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철 안전 사각지대➌
철도운영사 자율에 맡긴 혼잡도
법규 마련해서 안전관리 나서야  

# 밀집한 지하철 안에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였던 경험, 다들 한번쯤은 있으실 겁니다. 러시아워 지하철은 어찌나 복잡한지, 승강장 곳곳엔 이런 표어가 붙어있기도 하죠. ‘이곳은 혼잡구간이니 옆칸으로 이동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 객차 내 인원 과밀 문제는 우리나라 지하철의 고질병으로 꼽힙니다. 하지만 국내 최초의 지하철(1974년 8월 15일ㆍ1호선 서울역~청량리)이 개통한 이후 48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우리나라엔 승객 과밀과 이로 인한 안전사고를 방지할 만한 법규가 마련돼 있지 않습니다. 어찌 된 영문일까요? 팩트체크 지옥철 안전 사각지대, 마지막 편입니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지하철 인원 과밀로 인한 안전사고를 방지할 법규가 없다.[사진=뉴시스]
현재 우리나라에는 지하철 인원 과밀로 인한 안전사고를 방지할 법규가 없다.[사진=뉴시스]

승객이 많을 것으로 예상했습니다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습니다. 출근길 지하철을 타는 사람들의 숫자 말입니다.

서울시 통계에 따르면, 올 10월 출근시간(오전 6~9시)에 지하철을 타고 내린 승객은 4744만명에 이릅니다. 퇴근시간(오후 5~8시) 지하철 승·하차객(8387만명)까지 더하면 10월 한달 간 1억3131만명의 승객이 러시아워 지하철 안에서 출퇴근 전쟁을 벌인 셈입니다. 우리나라 지하철의 인원 과밀 문제를 꼬집는 ‘지옥철’이란 말이 괜한 오명은 아니었던 겁니다.  

문제는 지하철을 이용하는 시민들이 객차 내 혼잡으로 인한 각종 안전사고에 노출돼 있다는 점입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우리나라에는 지하철 승차정원이나 인원 과밀을 관리하고, 위험에 대비할 만한 안전 법규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물론 지하철을 운행하는 철도운영사들이 수수방관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지난 팩트체크 두번째 편(통권 522호ㆍ승객 넘치는 지옥철의 합법적 과밀)에서 살펴봤듯, 각 철도운영사는 주기적으로 노선ㆍ시간별 객차 내 혼잡도를 측정한 뒤 이를 토대로 지하철 운행 계획을 세웁니다. 이를테면 혼잡도가 높은 시간에는 배차 간격을 줄이거나 열차의 운행 횟수를 조금 더 늘리는 방식으로 탑승객을 분산하는 거죠. 

하지만 한계가 있습니다. 언급했듯 국내에는 지하철 승차정원을 관리ㆍ점검하는 정식 법규가 없습니다. 철도운영사들이 적용하는 지하철 혼잡도 관리는 법정 의무사항이 아닙니다.

철도교통시설 전반을 관장하는 국토교통부에서 혼잡도를 측정하는 표준 공식을 제시하곤 있지만 그뿐입니다. 국토부에서조차 혼잡도 수치에 따른 안전조치 사항을 따로 정해두고 있지 않습니다. 

철도운영사들이 ‘이 정도면 시민들의 안전을 위협할 만큼 객차 안이 붐빈다’고 판단하는 기준치(혼잡도 150% 초과)가 있기는 합니다. 하지만 이 역시 법적 효력이 없는 관례적인 숫자이기 때문에, 이 기준을 초과한다고 해서 철도운영사들이 처벌을 받는 건 아닙니다.[※참고: 최대 혼잡도 기준치가 150%인 이유는 팩트체크 두번째 편에서 자세히 다뤘습니다.] 

이 지점에서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행정당국이 지하철 혼잡도를 엄격하게 점검해도 부족한 상황에서 이를 사실상 방치해둔 이유가 뭐냐는 겁니다. 

2000년대 초반부터 서울시 지하철의 혼잡도 연구에 참여했던 오석문 한국철도기술연구원(교통물류체계연구실) 박사는 “과거 한국의 지하철을 묘사한 표현 중에 ‘콩나물시루’란 말이 있었다”면서 말을 이었습니다. 

“지하철 혼잡도가 너무 높다보니 서울시 등 행정기관들도 객차 내 적정혼잡도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문제는 적정혼잡도가 지자체의 차량 구입 대수와 연관된다는 점이었다. 가령, 지하철을 많이 사면 탑승 가능한 승객의 수가 늘어나니까 시민들의 불편은 줄어든다. 반면 행정당국이 투입해야 하는 예산은 늘어난다. 행정기관 입장에선 시민들의 안전을 담보하면서도 비용은 적게 들일 수 있는 차량 구입 대수를 정해야 했다.”

그는 주장을 계속했습니다. “이를 위해 먼저 해외의 혼잡도 산정 방식을 조사했다. 다음으론 한국인의 표준 어깨 넓이부터 객차의 연면적, 3.3㎡(약 1평)당 들어가는 사람의 수 등 다양한 요소를 고려해 국내 실정에 맞게 객차의 정원과 적정혼잡도를 산정했다. 하지만 그 결괏값을 법으로 정해두지는 않았다. 숫자를 정량적으로 제한하면 여러가지 기술 및 행정의 발전을 제약하는 측면이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지금의 혼잡도는 사실상 원론적인 공식만 남아 있는 셈이다.”

