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찰ㆍ열정ㆍ소통의 리더 이순신 47편
“조선의 땅을 영토로 할양하겠다”
명나라 장사꾼 심유경의 제안에
굶주림에 시달리던 왜군 장수들
본국에 비밀 부쳐 부산ㆍ울산행
한양에 이어 진주성서도 학살극

1593년 4월 9일. 명나라 장사꾼 심유경은 왜군의 수장과 만났다. 그 자리에서 심유경은 “한양에서 물러간다면, 조선의 남삼도를 풍신수길의 영토로 할양하겠다”고 제안했다. 이 사실을 몰랐던 조선 조정은 애먼 결정만 내리고 있었다. 밀실 합의의 폐단을 극단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내년 총선을 앞두고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간다. 대부분 신당 창당 건이고 대부분 ‘밀실’에서 진행된다. 그들은 누굴 위한 정치를 하고 있는가. 

밀실 합의는 정보를 왜곡해 당사자를 제외한 이들에게 피해를 준다.[사진=게티이미지뱅크]
밀실 합의는 정보를 왜곡해 당사자를 제외한 이들에게 피해를 준다.[사진=게티이미지뱅크]

왜군은 갈수록 불리해졌다. 우선 군량미 부족으로 인한 굶주림이 심각했다. 병력도 왜란 초기에 비해 절반이나 줄었다. 해상에서 이순신 함대에 가로막히는 통에 무기 보급도 원활치 못했다. 그럼에도 조ㆍ명 연합군은 ‘건드리면 툭 터질 것만 같은’ 왜군을 좀 더 빨리 효율적으로 공략하지는 못했다. 전쟁에서 발을 빼고 싶었던 명나라는 내심 ‘강화회담’에 공을 들이는 입장이어서 조선의 요청을 제대로 들어주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왜군은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얻었다. 이순신의 조선 연합함대가 부산포에서 적선 100여척을 분멸시킨 임진년 9월 1일 바로 그날, 평양에서 50일간의 명ㆍ왜 휴전 합의를 주도했던 명나라 장사꾼 심유경이 7개월 만에 이번엔 한양에 나타났다. 왜군에게 한번 쓰라린 패배를 맛보고 평양으로 도망쳤다가 개성으로 복귀한 명나라 요동 제독 이여송이 무언가를 도모하려고 보낸 거였다.

1593년 계사년 4월 9일, 심유경은 왜군의 부전수가와 석전삼성을 만났다. 심유경은 “포로로 잡힌 조선의 두 왕자 일행을 풀어주고 한양에서도 물러간다면, 조선의 남삼도(경상도ㆍ전라도ㆍ충청도)를 풍신수길의 영토로 할양하겠다”는 제안을 했다. “얼씨구나, 이게 웬 떡인가!” 심각한 위기를 겪고 있던 왜군 장수들은 두말없이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일국의 영토를 타국에게 이전하는 게 심유경과 이여송이 제멋대로 결정할 문제는 아니었다. 그렇기에 이들은 조선 정부에 알리지도 않았고, 부전수가 등도 본국에는 비밀로 부쳤다. 결국 4월 19일 왜군은 한양에서 물러나 부산과 울산 방면으로 남하했다. 20일에는 이여송이 군사를 이끌고 한양으로 들어왔다. 권율의 부대도 이때 입성했다.

이런 상황을 눈치챈 류성룡은 이여송에게 이렇게 권했다. “왜군은 돌아가려는 마음이 바빠서 필연코 후방을 지키는 병사를 두지 아니하였을 겁니다. 급히 진격하면 소서행장과 부전수가를 사로잡을 수 있을 겁니다.” 대패 이후 왜군을 내심 두려워한 데다 강화교섭까지 주도한 이여송은 공격을 지시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이여백을 보냈는데, 그마저도 병이 났다며 전장에 나서지 않았다.

상황이 이쯤 되자 파주산성에서 서울로 입성한 권율은 선거이를 선봉으로 삼아 추격하려 했다. 그러나 이여송이 이를 방해했다. 유격장군 척금을 한강으로 보내 나룻배가 통행하지 못하도록 조치를 취했던 거다. 결국 선거이는 강을 건너지 못했고, 권율과 류성룡의 계책은 실행되지 못했다. 이때에 요동에 있는 경략사 송응창이 왜군이 한양에서 후퇴한 것을 알아채고 이여송에게 추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여송은 어쩔 수 없이 5월 2일 남진을 시작했다. 그는 조령을 넘어서면서 송응창에게 “왜군이 이미 멀리 이동해서 따라잡지 못했다”고 보고했다. 이에 따라 명나라에서 추격대를 새로 보냈다. 사천성四川省 총병 유정劉綎이 적을 따라 성주로, 오유충은 선산으로, 조승훈과 갈봉하는 거창으로, 낙상지와 왕필적은 경주로 이동했다. 이여송은 한양으로 되돌아왔다.

