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찰ㆍ열정ㆍ소통의 리더 이순신㉗
이순신, 장졸들과 자주 소통하며
휘하 장수들에게 신뢰감 안겨
장졸들도 믿음 갖고 지시 따라

조직의 리더는 통제해야 할 게 많다. 그중 하나는 ‘공정성’이다. 실적이나 성과를 평가할 땐 측근과 그렇지 않은 구성원을 차별해선 안 된다. 이를 잘 보여주는 이는 다름 아닌 이순신이다. 그는 “전공을 냉정하게 평가해 상부에 그대로 보고하겠다”는 약속을 임진왜란 내내 지켰다. 휘하 장수들이 이순신을 따른 이유가 여기에 있다. 

공정하지 않은 리더를 따르는 조직원은 없다.[사진=게티이미지뱅크]
공정하지 않은 리더를 따르는 조직원은 없다.[사진=게티이미지뱅크]

이순신은 휘하 장졸들과 여러 번에 걸쳐 소통하는 자리를 만들었다. 그때마다 “적의 수급을 베는 데 힘쓰지 말고, 한명이라도 더 사살하는 데 치중하라”고 지시했다. 한건의 수급을 확보하는 시간이라면 화살로 10명의 적을 물리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또 “베어온 적의 머릿수보다는 사살 숫자에 따라 전공을 평가하고, 이를 그대로 상부에 보고할 것”이라며 휘하 장수들에게 신뢰감을 줬다. 부하 장졸들은 이런 순신에게 믿음을 갖고 그의 지시대로 잘 따랐다. 

이같은 소통과 신뢰의 힘은 당항포해전의 전적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왜군 전함 26척이 모두 파괴돼 불탔고, 사령관으로 참전했던 모리 무라하르를 비롯 2720명이 사망했다.

순신은 승전의 장계를 올릴 때 자신의 약속대로 장졸들의 공로를 깨알같이 기록했다. 하지만 현실은 순신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임진왜란 당시엔 논공행상의 기준으로 ‘왜군의 수급’이 당연시됐다. 그런데 순신의 전라좌수영에서 조정에 전달한 수급보다 원균의 경상우수영에서 올린 수급이 많았다. 이는 어처구니없는 오해와 촌극으로 이어졌다.

순신이 이끄는 전라좌수영은 소극적으로 전투를 한 반면, 원균이 이끄는 경상우수영은 용맹스럽게 활약을 한 것으로 생각하는 조정 대신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원균의 과오는 까맣게 잊은 채 말이다. 

그 무렵, 방답첨사 이순신은 매복 작전에 성공한 후 적의 배를 살펴보다 3000여명의 이름이 적힌 발기發記를 발견했다. 새벽에 탈출을 시도하던 적선 1척이 다름 아닌 대장선이었던 것이다. 문서에 기록된 성명 밑에는 피로 맹세한 듯 혈흔이 남아 있었다. 방답첨사는 발기 외에도 갑주, 창검, 궁시, 조총, 표피豹皮, 마안馬鞍 등을 전리품으로 수거해 순신에게 보고했다. 

당항포해전을 마무리한 이순신 함대는 전투가 있었던 당항포 앞바다로 옮겨 군사를 쉬게 하다가, 저녁 무렵에 함대를 고성 땅 전도리의 해안으로 옮겨 정박했다.

다음날인 6월 7일 아침, 웅천 증도(경남 창원시 마산합포구) 바다에 이르러 진을 치고 탐망선을 내보냈다. 천성, 가덕 등지의 적의 움직임을 알아보기 위해서다. 탐망선 선장 진무 이전李筌과 토병 오수吳水 등은 적병의 수급 둘을 베어가지고 돌아왔다. 

한명이 이렇게 보고했다. “소인들이 가덕 바다로 갈 때 어떤 배 한척에 적병 3인이 함께 타고 오다가 소인들의 배를 보자 북쪽으로 달아났습니다. 이를 추격해 3인을 잡아 목을 벴지만 그중 수급 하나를 경상우수사 원균의 군관에게 강제로 빼앗겨 수급 둘만 가지고 왔습니다.” 

