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찰ㆍ열정ㆍ소통의 리더 이순신⓯
듣고 싶은 것만 듣는 대통령
주변엔 완장 찬 이들만 득실
집권여당, 거대야당도 마찬가지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전, 신립 등 서인 세력은 ‘수군 폐지론’을 주장했다. 섬나라인 왜국과 물에서 싸우는 대신 육지에서 결판을 내자는 게 골자였다. 이때 김여물이란 사람이 ‘왜국엔 육지가 없다는 말인가’라면서 비판했는데, 그는 이 말 때문에 감옥에 갇혔다. ‘입바른’ 소리를 하는 사람을 처벌한 조선엔 희망이 없었다. 지금 대한민국은 어떤가. 권력자들은 ‘입바른’ 소리를 허용하고 있는가. 

우리나라 권력자들은 쓴소리를 들으려 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사진=뉴시스]
우리나라 권력자들은 쓴소리를 들으려 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사진=뉴시스]

동래성을 정복한 왜국의 육군은 한양을 향해 세 갈래로 진격했다. 중로中路는 제1군 사령관 소서행장이 맡았고, 좌로左路는 제2군의 가등청정, 우로右路로는 흑전장정이 이끄는 제3군이 밀고 들어왔다. 

조선은 오랫동안 전쟁이란 걸 치러보지 않았다. 개국 이래 200여년 동안 전쟁이 없었기 때문에 평화로운 분위기에 취해 있었다. 그래서인지 섬나라 왜국의 침략이 임박한 상황인데도 국방 태세를 바로잡기보단 오히려 무사안일과 사대주의가 팽배했다. 연산군 폐위 이후 이어진 사화와 당쟁으로 인한 정치적 혼란 때문이었다. 당연히 준비와 노력이 부실했고, 이로 인해 조총을 쏘며 쳐들어오는 왜군 앞에 병수사와 방어사들은 물론 많은 군졸이 처참하게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다대포첨사 윤흥신은 아우 윤흥제와 더불어 적군과 잘 싸워 승리를 거두긴 했으나 바로 다음날 증원된 왜군 병력에 견디지 못하고 장렬하게 전사했다. 밀양부사 박진朴晋은 군사 2000명을 거느리고 동래를 구하러 가는 길에 왜군 제2군 가등청정을 막는 일을 책임진 좌병사 이각을 만났다. 두 인물은 황산黃山에서 적군을 함께 막기로 했다. 하지만 이각이 먼저 달아나 버리는 황당한 일이 벌어졌다.

중과부적衆寡不敵. 박진은 전투에서 살아남은 부하들을 이끌고 밀양으로 퇴각했다. 군기와 군량이 든 수레 등은 왜군이 사용하지 못하도록 모두 태우고 산중으로 달아났다. 

박진은 활솜씨가 뛰어난 당시의 내로라하는 무인이었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좌병사 이각의 행동은 정말 심각했다. 박진을 배신하고 동래성에서 빠져나온 그는 울산병영으로 돌아와 인마를 빼내 그 애첩과 군포 1000필을 한양 자택으로 보냈다. 말리려는 부하 진무의 목을 베어 버리는 만행도 저질렀다. 

이때 울산병영 성내에는 13읍의 군사 5만명이 모여 있었다. 안동판관 안성은 이각의 수상한 행동을 목도한 직후 “영감, 못 가오!”라며 앞을 막았다. 그러자 이각은 “나는 성 밖 서산西山의 험준한 곳에 있다가 적이 오거든 안팎으로 협공할 것이오”라면서 안성을 속이고 도주했다.

이각은 당시 무예와 용맹으로 이름깨나 날리던 인물이었다. 울산병영에서는 스스로 대포를 제작하기도 했다. 그래서 이순신, 김시민, 이장손 등과 자웅을 겨룰 만하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전쟁 앞에선 당당하지 못했다.

비단 이각뿐만이 아니었다. 좌병사의 부관인 원응두는 밤에 도망을 쳤다. 뒤를 이어 각읍 수령들과 군관 사졸도 앞다퉈 달아났다. 병영에 모였던 5만 대군이 적의 그림자를 보기도 전에 흩어진 것이다. 

초계군수 이유검과 합세해 김해성을 지키던 김해부사 서예원도 성을 버리고 도주했다. 그러자 이유검마저 서예원의 뒤를 이어 달아났다. 김해 수성장 송빈, 군관 김득기 등 4인이 고군분투했지만 장렬히 전사하자 성은 결국 함락됐다. 
경상우병사 조대곤은 일본군이 무서워 진주성을 버리고 달아났다. 진주에 있던 경상감사 김수 역시 부산, 동래, 양산이 연이어 함락되고 정발, 송상현, 조영규 등 제장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영산靈山으로 달아났다. 