그 무렵 전라좌수영으로 돌아온 순신은 한달 만인 5월 7일, 조정의 출전 명령을 받고 전라우수사 이억기와 함께 강풍과 큰 파도를 뚫고 미조항과 사량진을 거쳐 8일 당포에 도착했다. 5월 9일엔 원균과 합류한 후 5월 말까지 한산도 주변에 머물면서 왜군의 동향을 파악하고 있었다. 

이 기간 중 선조는 순신에게 세번이나 “부산으로 가서 적을 무찌르라”라는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장마로 인해 항해를 할 수 없는 상황이 여러 날 이어졌다. 5월 중순부터 6월 중순까지 한달 동안 거센 비바람으로 조선 수군이 할 수 있는 일이란 별로 없었다. 고된 날의 연속이었다. 그러는 동안 순신과 원균의 껄끄러운 관계도 깊어만 갔다.

원균의 술주정을 극혐한 순신의 감정은 「난중일기」에도 기록돼 있다. 그런가 하면 원균은 뜬금없이 6월 10일 순신에게 공문을 보냈다. “11일 새벽에 적을 치자”는 내용이었다. 순신은 다음날 “아침에 출격하자“며 답장을 보냈다. 그런데 원균은 술에 취해 정신이 없다면서 아무런 답을 보내주지 않았다. 이같은 신경전으로 두 사람의 갈등은 깊어만 갔다. 

이런 가운데 6월 16일, 적선 500여척이 안골포ㆍ웅포ㆍ제포 등지로 들어왔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다음날에는 육지에서 아군 장수들이 진주성 쪽으로 들어가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진주성에 전운이 감돌고 있다는 신호다. 경상도 연안 각처로 내려온 왜군 장수들은 울산 서생포西生浦를 비롯해 동래 기장 좌수영ㆍ부산ㆍ양산ㆍ김해ㆍ웅천ㆍ거제ㆍ영등포까지 총 16곳의 주둔지에 성채를 쌓고 소굴을 만들었다. 

이때 풍신수길은 이런 명령을 내렸다. “일전에 진주성에서 군사 2만명이 김시민에게 참패를 당하면서 무사의 위신이 꺾였다 한 바 있다. 마침 제장들이 모였으니, 진주성만은 도륙하여 분을 풀어라.”

심유경의 밀실 합의 내용을 몰랐던 조선은 엉뚱한 명령만 내리고 있었다.[사진=더스쿠프 포토]
심유경의 밀실 합의 내용을 몰랐던 조선은 엉뚱한 명령만 내리고 있었다.[사진=더스쿠프 포토]

6월 22일 총대장 부전수가, 모리휘원의 지휘로 10여명 장수가 6만 대군을 거느리고 진주성을 포위하고 총공세에 나섰다. 진주성 안에는 용맹하기로는 유명한 충청병사 황진을 비롯해 진주우병사 최경회, 창의사倡義使 김천일, 진주목사 서예원, 김해부사 이종인李宗仁, 사천현감 장윤張潤, 복수장復讐將 고종후高從厚, 거제현령 김준민金俊民 등 여러 장수가 모여 있었다. 

군사는 2만명, 백성은 남녀노소 4만명이 있었고, 군량은 수만 석으로 넉넉했다. 왜군의 공격에 앞서 진주성 창의사 김천일은 대구에 주둔한 명나라 장수 유정에게 구원을 청했으나 관망만 했다. 이때 도원수 김명원, 순변사 이빈, 전라감사 권율, 방어사 선거이 등 여러 장군이 각각 군사를 거느리고 진주성을 돕기 위해 함안군에 진을 쳤다. 진주로 가는 길목을 막고 있었던 거다. 

하지만 적의 선봉 가등청정과 소서행장의 군사에게 패퇴하고 말았다. 달아나기를 잘하는 김명원이 맨 먼저 도망쳤고, 이빈도 날쌔게 사라졌다. 권율의 군사도 싸울 용기를 잃어버려 달아났다. 선거이는 제일 나중에 뒤를 담당해 싸우면서 물러나 강을 건너 의령 땅으로 퇴각했다. <다음호에 계속> 


이남석 더스쿠프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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