그러자 다른 한명이 “경상우수영 놈들은 산 적병을 보면 무서워서 하나도 못 잡으면서 죽은 적병의 머리 주워 모으기만 할 줄 아는가. 경을 칠 놈들!”이라며 분통을 터뜨렸다. 


순신은 말을 삼가라고 엄명했다. 그리고 이전과 오수 등에게 노고를 치하하며 술과 음식을 내어주고 그들에게 다시 천성으로 가서 적의 종적을 알아오라고 지시했다. 

일반적으로 왜군 수군 깃발의 색깔은 서로 달랐다. 전일 옥포의 적은 적赤기, 사천의 적은 백白기, 당포의 적은 황黃기, 이번 당항포의 적은 흑黑기였다. 순신은 “아마 부대를 나눠 전후좌우 또는 중앙으로 표시한 듯하다”며 함대를 거제도 영등포 앞바다로 이동시켰다. 

6월 7일 정오쯤, 이순신 함대가 거제도 북단의 영등포 앞바다를 지나가고 있는데 마침 왜선 7척(대선 5척, 중선 2척)이 율포에서 나와 부산 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노략질한 물건들을 배급 기지인 부산항으로 실어 나르기 위한 것이다.

적들은 아군 함대를 보자마자 꽁무니를 뺐다. 당황하고 급한 나머지 군량, 병기, 화약 등 화물을 바다에 던져 버리며 필사적으로 도망갔다. 결국 역풍을 뚫고 추격에 성공한 조선연합함대에 의해 7척 모두 불에 타 소멸됐다. 배에 탄 왜적은 화살을 맞고 물에 빠져 죽거나 목이 베여 죽었다. 순신은 함대를 좌우 양쪽으로 나눠 가덕 천성을 거쳐 동래땅 몰운대로 나아갔다. 꼼꼼하게 수색을 했지만 적선의 그림자는 없었다.

초저녁이 될 무렵, 거제 송진포(경남 거제시 장목면 송진포리)로 돌아와 밤을 지낸 순신은 이튿날인 8일부터 9일까지 창원 마산포·안골포·제포·웅천 등지에 탐망선을 보내 적의 종적을 염탐했다. 이번에도 역시 ‘적군의 그림자가 보이지 않는다’는 보고만 들어왔다. 6월 10일 조선연합함대가 남해 미조항 앞바다에 이를 때까지 적을 발견하지 못하자 이순신이 입을 열었다.

이순신은 장졸들의 전공을 깨알같이 기록했다.[사진=더스쿠프 포토]
이순신은 장졸들의 전공을 깨알같이 기록했다.[사진=더스쿠프 포토]

“이번에 작전을 펼친 후 분멸한 적선의 수량이 72척이요, 사망한 적군의 수는 3000명을 훨씬 넘는다. 또 살아서 육지로 도망한 적군이 수만이 넘을 것인즉 우리의 힘이 어떠한지를 보여주는 듯하다. 이제 돌아가 전사한 군사의 장례를 치러주고, 부상한 군사를 치료하고 새로 장정을 모집할 때다. 또 군량을 준비하고 병기·화약 등을 제조해 적군의 소굴인 부산·양산을 소탕할 계획을 세워야 한다.” 

이렇게 조선연합함대는 각자의 진영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순신은 2차 출전 기간에도 연이은 승리를 거뒀지만 조선 수군의 피해도 적지 않았다. 큰 싸움이 4차에 달한 탓에 죽은 군사는 13명이나 됐다. 총에 맞아 죽은 사람이 10명, 화살에 맞아 사망한 이는 3명이었다. 총에 맞아 부상을 당한 사람은 이순신을 포함 나대용·이설 등 16명, 화살에 부상당한 군사는 21명이었다. <다음호에 계속> 

이남석 더스쿠프 발행인
cvo@thescoop.co.kr

저작권자 © 더스쿠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