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깎이는 교통약자 이동편의 사업 예산
사업은 시내 저상버스 도입에만 집중
교통약자 위한 환경 개선에 기여 못 해

‘이동권 보장’.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소속 장애인들이 출근시간대에 지하철을 멈춰 세우면서 주장한 내용이다. 방법론을 두고 찬반양론이 뜨겁지만, 장애인들은 지난 20여년간 이 주장을 되풀이해왔다. 이동권 보장이 장애인들만의 문제인 것도 아니다. 고령층, 임신부, 어린이 등 교통약자를 위해 반드시 지켜져야 할 권리이기도 하다. 정부 사업에 어떤 빈틈이 있길래 이 주장이 지금까지 받아들여지지 않은 걸까. 

국토교통부의 ‘교통약자 이동편의 증진’ 사업은 시내 저상버스 도입 보조에 집중돼 있다.[사진=뉴시스]
국토교통부의 ‘교통약자 이동편의 증진’ 사업은 시내 저상버스 도입 보조에 집중돼 있다.[사진=뉴시스]

장애인 이동권 문제에 정치권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일부 국회의원은 휠체어 체험에 나선 후 “장애인 이동권 개선에 힘을 쏟겠다”고 약속하기도 했다. 지난해 말부터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소속 장애인들이 이동권 보장을 요구하면서 수도권 지하철에서 출근 시간에 시위를 벌인 이후에 일어난 일이다. 바람직한 피드백이지만, 장애인들의 이동권 개선 요구가 20년 넘게 지속돼왔다는 점을 감안하면 아쉬운 면이 없지 않다. 

사실 이동권 보장은 단순히 이동의 편의성을 확보하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이동권을 보장받지 못하면 다른 기본권이 침해받을 가능성이 높다. 예컨대 이동이 어려우면 교육이나 의료서비스를 받는 데도 제약이 따른다. 이동권 제약이 장애인만의 문제가 아니란 거다. 임신부나 유모차, 걸음이 불편한 어르신 등 모든 교통약자의 문제다.

결국 장애인의 이동권 보장 요구에 정치권이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건 교통약자의 기본권을 외면했다는 의미나 다름없다. 정부(국토교통부)의 ‘교통약자 이동편의 증진’ 사업을 살펴보면 이런 현실이 여실히 드러난다. 

이 사업의 목적은 부쩍 늘어난 장애인ㆍ고령자ㆍ임신부 등 교통약자가 안전하고 편리하게 이동할 수 있도록 이동편의시설을 확충하고 보행환경을 개선하는 것이다. 1996년부터 시행된 ‘교통약자이동편의증진법(교통약자법)’에 근거를 두고 있고, 2007년부터 5년마다 ‘교통약자 이동편의 증진계획(올해부터 2026년까지 4차 계획 진행)’을 세워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교통약자 위한 6개 사업 = 기획재정부 열린재정에 공개된 ‘교통약자 이동편의 증진’ 사업을 예산별로 세분화해보면 크게 6개로 나뉜다. ▲저상버스 도입 보조 ▲특별교통수단 도입 보조 ▲교통약자 장거리 이동지원 ▲BF(Barrier Freeㆍ장애물 없는 생활환경) 인증 사업 ▲교통약자 이동편의 실태조사 ▲교통약자 이동편의 증진계획 등인데, 하나씩 살펴보자. 

장애인들의 ‘이동권 보장’ 주장은 장애인들만을 위한 게 아니다.[사진=뉴시스]
장애인들의 ‘이동권 보장’ 주장은 장애인들만을 위한 게 아니다.[사진=뉴시스]

저상버스 도입 보조 사업은 말 그대로 저상버스 도입을 지원하는 것이다. 지자체에 보조금을 지급하는 방식으로 이뤄진다. 정부는 서울의 경우 저상버스 도입 비용의 40%를 지원한다. 나머지 지자체들에는 50%를 지원한다. 특별교통수단 도입 보조 사업은 버스ㆍ지하철을 비롯한 대중교통을 이용하기 어려운 중증장애인 등의 이동권 보장을 위한 것으로, 휠체어 탑승설비를 장착한 차량의 도입을 지원하는 사업이다. 

