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찰ㆍ열정ㆍ소통의 리더 이순신⓰
임진왜란 때 꽁무니 내뺀 고관대작
조선을 지킨 건 이름 없는 백성
“친일파 되겠다”는 지자체 장의 말
뒤늦게 사과했지만 여전히 논란

정부가 최근 발표한 일제 강제 동원 피해 배상안을 두고 논란이 일고 있다. 한쪽에선 굴욕외교라 칭하고, 다른 한쪽에선 적절한 해법이라 칭송한다. 어떤 ‘안案’이든 의견이 엇갈리는 건 당연하다. 하지만 그 의견을 표출하는 방법은 상식적이어야 한다. 배상안을 두둔하면서 “친일파가 되겠다”는 말을 내뱉은 한 지자체 장을 납득하기 어려운 이유다.

한 지자체 장의 ‘친일파 발언’이 공분의 도마에 올랐다.[사진=뉴시스]
한 지자체 장의 ‘친일파 발언’이 공분의 도마에 올랐다.[사진=뉴시스]

맹장 이일의 출전 소식에 들끓었던 서울 한성의 민심은 한풀 꺾이는 듯했지만, 그리 오래가지는 않았다. 밀양에 이어 경주까지 함락됐다는 소식이 알려졌기 때문이다. 수도권의 민정과 군정을 총괄해야 했던 도체찰사 류성룡의 마음이 다급해졌다. 그래서 당시 이일과 어깨를 견줄 만한 명장으로 꼽히는 판윤 신립을 불렀다. “대감은 무장이 아니십니까, 쓸 만한 장수를 가려 이일의 뒤를 돕게 하는 것이 좋겠소.” 

신립은 스스로 자신이 적임자라고 자부했다. 그러자 류성룡이 “적군을 파할 방략이 있소”라고 물었다. 신립은 “당대 명장 신립이 적군을 못 무찌르면 살아서 돌아오지는 아니하겠소”라며 호기를 부렸다.

류성룡은 내심 ‘내로라하는 인물들이 앞 다퉈 달아나기 바쁜 판국에 이만한 장수가 어디 있겠는가’라고 생각했다. 선조에게 그를 도순변사(군무를 총괄하기 파견한 국왕의 특사)로 추천했다.

선조는 도순변사로 임명된 신립에게 물었다. “경은 무슨 계책으로 적을 막으려 하오?” 신립은 대답했다. “적이 용병할 줄을 모르니까 염려 없습니다.”

선조가 다시 물었다. “무엇을 보고 적이 용병할 줄을 모른다 하시오?” 적군이 상륙한 뒤 육지로 들어오려 애쓰고 있습니다. 병법에 ‘군대가 길게 늘어져 적진 깊이 들어가면 패하지 않는 경우가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런 것도 모르는 적군이니, 두려울 것이 없는 줄로 아룁니다. 소신이 며칠 지나지 않아 적을 평정하겠습니다.” 신립이 너무나 자신 있게 대답했다. 

선조는 “왜군이 강해서 격파하기가 매우 어렵다고 하는데, 경은 어찌 그리 쉽게 여기는 것이오. 부디 삼가시오”라고 당부했다. 

한편 순변사 이일은 300명에 불과한 군사를 거느리고 조령에 도착했다. 그곳을 지키는 조방장 변기와 군사를 합친 이일은 1000여명의 군사를 이끌고 문경을 지나 상주로 향했다. 임진년 4월 23일, 이일이 상주에 도착하자 상주판관 권길權吉이 달려와 그를 영접했다. 

“상주목사는 어디 갔는가.” 이일은 역정을 내면서 권길에게 따져 물었다. 이일의 호통에 권길은 “목사 김해는 순변사 군사 300명을 거느리고 서문으로 나갔지만, 결국 도주하고 군사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버렸다는 소문만 들었습니다”고 대답했다. 이일이 노발대발하자 권길 역시 언성을 높여 말했다.

“소인이 죽기는 아깝지 아니하오만, 사또는 군사도 적은데 무엇으로 적군을 막으려 하오? 소인도 국은을 보답하지 못하고 죽으면 한이 되오니, 오늘밤만 살려두시면 밤 사이라도 사력을 다해 1000명 군사를 모집해 보겠나이다.”

권길은 육방 관속을 총출동시켜 상주 군내에서 밤새 900명의 장정을 모았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훈련이라고는 해본 적 없는 농민과 노동자들이 대부분이었다.

