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視리즈] 직장 내 괴롭힘과 진실 말할 권리
데스크와 현장의 관점
대한적십자사 ‘괴롭힘’ 사건
폭행 사실 확인한 동부혈액원
가해자-피해자 분리 안 해
직원 고충 담당한 책임자 C씨
폭행문답서 가해자에게 넘겨
개인정보 유출 혐의로 법적 처벌
그럼에도 올해 4월 기관장 발령
대한적십자사 “사실관계 몰랐다”
헌혈‧적십자회비로 운영하는 기관
국민 눈높이 맞는 도덕성 갖췄나

직장 내 괴롭힘을 당한 피해자가 되레 궁지에 몰리는 일은 지금도 많다. 대한적십자사 동부혈액원에서도 그런 일이 있었다. [일러스트=게티이미지뱅크, 더스쿠프]
직장 내 괴롭힘을 당한 피해자가 되레 궁지에 몰리는 일은 지금도 많다. 대한적십자사 동부혈액원에서도 그런 일이 있었다. [일러스트=게티이미지뱅크, 더스쿠프]

# ‘웃으면서 인사한다’는 이유로 맞았다.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며 또 맞았다. 대한적십자사 동부혈액원 직원 B씨는 그렇게 ‘직장 내 괴롭힘’의 피해자가 됐다.  

# B씨는 어쩔 수 없이 동부혈액원에 폭행의 실체를 털어놨다. 달라진 건 없었다. 폭행 여부를 감사한 동부혈액원 책임자 C씨는 “괴로워서 잠이 안 오면 양주 먹고 자라”는 등 괴상한 말만 늘어놨다. 설상가상으로 그는 피해자의 신상정보가 담긴 ‘폭행 문답서’를 가해자 A씨에게 넘겨줬다. 훗날 A씨는 폭행 혐의로, C씨는 개인정보 유출 혐의로 법적 처벌을 받았다. 

# 이 이야기는 8년 전 동부혈액원에서 터진 ‘직장 내 괴롭힘’ 사건의 단면이다. 이들 세 사람은 지금 어떤 삶을 보내고 있을까. 안타깝게도 회사를 떠난 이는 피해자뿐이다. 가해자는 대한적십자사 산하 혈액원에 남아있다. 책임자 C씨는 올 4월 동부혈액원 ‘기관장’에 선임됐다.

기관장 인선 과정에서 ‘괴롭힘 사건’을 문제 삼지 않았던 대한적십자사는 “지금도 어떠한 조치를 취할 계획은 없다”고 말했다. 헌혈과 적십자회비로 운영하는 대한적십자사의 도덕성은 ‘국민 눈높이’를 맞추고 있는 걸까. 

# 더스쿠프가 지금껏 알려지지 않았던 이 사건을 ‘직장 내 괴롭힘’의 법적‧제도적 한계와 함께 다뤘다. 상세한 내용은 파트1(폭행 가해자 도운 범법자, 대한적십자사 ‘기관장’ 되다‧7월 29일)에서 다뤘다. 더스쿠프 데스크와 현장의 관점, ‘직장 내 괴롭힘과 진실을 말할 권리’ 마지막 이야기다. 

헌혈과 적십자회비로 운영하는 대한적십자사는 어떤 공공기관보다 도덕적 우위를 견지해야 한다. 현실은 그렇지 않다. [사진=뉴시스]
헌혈과 적십자회비로 운영하는 대한적십자사는 어떤 공공기관보다 도덕적 우위를 견지해야 한다. 현실은 그렇지 않다. [사진=뉴시스]

# 미움받을 행동 

불과 13년 전인 2010년만 해도 ‘직장 내 괴롭힘’의 피해자는 유별난 사람이란 조롱을 받았다. 욕먹고, 비난받고, 미움받을 만한 행동을 골라 하는 골칫거리란 편견에서도 자유롭지 못했다.

그럴수록 피해자의 절규는 소리 없이 파묻혔고, 가해자는 되레 어깨를 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끔찍한 일이다. 이런 시선이 달라진 건 피해자가 그들만의 아픔을 세상에 알릴 도구를 손에 쥐면서다. ‘처절한 절규’를 세상 밖으로 끄집어낸 건 다름 아닌 인터넷과 SNS였다. 

# SNS란 소통수단 

이는 미국의 컨설팅업체 NAVEX Global이 2018년을 이끌 윤리경영 트렌드 중 하나로 ‘직장 내 괴롭힘’을 꼽으면서 언급한 이야기다. 2017년 12월 이 자료를 발표한 NAVEX Global은 “직장 내 괴롭힘을 향한 목소리에 힘이 실리고 있다(This Shift in Power of Voice in the Story of Harassment)”며 “직장 내 괴롭힘은 더 이상 ‘나만의 경험’이 아니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한때는 공론장에 발도 들이지 못했던 철저히 개인적이었던 경험들은 이제 더이상 사적인 것이 아니다(What once was quin tessentially an individual experience that received little to no public discuss ion is private no longer).” 

