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찰ㆍ열정ㆍ소통의 리더 이순신㉛
평양성으로 피신한 선조 일행
달아날 궁리만 하는 지도자들
조정에 승전고 알린 이순신
류성룡 등 몇몇 대신만 승첩 반겨

“평양을 버리지 않겠다.” 선조는 백성 앞에서 당당하게 약조했지만, 사실 명나라란 ‘뒷배’를 믿은 측면도 있었다. 하지만 정작 명나라가 조선을 돕겠다는 의사를 내비치지 않자, 대신들이 먼저 동요했다. 후방에선 이순신이 승전고를 울리고 있었지만, 높으신 나리들은 평양을 떠날 궁리만 하고 있었다. 참으로 고위직이란 양반들의 무책임함은 동서고금을 가리지 않는 듯하다. 

우리나라 역사에서 민심을 먼저 생각한 지도자가 몇이나 될까.[사진=게티이미지뱅크]
우리나라 역사에서 민심을 먼저 생각한 지도자가 몇이나 될까.[사진=게티이미지뱅크]

류성룡은 수성대장 윤두수에게 ‘이일이 또 술만 먹고 있으니, 빨리 영귀루로 출발하라고 영令을 내리시오’라고 재촉했다. 명령을 받은 이일은 그제야 군사를 거느리고 함구문을 떠나 영귀루로 길을 나섰다. 하지만 군사들 중에는 영귀루가 어딘지 아는 이가 없었다. 이일은 취한 눈으로 남쪽으로만 군대를 몰았다. 그렇게 10여리, 우연히 평양좌수 김내윤을 만났다. 

이일은 김내윤에게 “영귀루를 이 길로 가는 게 맞느냐”고 물었다. 김내윤은 기가 막힌 말투로 “이리로 가면 보통강普通江이오. 영귀루는 지금 오신 길로 도로 가야 하오”라고 답했다. 그러자 이일은 크게 분노하며 “이놈! 네가 진작 와서 길을 인도하지 아니하고 이제야 와서 그런 말을 한단 말이냐”고 따졌다. 그리고는 김내윤을 길바닥에 엎어놓고 볼기를 10여대나 때린 뒤 “특별히 목숨만은 살려주는 터이니 앞을 서서 길을 인도하라”며 소리를 질렀다.

김내윤은 매 맞아 아픈 다리를 끌고 이일의 군을 인도해 만경대萬景臺 밑에 다다랐다. 대동강 저쪽 언덕 위에 벌써 왜군이 수백명이나 늘어서서 강을 건너려 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이를 본 이일은 취했던 술이 번쩍 깨 무사를 불러 활을 쏘기를 명했다. 그러나 군사들은 무서워서 발을 내어놓으려 하지 않았다. 이일이 칼을 빼들고 베려 하니 그제야 군사들이 활을 쏘았다. 

조선 사람 하나를 붙잡아 길잡이로 앞세우고 강을 건너던 적병 6~7명이 활에 맞아 넘어졌다. 물에 들어섰던 적병들이 달아나버렸다. 아군 병사들은 적병이 물러가는 것을 보고서야 비로소 군인다운 모습을 보였다.

선조 일행이 평양성으로 피신한 이후 3주가 흐른 1592년 6월 1일. 명나라 요동도사사遼東都司使 임세록이 왜군의 형세를 살피려 평양에 도착했다. 그를 대동관으로 부른 선조는 “조선의 흥망이 조석朝夕에 달렸다”며 구원병을 보내주길 간청했다. 임세록은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하지만 그의 태도에서는 ‘믿지 않는다’는 모습이 배어나왔다. 임세록의 이런 태도는 선조와 대관들의 마음을 극도로 불안하게 만들었다.

의지할 만한 곳은 이제 류성룡의 입밖에 없었다. 평소 류성룡을 미워하고 시기했던 서인들이라도 어쩔 수 없었다. 류성룡은 임세록에게 말했다. 

