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찰ㆍ열정ㆍ소통의 리더 이순신 37편
학익진으로 왜적 함선 대격파
졌다면 바람 앞 촛불 신세
위기의 조선 구한 이순신
정치도, 경제도 빨간불
이순신 리더십 절실해

단 한번의 승은 전세를 바꿔놓기도 한다. 한산도 해전이 그랬다. 만약 이순신이 한산도에서 졌다면, 조선의 명운은 바람 앞 촛불 신세가 됐을 거다. 백성을 뒤로한 채 도망치기 바빴던 선조는 압록강 저 너머로 넘어갔을 수도 있다. 정치도, 경제도 심상치 않은 요즘이다. 우리에겐 이런 위기를 일순간에 바꿔놓을 만한 리더가 있을까.

진짜 리더는 위기의 순간에 등장하게 마련이다.[사진=게티이미지뱅크]
진짜 리더는 위기의 순간에 등장하게 마련이다.[사진=게티이미지뱅크]

드디어 견내량으로 보낸 선봉대 6척이 이순신의 눈에 들어왔다. 포성이 들리는 걸 보니, 싸우며 달아나고 있는 듯하다. 아니나 다를까. 선봉대 6척 뒤를 따라 협판안치(와키자카 야스하루)의 함선들이 검은 돛을 달고 기러기 떼 모양으로 조총을 난사하며 전속력으로 쫓아오고 있다. 

협판안치의 선발 함대가 어찌나 빠른 속도로 추격했는지 후미에 있던 구귀가륭의 함대는 까마득하게 떨어져 보이지도 않았다. 이를 확인한 순신은 손수 북을 울렸다. 한산도 바다에 숨어 있던 순신의 직계 주력함대에 출동을 명령하는 신호였다. 

한산도 바다에 매복하고 기다리던 주력 함대 50여척은 대장선의 북소리를 듣고 일제히 내닫는다. 어영담 등 선봉대가 죽도 앞 큰 바다에 도착했을 때 뒤쫓아온 적의 층각대선은 36척, 중선은 24척, 소선은 13척으로 도합 73척에 달했다. 이게 다가 아니었다. 총 사령관 구귀가륭이 지휘하고 있는 후군後軍 40여척도 뒤쫓아오고 있었다. 

순신이 다시 북을 울렸다. 그러자 판옥대맹선 25척, 중선 15척, 소선 10척 등 50척의 주력부대가 물속에서 솟아오른 듯 나선다. 화도 뒤에 숨어 있던 이억기와 원균의 병선도 좌우로 갈라 나와 후로를 막았다. 승승장구하듯 몰려오던 적의 함대는 의외로 큰 함대가 앞뒤를 막자 그 행렬이 어지러워졌다.

조선 연합함대는 우아한 학익鶴翼의 진세를 벌여 적선을 안아 쌌다. 함대에서는 지자·현자 대포와 승자대포가 일제히 요동쳤다. 선봉으로 오던 적선 3척이 대포에 맞아 깨졌다. 적병은 모두 물에 빠져 부서진 배의 조각을 잡고 죽기를 거부했다. 이 모습을 본 다른 왜적들은 사기가 꺾였다.

뱃머리를 돌려 오던 길로 도망가려 하자 이번엔 난데없이 조선의 병선 5~6척이 고성 두룡포(통영시 중앙동 앞바다) 쪽에서 내닫는다. 순천부사 권준의 병선이었다. 중위장 권준은 각양 대포와 화전을 맹렬히 쏘아댔다. 견디지 못한 적선은 거제 쪽으로 방향을 틀어 도망쳤다. 

이순신이 한산도 해전에서 졌다면 조선의 운명은 장담하기 힘들었다.[사진=더스쿠프 포토]
이순신이 한산도 해전에서 졌다면 조선의 운명은 장담하기 힘들었다.[사진=더스쿠프 포토]

그런데 이번엔 매복선 10여척이 풍우 치듯 달려든다. 송희립, 가안책 등이 탄 순신의 별동대였다. 이들은 서까래 같은 크기의 화전과 각종 천지·현자 대포, 장편전, 유엽전을 퍼부었다. 적도 사력을 다해 응전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사면으로 겹겹이 에워싸인 채 집중포화를 맞을 수밖에 없었다.