교통약자 장거리 이동지원 사업은 휠체어를 이용하는 장애인의 광역 간 이동권 보장을 위해 휠체어 탑승설비ㆍ고정장치 등 이동편의시설이 설치된 고속ㆍ시외버스 운행을 지원하는 사업이다. BF 인증 사업은 여객자동차 터미널에 장애물 없는 생활환경 인증 기법을 적용해 이동편의시설을 개선하는 사업이다.

교통약자 이동편의 실태조사 사업은 교통약자 이동편의시설 개선의 기초자료가 되는 제반 인프라(교통수단ㆍ여객시설ㆍ도로 등) 현황을 조사하는 사업이다. 교통약자 이동편의 증진계획은 앞서 말한 5개년 계획을 수립하는 작업이다. 

■예산 편성 현황 살펴보니… = 그렇다면 이 6개 사업에 예산은 어떻게 편성돼 있을까. 우선 교통약자 이동편의 증진 사업의 예산은 2014년(박근혜 정부) 435억원에서 2017년 362억원으로 꾸준히 줄었다.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이후인 2018년부터 다시 늘기 시작해 지난해 727억원까지 증가했다. 올해는 1091억원의 예산을 편성했다.[※참고: 당초 국토부는 1531억원을 요구했지만 기재부가 440억원을 삭감했다.]

교통약자의 이동권 보장을 위한 예산이 늘었다는 건 일면 긍정적이다. 하지만 사업별 예산 편성 비중을 보면 문제점이 나타난다. 전체 사업 예산의 대부분이 ‘저상버스 도입 보조’에 집중돼 있기 때문이다. 2018년부터 올해까지 전체 ‘교통약자 이동편의 증진’ 사업 예산 대비 저상버스 도입 보조 예산의 비중은 평균 89.7%에 달했다.

올해 예산 기준으론 90.4%다. 특별교통수단 도입 보조 사업은 8.6%, 교통약자 장거리 이동지원 사업은 0.4%, BF 인증 사업은 0.4%, 교통약자 이동편의 실태조사 사업은 0.2%에 불과하다.[※참고: 교통약자 이동편의 증진계획 예산은 비정기적으로 편성된다.] 

■교통약자 사업의 내밀한 문제 = 이 문제를 좀 더 깊숙이 들여다보면 또 다른 이슈가 등장한다. 2021년 개정된 교통약자법엔 버스 대ㆍ폐차 시 저상버스 도입을 의무화하는 조항이 신설됐는데, 대상과 단서조항이 문제란 지적을 받았다. 무엇보다 이 조항의 대상을 시내버스, 마을버스에 국한했다. 시외ㆍ고속버스는 제외했다는 거다. 도로의 구조ㆍ시설 등이 저상버스 운행에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되면 저상버스를 도입하지 않아도 되는 단서조항도 달렸다.

종합하면, ‘교통약자 이동편의 증진’ 사업 예산 중 90%가량이 저상버스 도입 보조에 쓰였는데, 그마저도 제한적이었다는 거다. 다른 사업의 예산 편성ㆍ집행 사례를 보면, 이 문제가 더 두드러진다.

특별교통수단 도입 보조 사업 예산은 매년 증감을 반복하고 있다. 교통약자 장거리 이동지원 사업 예산은 2019년 이후 매년 예산이 감소하고 있다. BF 인증 사업은 2015년 신설된 이후 인증제도만 8년째 진행 중이며, 실질적인 교통약자 이동권 제고를 위한 정책(시외ㆍ고속버스 저상버스 도입 등)은 진행되지 않고 있다.

이런 상황을 종합하면 정부의 ‘교통약자 이동편의 증진’ 사업이 교통약자를 위한 환경 개선에 얼마나 기여하고 있는지 의문이다. 예컨대 고속버스나 시외버스는 내버려둔 채 시내버스나 마을버스에만 저상버스를 도입하는 게 과연 효과적일까. 인증제도 운영과 연구에만 돈을 쓰는 BF 인증 사업이 교통약자에게 도움이 될까. 

우리나라의 교통약자는 전체 인구의 25.6%에 이른다. 정부가 교통약자 지원 예산을 더욱 늘리고, 지원사업이 실질적인 효과를 낼 수 있도록 사업을 손봐야 할 당위성은 충분하다. 교통약자의 이동권은 휠체어 체험 이벤트 등 보여주기식 이슈몰이에 머물러선 안 될 문제란 얘기다. 

글 = 이상민 나라살림연구소 수석연구위원
rsmtax@gmail.com

김정덕 더스쿠프 기자
juckys@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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