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정관념 깬 제품 성적표

종합식품업체로 거듭난 하림이 개당 2000원을 훌쩍 넘는 프리미엄 라면을 출시했다. 시장에 ‘라면은 저렴한 음식’이라는 인식이 견고함을 알면서도 하림은 정면돌파에 나섰다. 사실 하림처럼 시장의 고정관념을 깨기 위해 도전한 업체는 숱하다. 빠르게 돌아가는 유통업계에서 소비자들은 언제나 새로운 것을 원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정관념을 깨고 판을 흔드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하림은 프리미엄 라면으로 라면 시장에 도전장을 던졌다. 사진은 김홍국 하림 회장. [사진=하림 제공] 
하림은 프리미엄 라면으로 라면 시장에 도전장을 던졌다. 사진은 김홍국 하림 회장. [사진=하림 제공] 

‘감히, 라면 주제에’ ‘인스턴트에서 빼달라는 욕심’…. 과감한 문구 뒤로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의 주인공 이정재가 젓가락을 들고 씩 웃는다. 또 다른 영상에서 그는 라면을 그릇째로 들이켠다. 닭고기 전문업체에서 종합식품기업으로 변신한 하림의 라면 신제품 광고다. 하림은 지난 10월 가정간편식 브랜드 ‘The 미식’의 첫번째 제품 ‘장인라면’으로 프리미엄 라면 시장에 출사표를 던졌다. 

인스턴트 라면이라는 정체성을 거부하는 광고엔 제품을 향한 하림의 자부심이 담겼다. 하림 측은 “장인라면은 사골·소고기·닭고기 등을 20시간 이상 고아낸 육수로 만든 액상수프와 육수로 반죽한 건면으로 요리에 가깝다”고 설명한다.

이런 자찬自讚도 부족했는지 김홍국 하림 회장이 제품 출시 간담회에 깜짝 등장해 라면을 끓이기도 했다. 김 회장은 이날 “막내딸이 인스턴트 라면을 먹고 아토피 증상을 겪는 것을 보고 인공 조미료를 쓰지 않는 라면을 만들었다”며 건강함을 강조했다. 

야심차게 등장한 하림의 프리미엄 라면은 일단 시장의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덴 성공했다. 다만, 그 이유는 하림이 앞세운 맛 덕분이 아니라 가격 때문이었다. 하림은 장인라면 가격을 봉지라면 2200원, 컵라면 2800원으로 책정했다. 오뚜기 진라면(봉지당 770원) 등의 정가와 비교하면 3배 가까이 비싸다. 번들 하나 기준인 4개를 산다면 8800원을 지불하는 셈이다. 소비자 사이에선 장인라면을 두고 “비싼 만큼 맛있다”거나 “라면을 이 돈 주고 먹나” 등 의견이 분분하다. 

국내 라면 시장에서 ‘초고가’ ‘프리미엄’ 제품은 성공하기 어렵다. 라면 업체들이 가격을 올릴 때마다 소비자가 거세게 반발해서다. 업계 관계자들은 “라면은 서민 음식이라는 인식이 강해 가격의 심리적 저항선을 높이기 어렵다”고 입을 모은다.

 

그래서인지 라면 시장에서 프리미엄 콘셉트로 성공한 제품은 손에 꼽힐 만큼 적다. 퇴출되지 않고 시장에 자리 잡은 건 농심의 ‘신라면 블랙’ ‘짜왕(이상 약 1600원)’ 정도다. 올 초 오뚜기가 레토르트 파우치에 원물 건더기를 담은 ‘라면비책’으로 프리미엄 라면 시장 개척에 나섰지만, 별다른 반향을 일으키진 못했다. ‘라면은 저렴해야 한다’는 인식을 깨는 게 그만큼 어렵다는 얘기다. 

그런데도 하림은 장인라면의 2022년 매출 목표를 무려 700억원으로 세웠다. 이는 팔도 비빔면(736억5300만원), 삼양라면(736억1000만원) 등 스테디셀러의 연매출(이상 2019년 소매점 POS 매출 기준·aTFIS)과 비슷한 수준이다. 하림 측은 “육수 추출 설비에 5000억원을 투입했다”며 “굉장한 도전이지만 원료 수급부터 경쟁사보다 유리하다”고 자신감을 내비쳤다. 

이를 두고 혹자는 “하림이 무모한 도전을 했다”고 말할 테고, 또다른 혹자는 “하림의 유별난 선택”이라며 깎아내릴지 모른다. 하지만 사실 하림이 유별난 건 아니다. 식품업계에서 시장의 고정관념을 깨고 도전에 나선 업체들은 숱하다.

새로운 것을 향한 소비자의 니즈는 언제나 존재해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정관념을 무너뜨린 도전이 언제나 ‘긍정적인 결과’로 이어진 건 아니다. 짠맛 일색인 감자칩 시장에 단맛이라는 영역을 개척한 해태 ‘허니버터칩’처럼 성공한 제품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제품도 있다. 사례별로 하나씩 살펴보자. 