때는 황혼으로 접어든다. 불길을 피해 남은 적의 함선들은 틈을 타 도망치려 했지만 미륵도彌勒島와 한산도의 사이 넓은 바다를 가로막은 수천수만의 낙화불(횃불을 줄로 연결해 바다 위에 띄운 것)이 앞을 가로막았다. 적군은 한숨을 지으며 다시 뱃머리를 돌렸다.

갈 길을 잃은 적선은 문어포(통영시 한산면 두억리 북쪽의 포구)에 잠시 내려 길을 물었다. 사람들은 ‘한산도 쪽으로 가면 외양으로 갈 수 있다’고 말했다. 이는 순신의 계책이었다.

한산도 쪽으로 가면 막다른 골목이었다. 벼랑에 몰린 적군은 최후의 항전을 벌였다. 그중엔 장수 협판좌병위脇坂左兵衛(와키자카 사베에), 진과좌마윤眞鍋左馬允(마나베 사마노조)이 탄 배도 있었다. 그들은 좁은 한산도 바다에서 일대 야전을 펼쳤다. 포성이 산악을 흔들고 화광은 하늘에 닿을 듯할 정도로 치열했다.

진과좌마윤이 지휘하던 적의 대선 1척은 한산도로 겨우 도망쳐 부하 장졸과 함께 기어 올라갔다. 부하 수백명을 데리고 산에 오른 진과좌마윤의 배를 조선 수군이 불살라 버렸다. 진과좌마윤은 산 위에서 자기가 탔던 배에 불이 붙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는 통곡하고 할복자살했다. 부하 20여명도 진과좌마윤의 장렬한 죽음을 따라 배를 갈라 죽었다. 나머지는 혹시나 도망할 길이 있나 하고 캄캄한 밤중 수풀 속으로 도망쳤다.

협판좌병위 등 나머지 군사들은 한산도 바다의 귀신이 되고 말았다. 이 와중에 협판안치는 구사일생으로 살아서 도망쳤다. 자신이 지휘하던 안택선도 격침됐으나 재빨리 작은 병선으로 갈아타고 기회를 살려 부산 쪽으로 빠져나갔다. 적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한산도를 에워싸고 지켜달라는 이순신의 작전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원균 덕분이었다. 

1592년 7월 8일 3차 출전의 첫번째 싸움, ‘한산도 해전’의 결과는 대승이었다. 조선 연합함대와 맞붙은 왜적 함선 73척 가운데 대선 35척, 중선 17척, 소선 7척 등 총 59척이 분멸·격침당했고 나머지 대선 1척, 중선 7척, 소선 6척 등 14척이 본진인 부산 쪽으로 달아났다. 한산도 해전에서 왜적 수군이 입은 인명 피해 규모는 9000여명에 달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다음날 7월 9일 아침, 도망간 적병의 종적을 수색하던 조선 수군은 진과씨를 비롯, 20여명이 할복자살한 자리를 발견하고 이순신에게 보고했다. 이순신은 적군의 시체를 묻어 주고 축제문을 지어 그 충혼을 위로했다.

만약 한산도 해전에서 조선이 패했다면 어찌 됐을까. 왜적 수군은 대규모 함대의 세력으로 전라·충청·경기·황해의 연해를 차례로 점령한 뒤 조선의 제해권을 장악했을 것이다. 전라도마저 적의 수중에 들어간다. 이뿐만이 아니라 평양에 주둔하고 있는 소서행장, 종의지 등의 부대는 수군 10만명과 합세해 평양 이북으로 출병했을 게 분명하다. 

그렇다면 평안도 서북변을 마지막으로 석권했을 것이고, 의주까지 들이치는 건 일도 아니었다. 선조는 모든 조선을 내주고 압록강을 건너야 했을 테니, 그리 된다면 삼천리 우리 강산은 풍신수길의 손바닥에 들어가 회복할 길이 망연했을 것이다. 한산도 해전이 임진왜란 3대 대첩으로 꼽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다음호에 계속> 

이남석 더스쿠프 발행인
cvo@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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