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conomovie 다우트⓯
소문 또는 경험 한두개로
아무런 추가 확인 절차 없이
최종 판결로 인식하며 확신
인식 틀렸을 수도 있단 사실
인정하려 들지 않는 잘못 범해

영화 속에 ‘빌런’이 존재한다면, 영화 ‘다우트’ 속의 빌런은 알로이시우스 수녀의 몫이다. 통상 영화 속 빌런들이 적극적으로 악惡을 행한다면, 알로이시우스 수녀는 적극적인 악의 의지를 실행한다기보단 자신도 모르게 인식상의 오류를 저질러 악역이 돼버리는 빌런인 듯하다.

여야 정당은 진영 논리에 빠져 하고 싶은 말만 내뱉고 있다. [사진=뉴시스]
여야 정당은 진영 논리에 빠져 하고 싶은 말만 내뱉고 있다. [사진=뉴시스]

알로이시우스 수녀가 범하는 인식의 오류는 중학생만 돼도 배우는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라는 데카르트(Descartes)의 유명한 명제를 지키기 않기 때문이다.

이성적 판단에 따라 주관적 진리에 도달하는 과학적 방법을 정립한 데카르트의 본래 명제는 ‘나는 의심한다. 그러므로 나는 생각하고,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dubito ergo cogito, ergo sum)’는 삼단논법이다.

데카르트의 가르침은 ‘의심을 하기 때문에 생각이라는 것을 할 수 있고, 생각을 하기 때문에 주관적 진리에 도달할 수 있고, 그러므로 비로소 내가 존재한다’는 뜻이다. 데카르트가 말하는 ‘코기토(인식ㆍcogito)’는 2가지로 나뉜다. ‘의심(doubt)’은 감각적 직관에 의한 ‘감성적ㆍ감각적 인식’이다. 이는 사물의 외면적인 느낌과도 같은 것이다. 


반면 ‘생각(think)’이란 이 감성적 인식을 출발점으로 오류를 정정하고 다른 것들과 비교하고 구분해 얻는 사물의 본질적이고 ‘이성적인 인식’이다. 데카르트는 ‘의심(감성적 인식)’으로부터 ‘생각(이성적 인식)’에 도달하기까지는 자신의 모든 판단과 확신을 유보한다. 이성적이고 과학적인 연구가 이뤄지기 위한 기본이다.

알로이시우스 수녀는 플린 신부가 ‘남학생에게 동성 성추행’을 저지른 것 같다고 의심한다. 그 의심은 플린 신부를 향한 ‘외면적 느낌’이고 직관에 의한 감성적인 인식이다. 우리말로 하면 ‘촉觸’에 가깝다. 플린 신부를 의심하지만 그 의심을 입증할 만한 논리적 증거를 수집하려는 노력은 없이 그저 의심에 머물면서 그것을 확신한다.

‘이성적 인식’으로 발전되지 못하고 ‘감성적 인식’에 머문다. 어찌보면 ‘나는 의심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고 선언해버리는 꼴이다. 데카르트 명제의 가장 핵심적인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를 빼버린다.

확고한 주관적 진리에 도달하는 길은 끝없는 ‘자기 부정’의 과정이다. 데카르트도 위 명제에서 모두 철저하게 1인칭 동사를 사용해 ‘자기의 감성적ㆍ감각적 인식을 부정하고 곱씹어 볼 것’을 가르친다.

‘의심’은 감각적 직관에 의한 ‘감성적ㆍ감각적 인식’이다.[사진=게티이미지뱅크]
‘의심’은 감각적 직관에 의한 ‘감성적ㆍ감각적 인식’이다.[사진=게티이미지뱅크]

데카르트에 앞서 중세의 교부철학자 성 오거스틴(St. Augustine)은 ‘그렇다. 나는 잘못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Si fallor, sum)’라는 명제를 던진다. 자신이 존재한다는 것은 곧 자신의 수많은 인식이 잘못됐다는 것을 알아가는 과정이다. 자신의 생각이 잘못됐다는 것을 모른다거나 부정한다면 사람은 존재 의미가 사라진다.

알로이시우스 수녀는 관객들이 보기엔 ‘잘못됐을 수도 있는’ 자신의 인식을 본인 스스로는 절대 잘못됐을 수 없다고 밀어붙인다. 영화도 끝까지 정말 플린 신부가 ‘아동 성추행범’인지 아닌지를 관객들에게 알려주지는 않는다. 영화는 관객들에게 ‘당신이 배심원이라면 플린 신부의 혐의를 어떻게 판단하겠느냐?’고 묻는 듯하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피론(Pyrrhon)은 이 세상 어떤 것도 정말로 확실한 건 있을 수 없다고 믿는다. 따라서 어떠한 경우에도 ‘이것의 진실은 이렇다’고 단정해선 안 된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단지 ‘이것의 진실은 나에겐 이렇게 보인다’거나 ‘그것은 그럴지도 모른다’고 판단중지(Epoche)를 선언할 것을 권한다. 

그가 권하는 ‘판단중지’란 판단을 포기하라는 것이 아니라, 한쪽으로 섣불리 판단을 내리지 말고 진정한 결론에 이르기까지 치열하게 탐구를 계속하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섣불리 판단을 내리고 나면 더 이상의 탐구는 필요성을 잃는다. 


영화 속에서 알로이시우스 수녀가 빌런으로 보이는 이유는 데카르트의 명제를 팽개치고 의심이라는 ‘감성적 인식’을 아무런 확실한 증거도 없이 ‘이성적 인식’으로 둔갑시켰다는 사실이다. 그는 성 어거스틴이 그토록 경고했던 ‘자신의 인식이 틀렸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려 들지 않는 잘못’을 범했다.

또한 불확실한 사실을 놓고 증명할 수 없으면 일단 ‘판단중지’를 선언하고 계속 진실을 찾으려 노력해야 한다는 피론의 가르침도 듣지 않는 잘못을 저질렀다. 이쯤 되면 알로이시우스 수녀는 빌런이 맞다.

하나의 사실을 두고 누군가는 맹신하고 누군가는 비판한다. 이성이 사라진 듯하다.[일러스트=게티이미지뱅크]
하나의 사실을 두고 누군가는 맹신하고 누군가는 비판한다. 이성이 사라진 듯하다.[일러스트=게티이미지뱅크]

알로이시우스 수녀만 ‘빌런’은 아니다. 우리도 떠도는 소문 몇 마디나 자신의 경험 한두 가지로 ‘촉觸’을 발동해 하나의 사실 또는 한 사람을 ‘감성적ㆍ감각적 인식’하고 결론에 도달하며 확신한다. 그 과정에서 의심은 아무런 추가 확인 절차 없이 ‘대법원 최종판결’이 돼버린다. 하나의 사실이나 한 사람을 열광적으로 맹신하기도 하고, 반대로 가루가 되도록 패기도 한다. 

아무리 복잡한 사회현안 문제를 두고 찬반 여론조사를 해도 찬성과 반대를 합치면 90%를 넘나든다. ‘잘 모르겠다’고 ‘판단중지’를 택한 응답자는 극히 소수에 불과하다. 그 찬성과 반대들이 모두 정말 ‘이성적 인식’에 기반을 둔 답변들인지는 ‘잘 모르겠다.’


김상회 정치학 박사|더스쿠프
sahngwhekim5353@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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