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찰ㆍ열정ㆍ소통의 리더 이순신㉓
후쿠시마 원전 다녀온 시찰단
오염수 시료 채취조차 못해
제한적 장면만 봤을 가능성
오염수 현실 꿰뚫어 봤을까

사천해전에서 이순신은 거북선이란 ‘비책’을 꺼내 들었다. 그렇다고 거북선을 마냥 믿은 건 아니었다. 거북선 위에 ‘쇠못’을 달아서 왜군이 뛰어내리지 못하도록 했다. 근접전을 즐기는 왜군의 습성을 미리 파악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조치였다. 이처럼 적을 알면 백전백승이지만, 적을 모르면 백전백패다. 지난 5월 일본 후쿠시마 원전을 다녀온 ‘시찰단’은 얼마만큼 준비가 돼 있었을까.

일본 후쿠시마 원전을 다녀온 시찰단은 오염수의 실체를 얼마나 알고 있었을까.[사진=뉴시스]
일본 후쿠시마 원전을 다녀온 시찰단은 오염수의 실체를 얼마나 알고 있었을까.[사진=뉴시스]

거북선이 적진을 헤집고 다니자 왜군은 등선육박전으로 대응했다. 지푸라기와 거적때기로 위장한 거북선의 지붕 위로 일제히 뛰어내렸다. ‘으악! 으아악!’ 거적 아래 숨겨진 길고 날카로운 쇠못과 칼에 신체 부위가 찔린 자들이 그 자리에서 죽거나 비명을 질러댔다. 

아수라장이 된 적진을 향해 이번엔 조선 수군 판옥선들이 대포로 사방의 적선을 파괴했다. 마무리 불화살 공격과 근접전에 전장은 지옥과 다름없었다. 견디지 못한 적군은 배를 버리고 육지로 도망갔다. 이는 이순신의 2차 출정 첫 전투인 ‘사천해전’의 기록이다. 

어쩌면 순신의 승리는 치밀한 준비의 결과물이었다. 순신은 왜군이 근접전에 능하다는 걸 간파하고 있었다. 해전에서도 왜군은 속도가 빠른 왜선을 판옥선에 붙인 다음 뛰어들어 육박전을 펼칠 것으로 예상했다. 그래서 거북선의 지붕 위에 쇠못과 칼을 붙여놨던 거였다. 

이 지점에서 잠깐 오늘날 이야기를 해보자. 일본 후쿠시마 제1원자력발전소의 오염수 해양 방출 관련 설비를 점검하기 위해 5월 21일 일본 현지로 떠났던 한국 시찰단이 26일 돌아왔다. 시찰단은 원전 현장을 방문해 다핵종제거설비(ALPS), ALPS를 거친 오염수를 보관하는 탱크군을 중점적으로 확인했다. 

일본 정부는 시찰단의 현장 점검이 “오염수의 해양 방출이 얼마나 안전한지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면서 한국의 후쿠시마산 식품 수입규제의 해제를 희망했다. 하지만 시찰단이 얼마나 정확하게 후쿠시마 오염수의 현실을 꿰뚫어 봤는지는 알 수 없다. 오염수 시료를 채취조차 하지 못한 그들이 시찰한 건 일본이 보여주고 싶은 제한적인 장면뿐일 가능성이 높아서다.

이 때문인지 엠브레인퍼블릭·케이스탯리서치·코리아리서치·한국리서치가 지난 5월 22∼24일 전국 만 18세 이상 남녀 1001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전국지표조사(NBS) 결과, 응답자의 53.0%는 시찰단 파견이 별 도움을 주지 못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자고로 적을 알면 백전백승이지만, 적을 모르면 백전백패다. 시찰단을 파견한 윤석열 정부는 어떤 결과를 받아들까. 

다시 순신 이야기로 돌아와 보자. 순신은 직접 승전고를 울려 싸움을 끝냈다. 해는 이미 저물어 황혼이 됐다. 조선의 함대는 모자랑포(경남 사천시 용현면 주문리)로 이동해 밤을 지내기로 했다. 

승리한 아군도 제법 피해를 입었다. 군관 나대용과 이설이 적의 탄환을 맞았지만 중상은 아니었다. 순신은 “활을 쏘는 군사들과 노를 젓는 군사들 중에 탄환을 맞은 자가 많았다”고 기록했다. 직접 앞장서 전투를 독려하던 순신도 왼쪽 어깨에 총상을 입었고, 이로 인해 그는 오랫동안 고생했다.

