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conomovie 다우트❺
‘친중’이 기분 나쁘다고
‘반중’이 꼭 정답은 아냐
반대는 ‘반대’를 부르고
중용과 합 도출하지 못해

서로의 주장이 옳다고 맞서면 ‘합’을 이루기 힘들다.[사진=게티이미지뱅크]
서로의 주장이 옳다고 맞서면 ‘합’을 이루기 힘들다.[사진=게티이미지뱅크]

영화 ‘다우트’ 속에서 감독은 2개의 상반된 식사 장면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하나는 ‘진보적’인 플린 신부가 사제관에서 다른 신부들과 식사하는 장면이다. 또 하나는 ‘보수적’인 알로이시우스 수녀원장이 수녀원에서 수녀들과 식사하는 장면이다.

플린 신부는 피가 철철 흐르는 고깃덩어리를 가운데 두고 신부들과 술을 마셔가면서 ‘너절한’ 수다를 떨고 킬킬대면서 식사를 한다. 사제복을 입은 건달들의 회식장면 같다. 반면에 알로이시우스 수녀원장과 수녀들은 사관생도들처럼 경직된 자세로 완전한 침묵 속에서 엄숙하게 ‘깨작’거린다. 사형수들의 마지막 식사처럼 비장한 느낌마저 든다. 

꼭 해야 할 말이 있으면 식기 옆에 놓인 작은 벨을 흔들어 모두를 집중시키고 꼭 해야 할 말만 한다. 그 벨 또한 좌장인 알로이시우스 수녀에게만 있는 것이다. 나머지는 먼저 말을 꺼낼 자유조차 없다. 저러고 먹느니 차라리 굶고 밤에 몰래 컵라면 끓여 먹는 게 낫겠다 싶다.

근엄하고 엄격한 교장 선생님이기도 한 알로이시우스 수녀는 학생들을 죄수처럼 대하고, 자유분방한 플린 신부는 학생들을 친구처럼 대한다. 플린 신부는 ‘러닝셔츠’ 바람으로 엉덩이를 흔들어가며 학생들과 농구를 한다. 수녀들 앞에서 흡연을 삼갈 마음도 없다. 

알로이시우스 수녀는 설탕과 볼펜을 죄악 시 하는데, 플린 신부는 알로이시우스 수녀 앞에서도 볼펜만 사용하고 알로이시우스 수녀에게 차茶 대접을 받으면서도 설탕이 없다는 알로이시우스 수녀에게 굳이 각설탕 3개를 넣어달라고 한다. 저혈당 쇼크에 빠진 사람이 아닌 다음에야 굳이 저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싶은 ‘도발’이다. 상극과 같은 2개의 세계가 도저히 접점을 찾지 못하고 화합하지 못한다.

감독이 관객들에게 어떤 성직자의 모습이 바람직한 것이냐고 묻는 것이라면 참으로 난감한 질문이다. 플린 신부의 모습이 ‘인간적’이기는 한 것 같은데, 사제의 모습으로는 조금 부족하다. 알로이시우스 수녀의 모습이 성직자답기는 한 것 같은데 이 또한 지나치게 ‘비인간적’이다. 선택지가 마땅치 않아 난감하다.

아마도 관객들이 생각하는 성직자들의 바람직한 모습은 플린 신부와 알로이시우스 수녀가 타협한 중간 어디쯤일 듯하다. 스테이크 집에서 웨이터가 “어떻게 구워드릴까요?” 물으면 우리는 대개 미디엄(medium)을 주문한다. 양 극단極端을 배제한 중용中庸의 지혜다. ‘과유불급’이다. 과하거나 부족한 것 모두 ‘정답’이 아니다. 똑같이 틀린 것이다.

동양에 중용의 지혜가 있다면, 서양에는 ‘변증법’의 지혜가 있다. 헤겔(Hegel)이 만병통치약처럼 제시한 ‘변증법적’ 변화이론에 따르면 알로이시우스 수녀와 플린 신부의 상반된 ‘주장’이 부딪히면 자연스럽게 양쪽의 주장이 화해하고 조화를 이룬 바람직한 합合(synthesis)의 상태에 이른다.

하지만 현실은 늘 그렇지 못하다. 당대 최고의 지성인 괴테(Goethe)가 헤겔을 만나 변증법적인 변화와 발전이 왜 현실에서는 잘 이뤄지지 못하는지 물었다고 한다. 헤겔이 자기 이론의 함정을 이실직고한다.

