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정치사에 발을 맞춘 한국 문예지의 100년 역사 이승하(시인ㆍ중앙대 교수) *이 글을 쓰는 데 참고로 한 책은 아래와 같다. 애당초 발표했던 발제문에는 각주를 붙여 일일이 출처를 밝혔지만 각주를 달 수 없는 인터넷 환경이라 책명만 서두에 밝혀둔다. 김근수, 『한국잡지사연구』, 한국학연구소, 1992. 정진석 외, 『한국 잡지 100년』, 사단법인 한국잡지협회, 1995. 최덕교 편저, 『한국잡지백년』 1, 2, 3, 현암사, 2005(재판). 4. 암흑기의 대변인 『국민문학』과 『삼천리』 『인문평론』은 그마나 외국의 작품과 문
이순신은 물길과 뱃길에 밝은 어영담을 중용했습니다. 정박할 필요가 있지만 지리적으로 불리하다고 판단되면 주변에 탐망선을 깔아놓고 배 위에서 잠을 잤습니다. 이순신이 그만큼 지형 정보를 중요하게 여겼다는 겁니다. 이순신의 「난중일기」에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는 ‘…보고하기를’ ‘…들으니’ ‘…고 했습니다’ ‘…를 상세히 물으니’ 등입니다. 이순신은 정보에 관심을 놓지 않았습니다. 이순신은 병참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습니다. 로마군은 병참으로 이긴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순신 역시 병참을 중시했습니다. 군수물자를 확보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
왜군은 남해안의 한복판인 순천에서 오른쪽 끝인 울산까지 줄줄이 왜성을 지었습니다. 이러한 왜성의 흔적은 아직도 남해안 곳곳에 남아 있는데, 그중에서도 순천왜성이 가장 유명합니다. 고금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조선 수군 때문에 남해바다 서쪽에는 왜군이 드물었습니다. 하지만 동쪽은 여전히 왜군의 영향권이었습니다. 그래서 왜군은 남해 섬들의 윗길과 아랫길로 퇴군하려고 했습니다. 노량해전은 1598년 음력 11월 19일, 양력으로는 12월 16일이었습니다. 왜군은 겨울이 다가올수록 고향 생각이 간절해졌을 것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조선의 겨
「삼국지연의」에는 서촉을 정벌하던 방통이 적장 장임의 꾀에 넘어가 계곡에서 포위돼 죽는 장면이 나옵니다. 계곡에 들어선 방통은 ‘낙봉파落鳳坡’라는 글귀를 봤습니다. 그 순간, ‘아뿔싸! 내가 여기서 꾐에 빠져 죽겠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방통의 호는 봉추鳳雛였고, 낙봉파의 낙자는 떨어질 낙落자였기 때문입니다. 봉추가 떨어지는 곳이라는 지명을 보고 죽음을 예감한 겁니다. 이순신이 서거하신 관음포가 보이는 뒷산에 그분을 애도하기 위한 사당이 있습니다. 사당의 이름은 ‘이락사李落祠’입니다. 이충무공의 이李와 떨어질 락落을 합쳐서 만든 이
만약 임진왜란이 서양 국가끼리의 전쟁이었다면 어땠을까요? 승전국은 패전한 침략국에 거액의 배상을 요구했을 겁니다. 실제로 제1차 세계대전 후에 연합국은 독일에 엄청난 배상금을 물렸습니다. 그 액수와 조건이 어찌나 가혹했던지, 히틀러의 나치가 등장하는 원인이 됐습니다. 어쨌든 무장강도가 내 집에 침입해서 재산을 갈취한 뒤 ‘이제 돌아갈 테니 더이상 싸우지 말자’고 하는 말을 받아들일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당연히 이순신도 결사반대했습니다. 백성을 짓밟은 왜군을 결코 보내줄 수 없다고 강하게 주장했습니다. 처음에는 미온적이던 진린도 이
남해 관음포 : 조선의 별이 지다어제 복병장伏兵將 발포만호 소계남蘇季男과 당진포 만호 조효열趙孝悅 등은 왜의 중간 배 한 척이 군량을 가득 싣고 남해에서 바다를 건너는 것을 한산도 앞바다까지 추격했다. 왜적은 언덕을 따라 육지로 올라가 달아났고, 포획한 왜선과 군량은 명나라 군사에게 빼앗기고 빈손으로 와서 보고했다. -무술년 10월 17일, 「난중일기」 중 무술일기이순신이 남긴 마지막 일기입니다. 이충무공전서에 포함된 「난중일기」가 아니라 후손들이 보관해온 일기는 무술년 10월 12일에 끝납니다. 그 마지막 일기는 단 한 줄이었습니