영산에서 합천陜川으로, 합천에서 지례知禮로 달아나던 그는 초계군수 이유검을 만났을 때 ‘성을 버리고 도주했다’는 죄를 물어 처형하는 어이없는 일까지 벌였다. 경주부慶州府는 가등청정의 군사에게 포위됐다. 부윤 윤인함은 대구 순영에 가고 없었다. 판관 박의장과 장기현감 이수일 등이 싸우지도 않고 달아나고 말았다.

부산이 함락당했다는 보고가 한양에 올라온 건 4월 17일이었다. 좌수사 박홍이 달아나면서 보낸 장계였다. 이를 본 선조는 ‘조선통신사로 일본을 다녀왔던 김성일이 보고를 잘못한 때문’이라며 그를 감옥에 가뒀다. 부랴부랴 영의정 이산해, 좌의정 류성룡, 우의정 이양원 등을 불러놓고 대책회의를 열었다.

조정은 이일에게 순변사 직책을 맡겨 왜장 소서행장이 올라오는 중로와 상주에서 적을 막도록 했다. 또 성응길을 좌로를 통해 올라오는 왜군을 저지하는 좌방어사로 삼았다. 조경에게 우방어사를 맡겨 우로를 막게 하고, 조방장 유극량에겐 죽령竹嶺을 지키라고 지시했다. 조방장 변기는 조령鳥嶺을 지키도록 하고, 변응성을 경주부윤으로 임명했다.

선조는 또 병조판서 홍여순을 김응남으로 교체하고 심충겸沈忠謙을 병조참판으로 삼았다. 신임하던 류성룡은 도체찰사(왕명으로 할당된 지역에 파견돼 군정과 민정을 총괄하던 임시직)로 임명해 수륙군의 최고감독권을 부여했다.

류성룡은 병조판서 김응남을 부체찰사로, 전 의주목사 김여물을 수행원으로 삼았다. 김여물은 예전에 신립 등 서인들이 ‘수군 폐지론’을 주장했을 때 이렇게 비판했던 인물이다. “일본엔 육지가 없다는 말인가, 수상전만 잘하게? 공연히 강적을 육지로 끌어들여 싸운다는 것은 또 무슨 어리석은 소리냐?”

그러자 조정에서는 “조정의 방어전략을 비방한다”는 죄명을 덮어씌워 의주목사의 직을 파직하고 감옥에 가둬놓은 상태였다. 입바른 목소리를 한마디만 내도 감옥에 보낼 만큼 당시 조선의 정치는 썩어 있었다.

류성룡이 김여물을 감옥에서 꺼내 자신의 수행원으로 삼은 것은 서둘러 서울의 민심을 진정시킬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대의 용맹한 장수로 이름난 순변사 이일을 재촉해 전선으로 출발시킬 수 있는 인물은 김여물뿐이었다. 

거대야당 대표 역시 자신을 지지하는 진영의 목소리만 듣는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사진=뉴시스]
거대야당 대표 역시 자신을 지지하는 진영의 목소리만 듣는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사진=뉴시스]

이 지점에서 현실 이야기를 해보자. 박근혜 정부 시절엔 ‘문고리 3인방’이 권력을 휘둘렀다. 문재인 정부 땐 ‘친문’이 득세했다. 하지만 박근혜 집권 시절에도, 문재인 집권 시절에도 권력자에게 ‘입바른’ 소리를 하는 이들은 눈에 띄지 않았다. 그 때문인지 두 대통령은 ‘듣고 싶은 것만 듣는다’는 비판을 공히 받았다.

지금은 어떤가. 현 대통령과 지금의 거대야당 대표는 ‘입바른’ 소리를 맘놓고 하는 사람들을 옆에 두고 있을까. 그렇지 않은 듯하다. 현 대통령 주변엔 ‘핵관’이란 완장을 찬 이들이 깔려 있다. 거대야당 대표 옆엔 ‘친명’과 ‘개딸’이 호위무사를 자처하고 있다. 대통령도, 집권여당도, 거대야당도 이러니 나라가 제대로 돌아가겠는가.


다시 위기의 조선 이야기다. 왜군의 거침 없은 진군으로 당시 종남산(남산) 봉화대는 쉴 날이 없었다. 그만큼 한양의 민심도 거칠어졌다. 이일의 출전 소식에 그나마 안정되긴 했지만,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밀양에 이어 경주까지 함락됐다는 보고가 올라오자 다시 민심이 들끓었다. <다음호에 계속> 

이남석 더스쿠프 발행인
cvo@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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