[※참고: 국내에서 통용하는 혼잡도의 개념은 일본의 ‘혼잡률’ 관행을 따랐다는 것이 철도교통전문가들의 중론입니다. 실제로 일본 국토교통성 철도국에선 100~250%까지 다섯가지 기준으로 혼잡률 밴드(범위)를 나눠 각 수치에 따른 객차 내 환경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따르면 혼잡률 150%는 ‘신문을 편하게 펼쳐서 읽을 수 있는 정도’의 상태입니다(2021년 3월 ‘철도의 혼잡 완화에 도움이 되는 정보 제공에 관한 가이드라인’). 우리나라 서울교통공사에선 혼잡도 150%를 이동 시 부딪힘이 있는 ‘주의 상태’로 정의하고 있습니다.] 

혼잡도 관리는 철도운영사 몫 

사정이 이렇다보니 지하철 혼잡도를 조사하고 관리하는 것은 철도운영사들의 자율적인 경영 사항에 해당합니다. 운영기관별로 자체적으로 마련한 ‘안전관리체계 매뉴얼’에 따라 객차 내 혼잡도를 낮추고 있는 셈이죠. 

코레일 관계자는 “혼잡도를 낮추기가 쉽지 않다”고 토로했습니다. 이 관계자에 따르면 객차의 혼잡도를 낮추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열차의 대수를 늘리는 겁니다. 배차 간격을 줄이고 운행 횟수를 늘리는 것만으론 혼잡도를 줄이는 데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지난 10월 한달간 1억명이 넘는 승객들이 지하철에서 출퇴근 전쟁을 벌였다.[사진=연합뉴스] 
지난 10월 한달간 1억명이 넘는 승객들이 지하철에서 출퇴근 전쟁을 벌였다.[사진=연합뉴스] 

하지만 열차를 증편하는 것은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다른 노선의 열차를 끌어와야 할 수도 있고, 그것으로 모자라면 새로운 열차를 구입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지하철을 개통한 이후 운행 환경은 얼마든지 변할 수 있다. 역 주변에 아파트나 학교라도 들어서면 지하철 혼잡도에도 변화가 생길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 열차를 새로 사야 하는 경우라면 예산을 집행하는 기획재정부에 협조를 구해야 하는 등 절차가 복잡하다. 지하철 혼잡도를 낮춘다는 게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다(코레일 관계자).”

오영택 한국철도공사(코레일) 철도안전연구원 박사 역시 “지하철 확대 공급만으로 혼잡도를 낮추기엔 한계가 있다”면서 “출근·통학이 겹치는 필수통행시간(반드시 이동해야 하는 시간)에 차이를 두는 등 수요 부문에서의 조정이 필요하다”고 지적했습니다. 

싱가포르 ‘얼리 버드’ 프로그램

그럼 지하철의 혼잡도를 낮출 방안은 없는 걸까요? 놀랍게도 지하철 수요를 조절해 객차 내 혼잡을 해소한 사례가 존재합니다. 싱가포르의 지하철 MRT(Mass Rapid Tra nsit)가 대표적입니다. 

2013년 싱가포르 국토교통청(LTAㆍLand Transport Authority)은 지하철 인원 과밀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얼리 버드(early bird)’ 프로그램을 도입했습니다. 러시아워보다 이른 오전 7시 45분 이전에 시내 중심 지역에 있는 16개 지하철역의 출구를 통과하는 승객은 무료로 열차를 이용할 수 있도록 한 겁니다. 아울러 오전 7시 45분~8시 사이에 출구를 통과한 승객은 지하철 이용요금을 50% 할인해줬죠. 

효과는 놀라웠습니다. 얼리 버드를 시행한 지 1년 만에 피크시간대로 꼽혔던 오전 8~9시 사이 MRT 객차 내 혼잡률이 무려 7% 낮아졌습니다. 열차 요금을 할인받기 위해 평소보다 일찍 집을 나서는 시민들이 늘어난 덕이었습니다.

이런 ‘당근 정책’의 성공은 싱가포르 국회 예산위원회의 타협과 이를 통한 재정적 지원, 출퇴근 시간을 기꺼이 조정한 기업의 협조, 시민들의 적극적인 참여란 삼박자가 맞아떨어졌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잇따른 철도안전 사고 이후 교통당국에서도 지하철 혼잡 완화에 나섰다.[사진=더스쿠프 포토]
잇따른 철도안전 사고 이후 교통당국에서도 지하철 혼잡 완화에 나섰다.[사진=더스쿠프 포토]

지난해 우리나라 지하철의 객차 내 혼잡도는 최대 241%(김포골드라인ㆍ고촌~김포공항 노선)까지 치솟았습니다. 시민들이 매일 안전을 위협받고 있는 상황에서 싱가포르의 사례는 우리나라 교통당국이 한번쯤 검토해볼 만한 대안이 될 수 있습니다.  

다행히 국토부에서도 “각 철도운영사에서 마련한 안전체계와 구체적 이행 방안을 내부적으로 검토 중”이라면서 지하철의 승객 과밀 문제를 해결해 나가겠다는 의지를 밝혔습니다. 원희룡 국토부 장관이 ‘철도 안전’을 위해 직접 칼을 빼들고 나선 지금, 실효성 있는 법규와 대책이 과연 만들어질 수 있을까요? 

윤정희 더스쿠프 기자
heartbring@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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