■성공 사례❶ 카누와 영역의 법칙 = 동서식품(이하 동서)의 인스턴트 원두커피 ‘카누’는 올해로 탄생 10주년을 맞은 제품이자 동서의 효자 제품이다. 2000년대 이후 우후죽순 늘어난 커피전문점은 ‘식후 커피 한잔’을 믹스커피에서 아메리카노로 바꿨다.

‘맥심’으로 믹스커피 시장서 독주 체제를 누린 동서에 원두커피의 유행은 생존을 위협할 만한 변수였다. 동서는 오랜 연구 끝에 2011년 10월 아메리카노를 모티브로 한 스틱형 원두커피 카누를 출시했다. 카누의 콘셉트는 ‘홈카페’, 광고 슬로건은 ‘세상에서 가장 작은 카페’ ‘내 손안의 작은 카페’였다. 

카누는 원두커피를 언제 어디서든 마실 수 있다는 간편함으로 출시 첫해부터 시장에 안착했고, ‘인스턴트 원두커피’ 영역도 개척하는 데 성공했다. 10년 사이 네스카페 수프리모·남양 루카스 등 경쟁업체 제품이 출시됐지만 아무도 카누의 아성을 넘진 못했다.[※참고: 인스턴트 원두커피 시장 점유율은 동서 91.9%, 남양유업 2.6%, 네슬레 2.4%, 기타 3.1%다(9월 기준, 닐슨).]

카누는 출시 첫해 3800만잔, 이듬해엔 무려 2억잔이나 팔렸다. 2016년엔 판매량 10억잔을 돌파했고, 코로나19로 인해 홈카페 시장이 커진 2020년엔 14억7400만잔의 카누가 판매됐다. 퍼스트펭귄(선구자·도전자)이 메가브랜드이자 스테디셀러로 안착한 셈이다. 

카누의 성공 뒤엔 커피전문점 증가라는 외적 위험뿐만 아니라 자신과의 경쟁이라는 내적 위험도 있었다. 마케팅 전문가인 맹명관 중소기업혁신전략연구원 전임교수는 “동서는 ‘영역의 법칙’이라는 전략으로 성공한 업체”라고 짚었다. 그의 설명을 들어보자.

“영역의 법칙이란 입증된 시장에서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는 마케팅 전략이다. 동서는 인스턴트 커피시장서 최초로 믹스커피를 내고 시장을 장악한 업체였다. 그럼에도 동서는 새로운 영역(원두커피)을 만들어 자사 제품 ‘맥심’과 경쟁했다. 동서의 시도는 성공했고, 믹스커피가 줄어든 자리를 카누가 메우고 있다.” 

다양한 마케팅으로 SPC삼립 호빵의 매출이 늘고 있다. [사진=SPC삼립 제공]
다양한 마케팅으로 SPC삼립 호빵의 매출이 늘고 있다. [사진=SPC삼립 제공]

■성공 사례❷ 하얀 호빵의 변신 = ‘호빵’이라는 말을 들으면 단팥이 가득 든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하얀 빵이 떠오를 것이다. 하지만 요즘 호빵은 그 속이 어떻게 바뀔지 알 수 없는 독특한 아이템으로 떠올랐다. 호빵의 형태를 본뜬 각종 굿즈도 ‘호빵은 빵이다’는 고정관념을 무너뜨리고 있다. 

호빵 시초인 삼립호빵(SPC삼립)은 지난 4~5년 사이 다채로운 변신을 거듭했다. SPC삼립은 젊은 소비층을 잡기 위해 한정판 굿즈와 시즌별 제품을 내놓기 시작했다. 가습기·찜기·쿠션 등은 출시할 때마다 화제를 일으켰다. 올해는 한정판 굿즈로 커피 컴퍼니 ‘프츠’와 협업한 ‘호찌머그’를 출시했다. 호찌머그는 귀여운 디자인에 ‘찜기 겸용 머그컵’이라는 실용성으로 호평을 받고 있다. 

SPC삼립은 올해 호빵 모델로 국민 MC 유재석을 세워 국민간식 이미지를 강조했다. 신제품으론 SNS에서 핫한 맛인 ‘민트초코호빵’ ‘로제호빵’, 해표와 콜라보한 ‘들기름 매콤호빵’ ‘참기름 부추왕호빵’, 농심과 콜라보한 ‘배홍동 호빵’ 등 23종을 출시했다. 

삼립호빵의 변신은 성과를 내고 있다. 지난 10월 매출은 전년 동기 대비 20% 늘어나 역대 최고치를 경신했다. 특히 MZ세대를 타깃으로 론칭한 이색 신제품 ‘로제호빵’ ‘민트초코호빵’ 등은 출시 10일 만에 40만개가 팔렸다.

SPC삼립에 따르면 2020년 삼립호빵 누적 판매량은 무려 62억개에 달한다. SPC삼립 관계자는 “삼립호빵은 차별화된 경험을 제공하는 마케팅으로 중장년층부터 MZ세대까지 폭넓게 팬 층을 확장했다”며 “호빵 성수기가 12월인 점을 감안하면 시즌 전체 호빵 매출이 역대 최대치를 경신할 것으로 예상한다”고 말했다. 