“변증법적 변화(synthesis)는 자기의 생각(thesis)이 옳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나 그것이 틀렸다고 반대(anti-thesis)하는 사람들이나 모두 자신들의 주장에도 부족함과 모순이 있다는 것을 인정할 때만 발생하는 것이다.” 플린 신부나 알로이시우스 수녀처럼 서로 자신의 생각이 절대 옳다고 믿는다면 ‘합’은 불가능하다.

잘못을 반대하는 게 곧 정답이 될 순 없다.[사진=더스쿠프 포토]
잘못을 반대하는 게 곧 정답이 될 순 없다.[사진=더스쿠프 포토]

공자는 우리가 유가儒家의 최고의 경지라고 하는 ‘중용中庸’에 도달하기 어려운 이유를 신통하리만치 헤겔과 유사하게 설명한다. 「중용」을 집대성한 주자朱子는 그 서문에 이렇게 적는다. “공자가 말씀하기를, 공부를 많이 해서 지혜롭고 알 만한 자들은 교만해서 중용을 지나쳐 버리고, 무지하고 아둔한 자들은 몽매해서 중용에 이르지 못한다(賢者過之不肖子不及也).”

‘잘못된 것’을 반대하고 부정한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또 다른 반대와 부정을 부를 뿐이다. 슬로베니아 출신의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Slavoj Zizek)이 던지는 철학적 농담이 인상적이다. 고르바초프의 혼란스러웠던 옛 소련 시절, 한 유태인이 소련을 떠나려 한다. 이민국 관리가 묻는다.


이민국 관리: “왜 이민을 가려고 하느냐”
유태인: “소련 공산당이 약해져서 사회혼란이 발생하면 또 유태인을 희생시키려 할 것이다. 그래서 떠나려 한다.” 
이민국 관리: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앞으로 소련 공산당은 더욱 강해질 것이다.” 
유태인: “정말 그렇다면 나는 더더욱 떠나야만 한다.”
 


이 유태인은 사회혼란을 두려워하지만, 사회를 안정시킬 만큼 공산당이 강화되는 것도 두려워한다. 이처럼 ‘사회혼란’의 반대인 ‘사회안정’이 곧 정답은 아니다. 공산당 철권에 의한 사회안정은 바라지 않는다.

마치 공산주의를 반대한다고 반공주의가 정답이 될 수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반공주의가 정답이라면 공산주의만 반대하면 친일, 독재, 인권탄압, 부정부패는 상관없게 된다. 그것이 우리가 원하는 것은 분명 아니다.

언론과 표현의 자유를 위해 투쟁하다 1970년 소련에서 추방된 솔제니친은 그의 소원대로 표현과 언론의 자유가 보장됐다는 스위스에서 지낸다. 솔제니친은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나는 지금까지 인간의 ‘알 권리’를 위해 투쟁했지만 지금부터는 인간의 ‘모를 권리’를 위해 투쟁해야 할 것 같다”고 서구의 무분별한 언론자유에 개탄한다.

러시아의 대문호 솔제니친은 언론과 표현의 자유를 위해 투쟁하다 소련에서 추방됐다.[사진=뉴시스]
러시아의 대문호 솔제니친은 언론과 표현의 자유를 위해 투쟁하다 소련에서 추방됐다.[사진=뉴시스]

‘언론 통제’의 반대인 ‘언론자유’가 곧 언론문제의 정답이 될 수 없다는 거다. 무분별한 언론자유는 언론통제만큼이나 두려운 것이 될 수도 있다. 과유불급이다.

언젠가부터 대한민국은 ‘진보적’인 플린 신부와 ‘보수적’인 알로이시우스 수녀와 같은 극렬한 대립과 반대를 반복한다. 아마도 많은 국민은 ‘플린’도 아니고 ‘알로이시우스’도 아닌 그 중간쯤의 중용과 합을 원할 듯한데 그럴 조짐이 보이지 않는다. 

전前 정권의 모든 것을 부정하고 반대하는 것이 곧 정답이라고 주장하는 듯하다. ‘반일’에 문제가 있다고 해서 ‘친일’이 답이 될 수도 없고, ‘친중’이 기분 나쁘다고 ‘반중’이 정답은 아닐 듯하다. 52시간 근로제에 폐단이 있다고 69시간 노동이 답이 되고, ‘탈원전’이 무리라고 해서 ‘원전 최고’가 우리가 원하는 답이 될 것 같지는 않다.

이 모든 반대는 모두 또 다른 ‘반대’를 부를 뿐이다. 이 모든 문제에 중용과 합이 도출되지 못하는 것은 공자와 헤겔의 한탄처럼 언젠가부터 대한민국 국정담당자들이 교만하거나 무지해왔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김상회 정치학 박사|더스쿠프 
sahngwhekim5353@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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