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찰ㆍ열정ㆍ소통의 리더 이순신 40편
휘하 장수들 출전 회피하고
조정과 주변 협조 없던 상황
조선 수군 완승할 수 있었던 건
준비된 지도자의 전략전술 덕

# 이순신의 함대는 무적이었다. 왜군과 아홉차례 만나 모두 이겼다. 그럼에도 이순신은 왜군이든 패잔병이든 섬멸하는 과정을 신중하게 진행했다. 휘하 장수들이 “당장 공격하자”고 주장해도 움직이지 않았다. 육군과의 협조체계, 군졸의 피로 등 복합적인 변수를 감안한 결과였다.

# 당신의 리더는 어떤가. 실적에 쫓겨 성급한 결정을 내리진 않는가. 현재의 국가 지도자들은 또 어떨까. 먼 미래를 보고 나라의 방향을 결정하고 있을까.

승패는 지도자의 역량에 달려 있을 때가 많다.[사진=게티이미지뱅크]
승패는 지도자의 역량에 달려 있을 때가 많다.[사진=게티이미지뱅크]

안골포 해전에서의 승리로 왜군과의 전투에서 9전 9승을 기록한 이순신은 밤이 되자 전함대를 몰고 포구 밖 10리(1리=0.4㎞)쯤으로 물러나 휴식을 취했다. 7월 11일 새벽, 순신의 연합함대는 안골포로 다시 들어와 적의 종적을 살펴봤지만 부산 방면으로 야반도주한 왜적의 흔적만 남아있을 뿐이었다. 

순신은 안골포 지역의 백성들이 더 이상 왜적에게 부대낄 염려가 없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왜적의 정예함대를 상대로 전투를 벌였다는 점에서 추적의 끈을 놓을 수는 없었다. 순신은 함대를 몰고 안골포를 떠나 양산군 낙동강 어구의 김해부로 나오는 포구와 명지도(부산시 강서구 명지동), 감동포(부산시 북구 구포동)까지 수색작전을 펼쳤지만 적의 동태는 파악되지 않았다.

순신은 가덕도 외곽에서부터 동래의 몰운대 앞바다에 이르기까지 길게 진을 치며 위용을 과시하는 한편 혹시나 있을지 모르는 적을 정찰토록 탐망군을 내보냈다. 이날 오후 김해 금단곶 봉화대로 정찰을 나갔던 탐망군 경상우수영 수군 허수광許水光이 돌아와 보고를 했다. 

“봉화대 아래 암자에 있는 노승과 함께 봉우리에 올라가 연기를 피우면서 바라보니 낙동강 깊은 목 여기저기에 적함 100여척이 정박하고 있습니다. 노승의 말에 따르면 적선이 몰려온 지 11일이나 된다고 합니다.”

이 말을 들은 순신의 휘하 장수들은 당장 적선을 때려 부수자고 주장했다. 그럼에도 순신은 저녁때 함대를 가덕도 옆의 천성보로 이동시키고 여기서 오랫동안 진을 치고 있을 것처럼 연막을 피웠다. 적들이 함부로 준동하지 못하게 발을 묶어 놓기 위한 전략이었다. 그리곤 야간의 달빛을 이용해 한산도로 회군, 12일 오전에 도착했다.

순신이 휘하 장수들의 주장대로 당장 적함을 토벌하지 않고 함대를 돌린 까닭은 복합적이다. 우선, 왜적 수군이 조선 수군을 두려워하면서 싸우기보다는 도주를 선택할 공산이 컸기 때문이다. 또한 낙동강 지역 육지에서의 전투는 조선의 육군의 협공이 없으면 성과를 기대하기 어려울 것으로 판단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게다가 많은 군사가 여러 날 싸워 피곤할 뿐만 아니라 적의 탄환과 화살에 맞아 부상한 병력도 많았다. 무기와 화약은 물론 가장 중요한 군량미도 떨어져서 여수의 전라좌수영 말고는 달리 보충할 곳이 없었다. 8일간의 출정으로 남해 지역이 비어 있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는 문제였다.