한산도해전이 시작되자 이순신은 대여섯척의 판옥선을 내보냈습니다. 한니발이 전진배치했던 경무장 보병과 같은 역할이었지요.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해적 출신의 수군 명장이었습니다. 다섯척의 판옥선이 이순신의 유적계誘敵計, 이를테면 유인책일 가능성도 생각했을 것입니다.그러나 와키자카는 자신 있게 주력부대를 모두 이끌고 쫓아왔습니다. 이순신이 유인작전을 썼다 해도 충분히 조선 수군을 압도할 수 있다고 착각한 겁니다. 그의 함대도 작은 규모가 아니었으니까요. 대여섯척의 판옥선을 추격하던 일본 함대가 정신을 차려보니, 아뿔싸! 어느새 조선 함대에
통영시는 통제영이 있던 도시입니다. 통영시의 일부는 한때 충무시忠武市였습니다. 충무시의 충무는 충무공忠武公에서 왔습니다. 충무 김밥의 유래도 충무시입니다. 통영 충렬사는 충무공 이순신을 기리기 위해 선조 39년 1606년, 제7대 이운룡 통제사가 왕명을 받들어 창건했습니다. 현종 4년 1663년에는 남해 충렬사와 함께 사액사당이 됐습니다. 사액사당이란 임금이 ‘현판(額)을 내린(賜)’ 사당이라는 뜻입니다. 그 후 역대 수군통제사들이 매년 봄과 가을에 제사를 지냈습니다.통영 충렬사에는 유물 전시관이 부속돼 있습니다. 충렬사 유물 전시
공자의 가르침인 ‘효’는 시간이 지나면서 권위적이고 위선적인 억압으로 변질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순신은 달랐습니다. 그의 애틋한 효심과 가족애愛는 백성들과 부하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확장됐습니다. 「난중일기」나 「이충무공전서」에는 하루살이 같은 백성들의 삶을 걱정하고, 백성들을 괴롭히는 관리들을 단호하게 처벌하는 이순신의 모습들로 가득합니다. 그의 사랑은 군주와 국가를 향한 충성심으로도 이어졌습니다.어머니를 모시고 같이 한살을 더하게 되니, 이는 난리 중에서도 다행한 일이다. 늦게 군사 훈련과 전쟁 준비로 본영으로 돌아오는데, 비
태종 이후에 만들어진 거북선은 시대나 상황ㆍ지역에 따라 모양이나 성능이 조금씩 달랐습니다. 이런 이유로 거북선을 사진 찍듯이 완벽히 재현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물론 최대한 실물에 가깝게 복원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복원된 거북선은 당시의 기록대로 실제로 작동해야 하지 않을까요?이충무공 어머니 사시던 곳전남 여수의 ‘이순신 자당 기거지’는 ‘이충무공 어머니 사시던 곳’으로 공식 명칭이 바뀌었습니다.새벽에 아우 여필과 조카 봉, 맏아들 회가 와서 이야기했다. 다만 어머니를 떠나 남쪽에서 두번이나
1583년 11월, 이순신의 아버지 이정이 73세의 나이로 별세했습니다. 소식은 2개월 뒤인 1584년 1월 이순신에게 전해졌습니다. 이순신은 즉시 낙향해 3년상을 치렀습니다. 그의 나이 39세 때의 일입니다.아버지가 돌아가시고 15년 뒤 이순신의 어머니 초계 변씨는 1597년 4월 11일에 83세의 나이로 돌아가셨습니다. 이순신은 이 사실을 이틀 뒤인 4월 13일에 알게 됩니다. 전쟁 중이다 보니 3년상은 언감생심이었습니다. 일주일이 채 되기 전인 4월 19일에 이순신은 백의종군 길에 올라야 했습니다. 그의 나이 쉰셋이었습니다.이
이순신 장군의 발길 따라 전국을 누볐다. 그가 태어난 서울 충무로에서 세상을 떠난 남해 관음포까지. 꼬박 3년이 걸렸다. 긴 여정을 시작한 건 500년 시간을 뛰어넘어 이순신 장군으로부터 받은 ‘위안’ 때문이었다. 「이순신 여행」 저자 장정호의 여정을 따라가봤다. 그는 이순신 장군을 “소통에 능한 리더”라고 잘라 말했다. 더스쿠프(The SCOOP)가 「이순신 여행」 저자 장정호를 만났다. ✚ 이순신 장군에 관한 책을 쓰게 된 계기가 무엇인가요.“몇해 전 사업을 하다가 슬럼프에 빠졌습니다. 일은 잘 풀리지 않고, 주위 사람들과 뜻이
[CBS The Scoop] 서인 대관 몇 사람과 북당들 중에도 소위 유식계급이란 작자들은 말하기를 이순신을 잡아오기는 난문제가 아니라 하였다. 그는 순신의 충성만은 속마음으로 잘 아는 바였다. 왕명이라 하면 그는 두말없이 잡혀 올 것을 믿는 까닭이었다. 금부도사 10여인이 건장한 나졸을 많이 데리고 한산도에 들어온 것은 1월 25일이었다. 황신이 위유사로
순신은 함대를 좌우 양익으로 2부대를 갈라 가지고 가덕 천성을 거쳐 동래 땅 몰운대 등지를 나아가 수색하였으나 적선의 그림자도 없었다. 그 기방 사람들에게 물은즉 이곳저곳에 터를 잡고 있던 적의 수군들이 그동안 자기네의 함대가 연전연패하여 죽기가 바빴다는 소식을 듣고는 모두 겁을 집어먹고 부산 본영으로 달아났다고 고하였다. 이때에 경상우수사 원균과 남해현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