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視리즈] 국민연금과 입김➊
엘리엇 ISD 소송이 던진 교훈
소송 패소로 혈세 집행할 전망
정부 “국민연금 의결과 무관” 주장
중재판정부 “사실상 정부 결정”
국민연금 흔들었던 정부에 발목
엘리엇이 던지는 교훈 살펴봐야

한국 정부가 미국계 사모펀드 엘리엇과의 소송에서 졌다. 이번 패소로 정부가 엘리엇에 물어줘야 할 돈은 1300억원 정도로 추정된다. 패소 이유는 중재판정부가 국민연금공단의 의결권 행사를 ‘사실상 정부의 결정’으로 판단해서다.

그렇다면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지금이든 그 이후든 국민연금공단의 의사결정에 정부의 입김이 개입될 소지가 전혀 없느냐다. 視리즈 ‘국민연금과 입김’에서 이 문제를 살펴보자. 첫번째 편이다.

한국 정부와 엘리엇 간 소송에서 판결을 가른 건 제일모직과 삼성물산의 합병에 찬성한 국민연금공단의 의사결정에 정부가 개입됐는지 여부였다.[사진=뉴시스]
한국 정부와 엘리엇 간 소송에서 판결을 가른 건 제일모직과 삼성물산의 합병에 찬성한 국민연금공단의 의사결정에 정부가 개입됐는지 여부였다.[사진=뉴시스]

8년 전 사건이 다시 소환됐다. 바로 2015년 9월 진행된 제일모직과 삼성물산의 합병 사건이다. 최근 미국계 사모펀드 엘리엇이 2018년 한국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투자자-국가 간 소송(ISD)’에서 한국 정부가 일부 패소했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다.

사건의 핵심을 복기하면 대략 이렇다. 2015년 5월 제일모직과 삼성물산은 합병 계획을 발표했다. 합병 비율은 1(제일모직) 대 0.35(삼성물산)로 책정했다. 삼성물산 주주들은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당시 부회장)의 경영 승계를 위해 삼성물산의 가치가 낮게 책정됐다”면서 문제를 제기했다.

[※참고: 삼성물산은 삼성전자의 2대 주주(지분율 4.06%)였고, 이 회장은 제일모직(지분율 23.23%)의 대주주였다. 이런 상황에서 삼성물산 주식을 저평가한 후 제일모직으로 흡수하면 이 회장은 삼성물산이 가진 삼성전자 지배력을 쉽게 가져갈 수 있었다.] 

세계 최대의 의결권 자문사들은 합병에 반대해야 한다고 조언했지만, 합병은 그대로 진행됐다. 삼성물산 주식 11.21%를 보유한 국민연금공단이 찬성표를 던진 덕분이었다. 

문제는 국민연금공단의 의결권 행사에 정부의 입김이 들어갔다는 사실이 밝혀졌다는 점이다. 이듬해인 2016년 국정농단 사건이 터지면서였다. 특검 수사를 통해 문형표 전 보건복지부 장관이 국민연금공단의 합병 찬성 결정에 영향력을 행사했고, 당시 박근혜 대통령과 최서원(최순실)씨가 이재용 회장으로부터 대가성 뇌물을 받고 이 과정에 개입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박 전 대통령과 최씨, 이 회장, 문 전 장관, 홍완선 전 기금운용본부장 등 관련자들은 모두 재판에서 실형을 선고받았다. 

엘리엇은 이 재판 결과를 근거로 국제상설중재재판소(PCA)에 ISD를 제기했고, 5년 만에 일부 승소 판결을 받은 거다. 중재판정부는 한국 정부가 엘리엇에 5359만 달러(약 690억원)를 배상하고, 2890만 달러(약 373억원)의 법률비용을 지급하라고 명령했다. 지연 이자 등을 포함하면 약 1300억원에 달한다. 모두 국민의 혈세로 충당해야 할 돈이다. 

역대 정부는 정책자금이 필요할 때마다 국민연금기금을 입맛대로 가져다 썼다.[사진=뉴시스]
역대 정부는 정책자금이 필요할 때마다 국민연금기금을 입맛대로 가져다 썼다.[사진=뉴시스]

그러자 일부에선 “세금으로 비용을 대는 건 합당하지 않다” “박 전 대통령과 이 회장에게 구상권을 청구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등의 비판이 나온다. “엘리엇은 소송 등으로 이득을 챙겼지만, 소액주주들의 손해는 누가 보상하느냐”는 지적도 있다. 

우리가 생각해봐야 할 문제는 이뿐만이 아니다. 이번 재판 결과를 근거로 국민연금공단의 의결권 행사가 다양한 소송의 빌미를 제공할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다. 단순히 엘리엇이 승소했으니 또다른 삼성물산 주주들도 소송에 나서지 않겠냐는 차원의 얘기가 아니다.

이 문제를 이해하려면 우선 ISD에서 중재판정부가 엘리엇의 손을 들어 준 이유부터 정확히 짚어봐야 한다. 법무부는 지난 6월 23일 보도자료를 통해 이를 밝혔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중재판정부는 국내 형사 확정판결을 인용해 ▲국민연금공단이 사실상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에 관해 캐스팅보트를 갖고 있어 국민연금공단의 표결과 삼성물산 주주들의 손실 사이에 인과관계가 있었음을 인정하고, ▲국민연금공단의 행위가 우리 정부에 귀속되는 것으로 판단했다.” 

쉽게 말해 중재판정부는 국민연금공단의 의결권 행사를 ‘사실상 정부의 결정’으로 봤다. 이런 상황에서 국민연금공단이 자신은 물론 주주들에게 손실을 끼치는 방향으로 의결권을 행사한다면 문제가 될 수 있다는 점도 명시했다. 

우리 정부는 국민연금공단의 의결권 행사가 주주로서의 순수한 상업적 행위라고 반박했지만, 중재판정부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중재판정부의 결정은 어쩌면 당연하다. 앞선 국내 재판을 통해 이미 대통령과 보건복지부 장관 등이 국민연금공단의 의결권에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게 드러났고, 유죄 판결까지 받은 상황이어서다.

그런데도 정부는 ‘정부와 국민연금공단의 의결권 행사는 무관하다’는 주장을 폈다. 박상인 서울대(행정대학원) 교수는 “정부가 누구도 납득하기 어려운 주장을 펼친 셈”이라고 비판했다. 

중요한 건 전직 대통령과 보건복지부 장관 등이 국내 재판에서 유죄 판결을 받지 않았다면 국민연금공단의 의사결정이 정부의 입김으로부터 자유롭다고 할 수 있느냐는 점이다. 그렇지 않다. 국민연금공단의 의사결정이 ‘사실상 정부의 결정’이나 다름없다는 증거는 차고 넘친다. 

첫번째 증거는 국민연금기금이 정부의 쌈짓돈처럼 쓰인 게 한두번이 아니라는 데 있다. 보수든 진보든 특정 정권에서만 벌어진 일도 아니다. 이 이야기는 視리즈 ‘국민연금과 입김’ 두번째 편에서 상세하게 다뤄보려 한다. 

김정덕 더스쿠프 기자
juckys@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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