육지에서는 왜적이 이미 금산을 점령한 데 이어 전주까지 범했다는 경보가 왔으니 잘못된다면 조선군의 근거를 잃어버릴 위험이 있었다. 만약 전라도까지 적의 수중에 들어간다면 순신의 수군도 발을 붙일 곳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순신이 류성룡에게 보낸 서간에 ‘무호남無湖南이면 무국가無國家’라고 쓴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산도에 도착하니 아직 왜적 패잔병들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순신은 원균에게 적의 토벌을 맡기고 7월 13일 여수로 도착했다. 제3차 출정에 나선 조선 수군은 한산도와 안골포에서 왜군의 수군 주력 함대를 연속 격파해 남해의 제해권을 장악했다.

이로써 전라도를 장악해 조선의 제해권을 잡으려던 풍신수길의 계획도 물거품이 됐다. 그 때문에 평양에 웅거하던 소서행장의 군사도 더 이상 전진을 못했다. 왜군이 반쪽 어깨를 잃어버린 셈이었다. 

후일 류성룡은 「징비록」에 순신의 역사적 쾌거를 이렇게 기록했다. “만일에 한산도 승첩이 없었다면 전라도ㆍ충청도 이북으로부터 경기도ㆍ황해도ㆍ평안도에 이르기까지 적군의 손바닥에 들어갔을 것이다. 아울러 명나라의 요동반도는 물론 천진, 산동 등지에도 왜적 수군이 횡행했을 게다. 그렇다면 형세가 매우 위태하게 전개됐을 것이다.” 

한산도와 안골포에서 연거푸 패한 소식을 보고받은 풍신수길은 분한 마음과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육상 전투에서는 일사천리로 평양까지 진군하며 ‘무적’을 과시했던 자신의 군사들이 바다에서는 순신의 함대를 만나 9번의 패배를 맞보는 ‘쪽박’ 신세가 됐기 때문이었다. 격노한 풍신수길은 연전연패의 원인을 알아오라고 엄명했다. 그에게 올라온 수군 장수들의 보고서에는 이런 변명 어린 분석이 담겨 있었다.

“병선의 다수多數로 보면, 아군의 함선이 조선 수군보다 3~4배 이상은 된다. 하지만 배가 취약해 이순신의 철갑귀선을 만나면 부딪혀 부서지기 일쑤다. 이순신이 사용하는 무기는 견고하고 편리할 뿐만 아니라 군사들도 굳세기 짝이 없어 조선의 육군과는 딴판이다. 용감히 싸워 물러나지 않고 죽기를 각오하고 있다. 게다가 이순신은 지리의 험이와 조수의 순역을 잘 알아서 그것을 교묘하게 이용한다. 그러므로 일본 수군으로서는 도저히 이순신의 모략을 대항해내기가 어렵다.”

보고서를 받아본 풍신수길은 조선에 건너가 있는 수군 장수들에게 명을 내렸다. “조선 수군이 싸움을 도발하더라도 응전하지 말고 부산포, 울산 장생포, 양산ㆍ김해ㆍ낙동강 지역에 깊숙하게 함대를 감추고 수세를 취하고만 있어라.” 조선 수군과 대적하지 말고 교두보를 지키는 데 전력하라는 명령이다. 

결국 이순신의 제3차 출정 이후 왜적 수군은 낙동강을 기준으로 서쪽으로는 진출을 포기한 채 부산과 쓰시마, 본토를 잇는 병참선을 유지하는 데 주력했다는 게 역사적인 평가다. 순신과 조선 수군이 옥포해전을 시작으로 안골포해전에 이르기까지 9전 9승의 기록을 거둔 배경을 살펴보자. 

이순신은 어떤 순간에도 서두르지 않았다.[사진=더스쿠프 포토]
이순신은 어떤 순간에도 서두르지 않았다.[사진=더스쿠프 포토]

사실 전쟁으로 인한 비상 동원체제에서 병력을 지탱하는 것만 해도 악전고투다. 당시 이순신은 자기 휘하 장수들 가운데 권준, 이순신, 어영담, 정운, 배홍립 등 일부를 제외하고는 출전을 회피하려 한다는 상황을 토로한 것도 기록으로 남아있다. 조정과 주변의 협조 또한 기대난망이었다. 그럼에도 조선 수군이 완승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은 배경은 무엇일까.  

적함보다 전투 경쟁력이 월등한 판옥선과 거북선이 있었고, 각종 총통 등 우월한 무기를 보유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순신의 탁월한 전략전술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이 모든 것은 준비된 지도자 또는 리더에서 비롯된다. <다음호에 계속> 

이남석 더스쿠프 발행인
cvo@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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