020년 서울에서 분양한 아파트 브랜드를 살펴보면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중소규모 건설사 설 자리 좁아졌나

주택건설협회와 한국부동산원 자료에 따르면 2015년 서울에서 분양한 아파트는 38개 단지였다. 이중 10대 건설사가 분양한 단지는 전체의 76.3%(29개)를 차지했다. [※참고: 시공능력 평가액에 따라 국토교통부가 매년 발표하는 시평 순위 중 1~10위에 해당하는 건설사를 말한다.] 시평 순위 11~50위권 중견 건설사의 아파트 브랜드는 15.8%(6개)를 기록했다. 나머지 7.9%(3개)는 50위 밖 중소 건설사들이 만든 소규모 아파트였다.

그럼 프리미엄 브랜드가 늘어난 2015년 이후엔 어떤 변화가 나타났을까. 같은 자료의 시점을 2020년으로 바꿔 다시 분석해봤다. 2020년 서울에서 분양한 아파트 단지는 33개였고 이중 18개(54.5%)가 10대 건설사 브랜드였다. 2015년(76.3%)과 비교하면 21.8%포인트가 줄었다. 반면 프리미엄 브랜드는 15.2%(5개)로 가파르게 늘어났다. 서울에서 분양하는 아파트 10개 단지 중 1.5개 단지가 생긴 지 5년도 채 되지 않은 프리미엄 브랜드라는 거다.

하지만 중견 건설사의 몫은 2015년 15.8%에서 2020년 9.1%(3개)로 6.7%포인트 감소했다. 중견 건설사가 서울 안에 설 자리가 좁아진 거다. 대신 그 자리는 시평 순위 50위 밖 건설사들이 차지했다. 2015년 3개 단지에 불과했던 50위 밖 건설사 아파트 브랜드는 2020년 12개로 늘어나며 비중 역시 7.9%에서 36.4%로 훌쩍 늘어났다.

그렇다고 50위권 밖 건설사가 영향력을 키웠다는 건 아니다. 규제 완화로 소규모주택정비사업이 활력을 띠면서 소형 건설사가 소규모 아파트 단지를 분양했을 뿐이다. 이런 아파트는 대부분 1~2동의 상가 건물을 철거하고 공동주택을 만들거나 소규모 주택재건축으로 진행된 것들이다.

2020년 프리미엄 아파트 브랜드는 서울 분양 아파트 단지 중 15%를 차지했다.[사진=연합뉴스]
2020년 프리미엄 아파트 브랜드는 서울 분양 아파트 단지 중 15%를 차지했다.[사진=연합뉴스]

실제로 50위권 밖 건설사가 분양한 12개 아파트 단지 중 2개 사업지를 제외하면 모두 대지면적 1만㎡(약 3025평) 이하로 소규모 주택정비사업지 기준선이다. 12개 단지 중 3개 단지는 주택 재건축 사업으로 공급됐지만 300세대 이하로 중간 규모의 아파트 단지도 아니었다.

소규모 단지 왜 늘어났을까


허준열 투자의신 대표는 “200세대 이하의 소규모 단지라면 중견 건설사 입장에서는 브랜드 이미지를 떨어뜨릴 수 있다고 판단했을 것”이라며 “브랜드 이미지 하락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중소규모 건설사들이 이런 시장에 진입했다고 봐야 한다”고 설명했다. 결과적으로 작은 시장이 늘어났을 뿐 50위권 밖 건설사가 역량을 키웠다고 보긴 어렵다는 얘기다.

서울에서 분양하는 아파트 브랜드 시장은 5년 만에 결국 ‘양극화’로 수렴했다. 프리미엄 브랜드와 시평 50위 밖 건설사의 아파트 브랜드가 늘어나는 동안 그사이에 있었던 중견 건설사의 아파트 브랜드 단지는 줄어들었다. 서울 아파트의 새 풍경이다.

최아름 더스쿠프 기자
eggpuma@thescoop.co.kr

저작권자 © 더스쿠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