# 변곡점 2018년 

NAVEX Global이 콕 집은 2018년은 의미가 큰 해다. 우리나라에서 ‘직장인 괴롭힘’이 공론화한 것도 2018년이다. 그해 7월 ‘직장 등에서의 괴롭힘 근절 대책’을 수립한 문재인 정부는 이듬해 9월 ‘직장 내 괴롭힘 금지제도’를 골자로 삼은 근로기준법(개정)을 시행했다.

그로부터 3년 후인 2021년엔 괴롭힘 조사자의 비밀 누설 금지, 과태료 규정 등을 추가로 마련했다. 2018년을 기점으로 5년이 흐른 지금, 이 법적 제도들은 ‘직장 내 괴롭힘’의 피해를 막아주는 울타리 역할을 해내고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그렇지 않다. 한가지 통계를 보자. 민간공익단체 직장갑질119의 자료에 따르면,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을 시행한 2019년 7월 16일부터 2023년 6월까지 고용노동부에 신고된 괴롭힘 사건은 2만8731건으로 집계됐다. 언뜻 적은 수 같지만 그렇지 않다. 연평균 7182건이니, 환산하면 하루 20건이나 된다. 

그렇다고 직장 내 괴롭힘이 해가 갈수록 줄어든 것도 아니다. 중앙노동위원회가 최근 발표한 ‘노동위원회 사건 처리 현황 및 특징’ 자료를 보면, 2022년 직장 내 괴롭힘 사건은 2021년보다 55% 증가했다. 2018년 피해자가 목소리를 낼 수 있는 토대(법적이든 소통수단이든)가 마련되긴 했지만, 직장 내 괴롭힘은 여전히 만연해 있다는 방증이다. 

# 진실 말할 권리 

법이 버젓이 존재하는데도 이런 구멍이 생긴 원인은 뭘까. 답은 ‘모호함’에서 찾을 수 있다. 직장 내 괴롭힘을 학술적으로 분류하면 다음과 같다. 폭력(Violence), 공격(Harassment), 홀대(Mistreatment), 외면(Ostracism), 무례(Incivility)…. 

유심히 살펴봐도 그 강도나 정도를 일괄적으로 규정하는 게 쉽지 않다. 예컨대, 어떤 행동이 외면인지 아닌지, 홀대인지 아닌지, 무례인지 아닌지는 그럴듯한 물증이 있더라도 객관성을 증명하기 어렵다. 앞서 언급했던 직장 내 괴롭힘 사건 2만8731건 중에서 권리를 구제받은 경우가 14.5%(4168건)에 불과한 것도 이 때문이다. 

그래서 피해자와 함께 생활하는 구성원의 제보나 진술은 ‘직장 내 괴롭힘’을 규명하는 데 결정적인 변수로 작용한다. 관건은 직장이란 곳이 진실을 주저 없이 말할 수 있는 공간이냐는 거다.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직장은 그렇지 않다. 피해자를 위해 증언하려 해도 다음과 같은 ‘내적 질문’에 부딪혀 포기하는 이들이 생각보다 많다. “제보했다가 인사상 불이익을 받진 않을까.” “만약 가해자에게 불리한 진술을 하면 (회사가) 그 비밀을 지켜줄까.” 

혹자는 ‘일련의 보호 장치가 마련돼 있지 않느냐’고 반문할지 모른다. 이 말이 틀린 건 아니다. 현행법상 직장 내 괴롭힘을 회사에 신고할 권한은 누구에게든 있고(근로기준법 제76조3의 1항), 회사는 이런 사실을 신고한 이들에게 불리한 처우를 해선 안 된다(제76조3의 4항). 

하지만 법과 제도는 언제나 멀리 있고, 현실의 장벽은 눈앞에 있게 마련이다. 지금 발을 딛고 있는 현실에서 ‘자유롭게 진실을 말할 권리’를 실현하는 건 어려운 일이다. 누군가 “당신의 직장은 ‘진실을 말할 권리’를 보장하고 있는가” “직장 내 괴롭힘 앞에서 당신은 비겁해지지 않을 확신이 있는가”라고 묻는다면, 아마도 쉽게 대답할 수 없을 거다. 

우리가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대한적십자사의 ‘직장 내 괴롭힘’ 사건을 취재한 건 이런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다. 자! 지금부터 폭행으로 얼룩진 이 사건 속으로 펜을 집어넣어 보자. 

# 비인간적인 폭행 

때는 2015년 5월 어느 날. 장소는 동부혈액원 공급실 앞 주차장. 직원 A씨가 인턴 꼬리표를 막 뗀 B씨의 귀를 잡아당기면서 폭행하고 있다.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다는 게 폭행의 이유다.

