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찰·열정·소통의 리더 이순신 50편
왜군의 의도 간파한 이순신
어민 상대로 약탈 자행한 왜군
이순신이 가장 안전한 피난처
유민 위해 농장까지 만들어
착포량목서 왜 토벌작전 펼쳐

임진왜란 때 수많은 유민이 발생했다. 왜적의 노략질을 피해 떠도는 백성이었다. 이런 유민이 가장 안전하게 여긴 곳은 놀랍게도 ‘이순신 군영’이었다. 이순신이 유민을 위해 잠잘 곳뿐만 아니라 농장까지 만들어놨기 때문이다. 반면, 그때 선조를 따라다니는 유민은 아무도 없었다. 이 사례는 ‘자리’가 아닌 ‘마음’이 지도자를 만든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우리에겐 지금 국민을 진짜 위하는 마음을 지닌 리더가 있을까. 

가장 높은 자리에 있다고 국민의 신망을 받는 건 아니다.[사진=게티이미지뱅크] 
가장 높은 자리에 있다고 국민의 신망을 받는 건 아니다.[사진=게티이미지뱅크] 

선조가 돌아왔다는 소식에 백성들이 한양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먹을 식량이 없어 굶어죽는 사람도 날로 늘어나고 있었다. 선조는 붓을 들어 “近日飢民 無術可濟 予仰天憫歎 欲先死而不得(요즘 굶어 죽는 백성을 구제할 방법이 없으니 내가 하늘을 우러러 탄식해 먼저 죽고자 해도 그럴 수가 없구나!)”라고 썼다. 진심이든 아니든, 측은하고 부끄러운 마음은 있었던 모양이다. 

선조는 음식을 줄이고 그것으로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는 데에 보태라는 지시도 내렸다. 이 무렵, 이순신은 그동안 비축해 놓았던 쌀·소금·해물을 한양으로 실어 올려 보냈다. 함께 올린 장계에는 이런 구절이 쓰여 있었다.

“신하 된 정에 근심을 이기지 못해 별도로 보관했던 군량을 배에 실어 기타 잡물과 생선, 소금 약간과 같이 올려 보냅니다.” 선조 이하의 조정대관들이 공담공론으로 쓸데없는 당파싸움을 하면서도 입에 풀칠을 할 수 있었던 것도 이순신 덕분이었다. 

이순신이 명·왜의 강화교섭과는 상관없이 한산도에서 군량확보, 병력충원, 전선건조, 무기제작, 전술훈련 등을 동시다발적으로 진행한 이유는 단 한가지였다. ‘왜적은 조선과의 전쟁을 중단할 의사가 없는, 절대로 믿어서는 안 될 존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강화교섭이 진행되면서 명군의 경우 3만여명이 조선에서 철수한 반면, 4만여명의 왜적은 울산·부산·양산·김해·웅천 등 여러 고을 항만에 근거지를 만들고 전투선을 깊은 포구 안에 숨겨놓고 있었다. 그리고는 달밤이나 안개 낀 날 재빠른 함선 수십척씩 몰고다니며 한산도 인근 어민들을 대상으로 약탈을 자행했다. 이 소식을 듣고 이순신은 비밀리에 착포량목을 흙으로 막아 육지와 연결해 놓도록 했다. 적의 통로를 차단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착포량목은 만조시가 되면 중·소선 정도는 통행할 수 있었던 운하지대였다. 아니나 다를까. 적의 소함대 20여 척이 10월 달밤 조수를 이용해 조선군이 지키는 견내량목을 넘어 착포량목으로 이동했다. 이들을 소탕하기 위해 기다리던 조선 수군은 왜선들이 견내량을 지나치게 놓아뒀다가 착포량목 부근에서 뒤를 엄습했다. 

불의의 습격을 당한 적군은 착포량목까지 도망쳤지만 웬걸, 물길이 막혀 있는 게 아닌가. 형세가 궁박해지자 적군들은 막힌 곳을 파고 달아나려 애를 썼다. 배를 버리고 육지로 도망치려는 이들도 있었다. 이순신의 제장들은 적의 함선과 병력 절반 이상을 격파하고 무찔렀다. 작은 토벌작전에서조차 이순신 특유의 주도면밀함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후 이순신은 군사를 지휘해 착포량목에 판교를 놓아 백성의 통행을 편하게 하고 또 착량과 마주보는 해안인 해평海坪평야에 농장을 신설해 유민을 자리잡게 했다. 해평평야는 그렇게 크지는 않지만 지세가 평탄하고 토질이 비옥했다. 이 평야에 관개사업을 개시해 미륵산彌勒山 용동수龍洞水를 끌어와 유민에게 농사를 짓게 했다. 대개 유민이란 임란 당시에 피난해 다니는 수천 가구의 백성들이었다. 

