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에 다시 한번
반하게 한 바나나

# 어릴 때 게임을 할 때면 캐릭터를 고르기 힘들었습니다. 그럴 땐 캐릭터의 ‘분석도’를 참고합니다. 스피드, 파워, 체력 등의 요소를 오각형 또는 육각형 형태의 그래프로 나타낸 것입니다. 덩치 큰 우락부락 캐릭터는 힘이 세지만 스피드는 느립니다.

예를 들면, 느리지만 압도적인 파워를 보여주는 스트리트파이터의 ‘장기에프’ 같은 경우입니다. 그의 스크류파일드라이버에 걸리면 체력의 반 가까이 사라집니다. 약점이 큰 만큼 강점도 두드러집니다.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입니다. 모든 것이 좋을 수만은 없다는 걸 그 시절 게임에서 배웠습니다. 

# 이젠 게임을 하지 않으니 ‘캐릭터 분석도’를 본 것은 오래전일입니다만 요즘은 다른 분석도를 그리느라 바쁩니다. 바로 돈, 의미, 재미입니다. 이 세가지는 일을 할 때 중요하게 생각하는 요소입니다.

가끔 셋 중에 어느 것이 가장 중요하냐는 말을 듣기도 합니다. 사실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어느 쪽으로 치우치기보단 균형을 잡기 위해 애씁니다. 치우치면 꼭 후회란 부메랑이 날아오는 게 인생이니까요. 

# 하지만 세상 일은 뜻대로만 흘러가진 않습니다. 얼마 전 촬영입니다. 일정은 빡빡하고, 재미도 없고, 개인적으로 의미가 있는 일도 아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돈’으로 기울어진 일이었습니다. “그래, 며칠만 고생하자.” 그만큼 가족이 편해진다란 생각으로 일을 받았습니다.

그렇게 굳게 마음을 먹더라도 휴일 아침 일찍부터 종일 카메라를 메고 뛰어다니다 보면 많은 상념이 스칩니다. “괜히 했나. 하지 말걸 그랬나. 언제 끝나지. 배고파 죽겠네, 스스로 결정해놓고 왜 이렇게 징징대냐” 등으로 말이죠. 그중 가장 괴로운 생각은 사진 찍는 일이 재미없어진다는 겁니다. 사진을 좋아하는 제겐 치명상 같은 감정입니다. 

# 그렇게 시간이 흘러흘러 일이 끝났습니다. 어머님 집에서 가족과 합류하기로 한 약속을 바꿔 홀로 집으로 향했습니다. 지친 몸과 마음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왔더니 모든 게 고요합니다. 불을 켜지 않은 채 식탁에 앉아 숨을 돌립니다.

늦은 저녁, 넘어가기 직전의 해가 뒤창문을 통해 집 안으로 들어옵니다. 식탁을 비춥니다. 먹다 남은 바나나에 빛이 들어옵니다. 순간 눈이 번뜩입니다. 서둘러 휴대전화를 들고 사진을 찍기 시작합니다. 앉아서, 서서, 앞에서, 뒤에서, 가까이에서, 멀리서 정신없이 사진을 찍습니다. 해는 고개 너머로 사라지고 빛도 함께 사라졌습니다. 그제야 저도 정신이 들며 피식 웃음이 납니다. “아직 살아있네.” 

# 그날 찍었던 게 이 바나나 사진입니다. 지칠 대로 지쳐도 사진을 찍을 때가 가장 신나고 활기찬 걸 보면 아직 사진을 참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다행입니다. 다른 이에겐 그저 어두침침한 바나나 사진 한장이겠지만 제겐 다른 의미로 다가옵니다.

아무도 없는 불 꺼진 집에서 제가 찍은 사진을 보고 혼자 흐뭇해합니다. 누군가에게 말해주고 싶습니다. “이러니 내가 이 바나나 사진에 반하나 안 반하나.” 사진에 다시 한번 반하게 만든 바나나 사진입니다. 

사진·글=오상민 천막사진관 사진작가 
studiotent@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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