그로부터 한달 후인 6월, A씨는 이번엔 B씨의 오른쪽 가슴을 세차례 때렸다. 이유는 더 황당하다. “왜 웃으면서 인사해?” B씨를 고통의 늪에 빠뜨린 A씨의 폭행은 그해 10월까지 이어졌다. 방식은 부도덕했고, 비인간적이었다. 

“혈액박스 포장을 제대로 못 한다는 이유로 손바닥으로 가슴을 쳤다(2015년 6월).” “아무런 이유 없이 B씨의 귀를 잡아당겨 또다른 하급직원의 머리와 부딪히게 했다(2015년 10월).” 
  
# 날마다 지옥 

B씨는 버틸 여력을 잃어갔다. 혼자선 폭행의 올가미를 떼 낼 수 없었다. 그해 11월 그는 동부혈액원에 괴롭힘의 실체를 털어놨다. 곧바로 징계위원회가 열렸고, A씨는 징계를 받았다.

하지만 달라진 건 없었다. A씨에게 떨어진 징계는 솜방망이 처벌(견책)에 불과했다. 동부혈액원이 A씨와 B씨를 분리한 것도 아니었다. A씨와 한 공간에서 숨을 쉴 수밖에 없는 B씨에게 직장은 ‘날마다 지옥’ 같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B씨의 고충 처리를 담당한 책임자 C씨도 문제가 많았다. 그는 피해자 B씨의 심정을 헤아리긴커녕 가해자를 두둔하는 듯한 ‘괴상한 말’만 늘어놨다. “괴로워서 잠이 안 오면 양주라도 마시고 자라.” “참고 견뎌라.” 

여기가 끝이 아니다. 책임자 C씨는 피해자 B씨가 진술한 내용이 담긴 ‘폭행 관련 문답서’를 인적사항과 함께 가해자에게 제공했다. 사실상 2차 가해였다.[※참고: 훗날 가해자 A씨는 폭행 혐의로, C씨는 개인정보 누설 혐의로 법적 처벌을 받았다. 이 이야기는 7월 29일 출고한 ‘[단독] 폭행 가해자 도운 범법자, 대한적십자사 기관장 되다’란 제목의 기사에서 상세하게 다뤘다. 책임자 C씨는 문원일 동부혈액원 원장이다.] 

# 뼈아픈 현주소 

그럼 이 세 사람은 지금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결과는 충격적이다. 극명하게 엇갈린 세 사람의 모습은 직장 내 괴롭힘의 뼈아픈 현주소를 보여준다. 

가해자 A씨는 대한적십자사 산하 혈액원에서 근무 중이다. 책임자 C씨는 지난 3월 ‘기관장(원장)’으로 승진해 동부혈액원에 컴백했다. 안타깝게도 피해자 B씨만 2016년 사표를 던지고 회사를 떠났다. 

B씨는 우리에게 절망을 토하듯 이런 말을 남겼다. “가해자 A씨, 책임자 C씨는 제게 어떤 반성의 말도, 어떤 사과도 하지 않았어요. 얼마 전 C씨가 동부혈액원의 원장으로 발령받았단 소식을 접한 후부턴 매일 악몽을 꿔요.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나요?”  

8년 전 터진 동부혈액원 직장 내 괴롭힘 사건은 시사하는 게 많다. [사진=뉴시스]
8년 전 터진 동부혈액원 직장 내 괴롭힘 사건은 시사하는 게 많다. [사진=뉴시스]

# 법과 도덕의 원리 

19세기 독일 법학자 게오르크 옐리네크(Georg Jellinek)는 “법은 도덕의 최소한”이라고 설파했다. 이 말엔 두가지 함의가 들어 있다. 첫째, 법적 틀만으론 부당하거나 비도덕적 행위를 완전히 통제할 순 없다는 거다. 둘째, 그러기 때문에 도덕을 법으로 강제하는 건 쉽지 않다는 점이다. 

‘직장 내 괴롭힘’ 문제도 마찬가지다. 법만으론 괴롭힘의 근원을 뿌리 뽑을 수 없다. 조직이나 회사를 ‘누구나 진실을 말할 수 있는 공간’으로 혁신하는 게 먼저다. 이는 조직과 리더가 무겁게 짊어져야 할 책무다. 

쉼 없이 폭행을 당한 피해자만 사표를 던지게 만든 대한적십자사의 ‘직장 내 괴롭힘’ 사건이 시사하는 건 뭘까. 우리가 몸담고 있는 직장은 괴롭힘을 없앨 만한 최소한의 도덕성과 의지를 갖고 있을까. 

이윤찬 더스쿠프 편집장 
chan4877@thescoop.co.kr
  
김다린·강서구·윤정희 더스쿠프 기자 
quill@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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