■실패 사례❶ 국산 콜라의 몰락 = 하지만 카누와 호빵처럼 ‘고정관념’을 흔드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반짝 인기를 끌었던 톡톡 튀는 제품이 쥐도 새도 모르게 자취를 감추는 건 시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다. 그만큼 성공보단 실패 제품이 많다는 건데, 대표적 사례는 ‘콜라독립 815(이하 815콜라)’다. 

 

코카콜라와 펩시라는 글로벌 브랜드가 견고한 양대산맥 구도를 유지해온 콜라 시장에서 과감하게 독립을 외친 업체가 있었다. 1998년 범양식품은 콜라는 외국산이라는 통념을 깨고자 했다. 코카콜라의 국내 보틀링 파트너(현지업체)였던 범양식품은 코카콜라와의 계약이 파기되자 자체적으로 ‘815콜라’를 만들어 시장에 뛰어들었다. 

시작은 창대했다. 론칭 시점이 외환위기(IMF)가 터진 직후여서인지 애국심 마케팅이 통했고, 가격 경쟁력도 있었다. 이를 발판으로 815콜라는 시장점유율을 한때 14% 수준까지 끌어올렸지만 거기까지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코카콜라의 물량공세 등 반격이 시작됐고, 들쑥날쑥한 맛에 815콜라를 외면하는 소비자가 늘었다. 그러다 론칭 6년여 만인 2004년 범양식품은 815콜라 생산을 중단했다. 2014년엔 편의점 음료제조업체 프로엠, 2016년엔 웅진식품에서 이를 재출시했지만 별다른 호응을 이끌어내지 못했다. 

맹명관 교수는 “익숙한 맛의 힘은 강력하다”며 “맛뿐만 아니라 (범양식품은) 유통망의 한계로 외국 브랜드에 대적하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소비자는 좋아하든 싫어하든 어쩔 수 없이 자주 접하는 제품을 사게 된다”며 “물량공세를 할 수 없는 815콜라는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고 분석했다.

■실패 사례❷ 바나나가 하얗긴 한데… = 고정관념을 깨겠다면서 나섰지만 반짝 이슈에 그친 곳은 또 있다. 매일유업은 2007년 ‘바나나는 원래 하얗다’로 노랑 일색의 바나나 우유 시장에 하얀 우유라는 승부수를 던졌다.

매일유업은 “바나나의 과육은 노란색이 아닌 흰색”이라는 역발상 마케팅과 시장 진출의 어려움을 인정하는 솔직한 광고로 출시 직후 초반 화제몰이에 성공했다. 그럼에도 끝내 빙그레가 장악한 시장의 판도를 엎진 못했다. 소비자들은 하얀 바나나 우유를 흥미로워했지만 이내 노란 단지우유를 찾았다. 2020년 기준 바나나 우유 시장서 빙그레 바나나맛우유의 비중은 86.3%에 달한다(aTFIS·소매점 POS 매출 기준).  

매일유업은 소용량·저지방·무색소의 건강한 가공유 콘셉트로 ‘바나나는 원래 하얗다’를 판매하고 있다. 제품은 출시된 지 14년이 흘렀지만 사라지지 않고 여전히 매대 한편을 차지하고 있다. 유업계 관계자는 “어디든 빙그레 바나나맛우유의 아성을 넘긴 어려울 것”이라며 “매일유업은 바나나는 원래 하얗다의 초반 인기를 오래 끌고 가지 못했다”고 말했다. 

 

고정관념을 깨러 나선 업체는 많지만 성공한 곳은 많지 않다. [사진=더스쿠프 포토] 
고정관념을 깨러 나선 업체는 많지만 성공한 곳은 많지 않다. [사진=더스쿠프 포토] 

그렇다면 시장서 고정관념을 깨고 나서는 데 성공하려면 어떤 요인이 필요할까. 맹명관 교수는 “제품이 성공하거나 실패하는 데엔 시장환경, 출시 타이밍, 트렌드, 콘셉트 등 숱한 요인이 동시에 작용하기 때문에 하나의 요소로만 성패를 정할 순 없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맹 교수는 과감한 도전을 하려는 기업에 이렇게 조언했다. “소비자가 갈수록 얻는 정보가 많고 똑똑해지기 때문에 진정성을 내세우는 게 중요하다. 또한 소비자의 구매 여정(소비자가 브랜드를 인지할 때부터 구매하기까지의 과정)을 줄이기 위해선 감성을 공략해야 한다.”

유통 전문가 김영호 김앤커머스 대표는 “소비자는 늘 새로운 것을 찾기 때문에 통념을 깨는 데 도전할 가치는 있다”며 “중견기업일수록 새로운 시도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 대표는 “설령 시장 개척에 실패해도 시도 자체가 브랜드 이미지를 바꾸는 계기가 될 수 있다”며 “고정관념을 깨는 이들은 1%에 불과하지만, 일단 성공하면 엄청난 효과를 얻는다”고 답했다. 과연 시장에서 상식을 엎고 기존 판도를 뒤흔들 다음 주자는 누구일까. 

심지영 더스쿠프 기자
jeeyeong.shim@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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