“조선은 수백년 동안 전쟁을 치르지 않아 백성들이 병사를 본 적이 없다. 그런데 졸지에 천하의 막강한 적을 만나 당혹스러워하고 있다. 조총이란 군기를 사용해 조선 사람을 말도 못하게 많이 죽였다. 정발, 신립, 심우정, 신할, 유극량 등 여러 장수도 연이어 전사했다.


임세록은 답했다. “왜군이 부산에 도착했다는 말을 들은 지 며칠이 안 돼 국왕이 한양을 버렸고, 또 며칠이 안 돼 개성을 버렸으며, 또 몇날이 안 돼 평양이 위험하다고 하니, 어찌 이럴 수가 있소? 조선에도 사람이 있고 군사도 있거늘 이렇게 빨리 적병이 활개를 칠 수가 있겠느냐는 것이오.” 이같은 그의 말 속엔 ‘조선이 왜군을 인도해 명나라를 치려 한다’는 풍설도 다분히 포함돼 있었다. 
 

명나라가 시큰둥하자 조정이 흔들리기 시작했다.[사진=더스쿠프 포토]
명나라가 시큰둥하자 조정이 흔들리기 시작했다.[사진=더스쿠프 포토]

류성룡은 조선과 일본이 내통한 적 없다는 점을 분명하게 말했다. 또한 조선은 단군과 기자箕子의 감화를 받아 충의와 지성으로 임금을 섬기고 나라를 지켜 왔기 때문에 간사하게 속이는 정책은 예부터 배척했다고 덧붙였다. 이뿐만이 아니라 왜군이 벌써 대동강 저편에 와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 임세록을 데리고 연광정練光亭에 올라 형세를 보여줬다. 

얼마나 굴욕적인 일인가. 지천명知天命의 한 나라 수상이 일개 젊은 외국 군관에게 동정과 호감을 얻으려고 애쓰는 모습이 말이다. 때마침 적병이 강 저쪽 수풀 속으로 보이더니 이윽고 2~3인이 뒤를 이어 나와 배회한다. 류성룡이 임세록에게 “저게 적병의 척후라오”라고 말했다.

임세록은 믿지 아니하는 어조로 “적병이 어찌 그리 적소”라고 반문했다. 류성룡은 답했다. “왜군은 원래 간사하고 교활해 대병大兵이 뒤에 올 때엔 반드시 앞에 정탐을 보내오. 몇명이 안 된다고 마음을 놓았다간 적의 계교에 빠지는 것이오.” 의심을 품은 임세록은 픽 웃으며 믿어지지 아니하는 듯했다. 한참 후 선조와 여러 대관이 류성룡에게 물었다. “임세록의 의심이 풀어진 것 같소?” 류성룡은 “아직도 의심이 매우 깊은 모양이오”라고 답했다.

선조와 여러 대신이 아우성을 쳤다. “백성들에게 평양을 지킨다고 약조한 건 명나라의 구원을 믿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사실 조선의 고위 공직자들은 별다른 계책이 없었다. 따라서 그들에게 명나라의 의심은 세상이 무너질 만큼 큰일이었다. 일부 대관은 명나라 산궁곡으로 들어가 목숨이나 부지하자고 생각했다. 이윽고 꽁무니를 빼는 자가 생기고, 선조의 마음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결국 선조는 평양을 버리지 않겠다는 약속을 저버리려 했다. 류성룡은 그러면 절대 안 된다고 말렸다. 신의를 버린 임금을 누가 믿겠느냐는 논리에서였다. 류성룡의 간청에 힘입어 함경도 피출설은 조정에서 조금씩 힘을 잃었다. 

그러자 서인들이 류성룡의 주장에 반기를 들기 시작했다. 특히 “일본과 짜고 명나라를 공격하려는 게 아니냐”는 명나라측 주장에 선조와 조선 대신들은 어지럽고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 무렵 이순신은 여러번 승전했고, 승전보를 조정에 알렸다. 하지만 대신들은 바다 위의 승첩을 중요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통찰도 안목도 없는 그들은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다만 류성룡 등 몇몇 재상만이 수전水戰의 승첩을 반겼을 뿐이다. <다음호에 계속> 


이남석 더스쿠프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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