권길의 분투, 쓰러진 조선을 구하겠다며 자발적으로 군복을 입은 농민과 노동자….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들은 나라가 위기에 빠졌을 때 목숨을 내걸었다. 조선을 대표하는 고관대작, 장군들은 도망가기 바빴지만, 이들은 적 앞에 맞서는 걸 두려워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최근 한 지자체 장이 정부의 일제 강제 동원 피해 배상안을 두둔하면서 내뱉은 “친일파가 되겠다”는 말이 가슴에 꽂힌다.  그는 
정부의 강제동원 제3자 변제 방안을 “통 큰 결단”이라고 추켜세우면서 일본에 사과와 참회를 요구하는 행위를 ‘구걸’이라 깎아내렸다. 이 말을 듣고 분노한 이들을 대신해 묻고 싶다.

“왜국의 침략 앞에서 목숨을 내건 이름 모를 이들에게 미안하지도 않은가. 강제 동원 피해 배상안을 둘러싼 의견은 엇갈릴 순 있겠지만 ‘친일파가 되겠다’는 말은 너무나 미숙하지 않았는가.” 

해당 발언을 한 지자체 장은 얼마 전  “친일파라는 표현의 무게를 미처 충분히 생각하지  못했다”면서 “
오해의 소지를 만들어 논란을 만든 것은 자신의 불찰”이라고 사과했지만 여론의 공분은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다시 이순신 이야기를 해보자. 안타까운 일이지만, 농부·노동자가 적군을 막겠다며 모여들었을 때 이일은 상주 기생 셋을 불러 밤늦도록 즐기다 다음날 정오가 지난 뒤에야 연병장에 나타났다.

새로 모집한 군사를 검열하고 부하군관을 시켜 진퇴하는 법과 무예 몇가지를 가르친 그는 권길을 불러냈다. “처형으로 다스려야 마땅하지만, 군사를 모집한 너의 공로를 참작하여 곤장 80대로 감형하겠노라”며 권길에게 곤장을 맞도록 했다. 

상식으로 따지자면, 죄를 지은 사람은 성을 버리고 도주한 상주목사 김해다. 권길에게 죄를 따질 일이 아니었다. 상식에 어긋난 처분을 당한 권길의 부하 장졸들은 이일의 분탕질과 난폭함에 원망과 불만이 가득 찼다.

이일은 비록 용맹하나 매사에 공정하지 않은 인물이다. 함경북병사로 재직할 때 녹둔도 사건을 빌미 삼아 이순신을 모함해 죽이려다 실패한 전력도 있다. 그 버릇이 어디 가겠는가. 이번에도 어리석게 권길의 충의를 내팽개쳤다.

게다가 부하를 아끼고 동정하는 모습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마치 개·돼지 대하듯 하루 동안에 두 명이나 목을 베었다. 권길처럼 매를 맞은 군사는 수를 헤아릴 수가 없었다. 

어느 날, 피란 온 개령開寧 사람이 찾아와 왜군이 선산을 점령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이일은 “이놈, 죽일 놈! 왜군이 동래에 도착한 게 언제인데, 이렇게 빨리 선산에 왔단 말이냐. 헛소문으로 군심을 어지럽게 한 놈이니 목을 베어 효시하라!” 

개령 백성이 대꾸했다. “소인이 어떻게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만약 내일 안으로 왜군이 상주에 들어오지 않거든 그때에 죽여주시오.” 이일은 크게 비웃으며 왜군의 정보를 알려준 백성을 곤장형을 내리고 하옥시켜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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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일은 무능함의 극치를 보여줬다. 아무리 그릇된 판단을 했을지언정 만약을 대비, 최소한의 경계나 정찰활동을 지시했어야 옳은 일이다. 상황이 이러니 왜군이 턱밑까지 들이닥쳐도 알 턱이 없었다.

정부가 발표한 일제 강제 동원 피해 배상안을 두고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사진=뉴시스]
정부가 발표한 일제 강제 동원 피해 배상안을 두고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사진=뉴시스]

다음날인 4월 25일 아침, 왜군 정찰부대가 기습공격을 해왔다. 제대로 훈련도 받지 못한 조선의 병력은 군관 몇명이 조총에 맞아 전사하자 허둥지둥 흩어져 달아났다. 이일 역시 번개같이 달아났다. 부하 윤섬이 크게 부르짖었다. “이놈, 이일아! 국은이 망극하거늘, 어찌 싸우지도 아니하고 달아난단 말이냐. 남자가 절개를 지키고 의를 위해 죽어야 하거늘...” 윤섬은 말을 몰고 적진으로 뛰어들어 장렬하게 싸우다 전사했다.

왜군은 적의 대장을 사로잡아 공을 세우려는 듯, 이일을 바짝 추격했다. 그러자 이일은 신분을 감추기 위해 갑옷을 벗어 던지고 상투도 풀어 젖혔다. 산발한 채로 말도 버리고 밤낮으로 달렸다. 당시 조선의 장수 중 서열 두번째 자리에 있던 인물의 진면목이다. 마침내 신립의 진으로 도망쳐온 그는 “군사가 적어 패배했다”며 울면서 호소했다. <다음호에 계속> 

이남석 더스쿠프 발행인
cvo@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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