‘사천해전’은 순신이 첫 출전시킨 거북선의 위력이 확인된 전투였다. 승리를 거둔 순신 함대는 일단 사천만 입구의 모자랑포로 이동해 정박했다. 이때 우후 이몽구와 순천부사 권준 등 휘하 장수들이 승리를 축하하기 위해 순신의 함선에 모여들었다. 경상우수영의 원균과 기효근, 이운룡 등도 찾아왔다.

순신은 마침 갑옷을 벗고 있었는데, 적삼에 묻은 피가 흥건했다. 이를 본 장수들이 “사또 이게 웬일이오?”라며 모두들 놀랐다. 순신은 “왼편 어깨에 철환을 맞은 모양이오”라며 적삼을 벗었다. 관통상을 입었다는 얘기도 있고, 녹도만호 정운이 칼로 왼편 어깨에 박힌 철환을 파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순신이 총상을 입고도 그 자리에서 넘어지지 않은 건 무엇보다도 아군의 사기가 꺾이는 걸 막기 위한 행동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가 총을 맞았다는 게 알려지면 전세가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일. 이 때문에 순신은 아픈 기색을 보이지 않는 독한 모습을 보인 것이다. 

6월 1일 새벽, 원균이 순신에겐 아무런 통지도 하지 않고 자신이 지휘하는 함선에 올라 어딘가로 움직이고 있었다. 이같은 보고를 듣고 순신은 사람을 시켜 원균에게 까닭을 물어보라고 했다. 원균은 몰래 가려다 들킨 게 당황스러웠던지 순신을 찾아갔다. “영감, 어깨의 상처는 어떠하오?”라며 머쓱한 질문을 던졌다.

“걱정할 정도는 아닌 거 같소이다. 고맙소. 그런데 영감은 이른 새벽에 어디를 가시오”라는 순신의 질문에 원균은 이렇게 답했다. “어제 싸움에 적선 2척을 남겨 놓으신 것이 있지 아니하오. 지금 그 2척을 처리하러 가려 하오. 적의 수급은 영감께 바치오리다.”

순신은 답했다. “그러하시거든 가보시오. 우리가 국가의 중대한 임무를 받고 적과 싸우는 처지인데, 피차가 어찌 있겠소. 수급이 뉘 것이며 공이 뉘 것인 것을 말할 것이 있소? 혼자 가시기 고단하거든 전선 몇 척을 내드릴 테니 데리고 가시오.” 

전쟁 중이라 한 사람의 장수라도 귀한 실정이었기에 순신은 스스럼없이 수색작업을 원균에게 맡겼다. 순신이 원균 같은 인물을 포용한 것은 어떠한 상황이라도 규범을 철저히 준수하는 정상적인 지도자의 자세를 보여주는 사례다. 

이순신은 왜군의 전략까지 꿰뚫고 있었다.[사진=더스쿠프 포토]
이순신은 왜군의 전략까지 꿰뚫고 있었다.[사진=더스쿠프 포토]

순신의 승낙을 얻은 원균은 배를 급히 몰아 전날 밤 싸우던 사천항 앞바다로 갔다. 도망간 일부 작은 적선이 아직 남아있는 곳이다. 원균은 육지로 도망갔던 적들이 이들 남은 배를 타고 도주할 것으로 내다봤다. 패잔병을 공격해 전공을 세우려 했으나 물거품이 됐다. 빈 배만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원균은 전리품이 될 만한 것을 챙긴 뒤 배를 불살랐다. 그리고 적이 진을 쳤던 곳에서 시체 3구를 찾아내 목을 베어 본진으로 돌아왔다. 그리곤 큰 공이나 세운 듯 나라에 장계를 올렸다. 

순신의 휘하 장수들은 원균의 이같은 행동에 분통을 터뜨렸다. 하지만 순신은 이렇게 말렸다. “충성으로 싸우는 사람이 있고, 공을 세워 상을 받자는 사욕으로 싸우는 사람도 있소. 공을 바라는 사람에게는 공을 주어야 잘 싸우는 것이오. 지금 국가의 일이 위급하고 싸울 사람이 귀하니 부득불 공을 주어 싸울 마음을 조장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으면 하오.” <다음호에 계속> 

이남석 더스쿠프 발행인
cvo@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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