이들에겐 백전백승하는 이순신 부대를 따라다니는 게 천하에서 제일 안전한 피난처였다. 그만큼 왜적과 도적이 천하에 가득해 심산유곡이라도 아니 간 곳이 없었다. 각처에 떠도는 백성들은 이 안전지구(이순신 진영)로 모여들었다. 이순신은 때로는 백성들을 괴롭히는 도적들도 잡아다 처형하기도 했다. 

초창기엔 식량이 부족했지만 농사를 지은 뒤엔 어느 정도 자급자족의 풍족감을 느낄 수 있었다고 한다. 그 때문에 순신이 유진한 곳곳의 마을에 생기가 돌았다. 순신은 한산도로 모여든 유민 중 상당수를 해평농장으로 옮겨가게 하고, 군관 중에서 농사 감독을 정해 백성의 편익을 돌보게 했다. 이렇게 한산도는 1594년 갑오년을 맞이했다.  

갑오년의 상황은 계사년보다 더 악화했다. 연초부터 전염병의 피해가 조선의 병사와 백성들에게 확산했다. 이순신의 조선 수군 병력 가운데 많은 인원도 전염병으로 쓰러졌다. 왜군은 상황이 더 안 좋았다. 군량부족, 전염병, 강추위라는 3중고를 겪었다.

더 큰 문제는 전황이 갈수록 불리해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명나라는 원정군을 보내 조선에게 명분은 지켰으니 추가 손실을 피하고자 어떻게든 발을 빼보려고 하는 입장이었다. 이런 기류가 맞아떨어지면서 급기야는 황당한 조작극이 벌어지기도 했다. 

갑오년 1월 20일, 명나라 병부상서 석성의 심복인 심유경과 왜적의 제1군 사령관 소서행장이 비밀리에 웅천 왜성에서 만나 풍신수길의 가짜 항복문서를 작성한 것이다. 사실이라면 왜적의 강경한 전쟁론자인 소서행장이 강화론자로 변신한 셈이 되는데, 그 해답은 3년이 흐른 1597년에 벌어진 정유재란에서 찾아볼 수 있다. 

당시 왜적은 이순신의 존재와 명나라의 참전으로 조선 정복이 불가능할 것으로 판단해 후일을 도모하기 위한 재정비 시간이 필요했던 것뿐이었다. 명나라의 석성과 심유경의 무리가 ‘뛰는 놈’이었다면, 풍신수길과 소서행장 무리는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었던 셈이다. 통찰의 이순신이 안간힘을 쓰며 끊임없이 대비를 해야 했던 까닭이기도 하다. 

가짜 항복문서 사건으로 명나라가 더 이상 왜군과의 전쟁에 의지가 없다고 판단한 선조는 초조하고 조급한 마음에 뚜껑이 열릴 지경이었다. 이때 이순신은 격무에 시달린 나머지 엄청난 기세로 퍼지고 있는 전염병을 피하지는 못했다. 1월 중순부터 병에 시달리기 시작했지만 그래도 행영업무와 함선점검, 활쏘기는 게을리하지 않았다. 병세는 당항포 왜적소탕을 마친 후 한참 지난 뒤인 5월부터 호전됐다.  

조선의 유민은 이순신 군영으로 모여들었다.[사진=더스쿠프 포토]
조선의 유민은 이순신 군영으로 모여들었다.[사진=더스쿠프 포토]

가짜 항복문서 사건이 벌어진 후 열흘이 지난 1594년 2월 1일, 청주의 겸사복 이상李祥이 선조의 명령서를 들고 이순신을 찾아왔다. “그대는 3도의 수군을 합해 적을 섬멸하라.” 2월 12일, 이번엔 선전관 송경령宋慶苓이 적도로 나가 있는 이순신을 만나러 왔다. 수군을 살펴볼 일로 찾아오겠다며 방문한 선전관은 순신에게 왕명서가 담긴 유지 2통과 비밀문서 1통을 내밀었다. 

「난중일기」에 따르면 유지 1통에는 “명나라 군사 10만명과 은 300냥이 온다”라고 쓰여 있었고, 또 다른 1통에는 “흉악한 왜적들의 뜻이 호남지방에 있으니 온 힘을 다해 막고 형세를 보아 무찌르라”는 명령이 담겨 있었다. 비밀문서는 “경이 바다 위에서 해를 넘기며 나라 위해 수고함을 내 항상 잊지 않노라. 공을 세운 장병 중 아직 상을 받지 못한 자를 알리도록 하라”는 내용이었다. <다음호에 계속> 

이남석 더스쿠프 발행인
cvo@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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