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찰ㆍ열정ㆍ소통의 리더 이순신 44편
이억기 함대 늦게 도착하자
원균이 과하게 화내며 비판
이 사실 조정에 왜곡 전달돼
리더는 언행 가볍게 해선 안 돼

조선이 요청한 지원군의 제독은 ‘이여송’이란 인물이었다. 그는 몇번의 전쟁에서 왜군을 상대로 승리하자 행동을 가벼이 했다. 하지만 그런 가벼움 뒤에선 위기가 싹트고 있었다. 이여송은 왜군의 전략에 걸려들어 대패하고 말았다. 언행이 가벼운 지도자는 십중팔구 실패한다. 지도자라면 말 한마디에도 무게를 실을 줄 알아야 한다. 총선을 앞두고 국내 정치권에서 저급한 말들이 난무한다. 그들은 정말 지도자급일까. 

리더는 말 한마디에도 무게를 실을 줄 알아야 한다.[사진=게티이미지뱅크]
리더는 말 한마디에도 무게를 실을 줄 알아야 한다.[사진=게티이미지뱅크]

명나라 영하 지역 푸베이(몽골 장수)의 반란은 6개월 만인 1592년 9월 17일에 진압됐다. 진압에 나섰던 이여송은 조선이 요청한 지원군의 제독으로 임명됐다. 지원군의 본진은 그해 12월 25일 압록강을 건너왔다. 도강한 병력 규모는 당초 명나라가 장담했던 10만명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4만여명에 그쳤다. 12월 11일 선발대로 도강한 병력까지 합쳐봤자 4만3000여명이었다. 

이여송이 평안남도 안주성에 이르렀을 때 류성룡이 접빈사로 이여송을 만났다. 류성룡이 소매 속에서 평양 지도를 꺼내들자 이여송은 이렇게 말했다. “염려할 것 없소. 우리에게는 무서운 대포가 있소. 사정거리가 5~6리(1리=0.4㎞)는 되니 적이 감당할 수 없을 것이오.” 그는 류성룡과 작별하면서 부채에 시를 한수 적어줄 정도로 여유만만한 모습을 보였다.

조선의 달력이 임진년에서 1593년 계사년으로 넘어가는 동안 조ㆍ명 연합군이 편성됐다. 연합군은 1월 6일 왜군의 소서행장 무리가 주둔하고 있는 평양성을 공격했다. 이른바 ‘평양성 수복 전투’였다. 

3일간의 치열한 공방으로 양측 모두 엄청난 인명 손실을 입었다. 사명당을 비롯한 승병들이 가세한 데 힘입어 전세는 아군 쪽으로 기울어졌다. 명의 지원군은 대포를 쏘아대며 독연毒煙을 피워 소서행장의 군사를 격퇴했다.

수세에 몰린 소서행장은 마침내 1월 9일 평양성을 포기했다. 패잔병과 인근 지역 장졸들을 규합해 개성을 거쳐 한양으로 후퇴했다. 이렇게 평양성은 함락된 지 7개월 만에 수복됐다. 이여송은 평양성을 탈환한 여세를 몰아 1월 25일 개성까지 수복했다. 

평양의 패전 소식에 왜군 총대장은 각 지역으로 흩어져 있는 장수들을 한양으로 불러들였다. 마전에 주둔한 장종아부원친, 광주에 주둔한 호전씨번, 영평의 도진의홍, 춘천의 도진충풍, 삭녕의 이동우병, 삼척의 모리승신, 함흥의 과도직무, 안변의 가등청정의 무리가 한양으로 모여들었다. 소서행장의 병력들도 1월 24일 한양에 도착했다. 이날 왜적들은 한양 백성을 대상으로 대규모 학살을 자행했다. 

소서행장은 평양에서 명군이 간계를 부려 부하들을 죽이고 전략적 정보마저 낚아채 갔다며 복수심에 불타 있었다. 이는 모두 조선인 때문이며, 추후 이들이 조ㆍ명 연합군과 내통하게 둘 수 없다는 핑계를 댔다. 

하루 동안 백성 10만여명이 죽었고, 그들의 가옥 절반 이상이 불에 탔다. 민간인을 대상으로 이처럼 잔인한 전쟁범죄를 남긴 채 왜군은 한양에서 두가지 문제를 놓고 회의를 열었다. 추격하는 명군과 정면대응할 것인가, 앉아서 한양을 사수할 것인가. 결국 왜군은 한양으로 통하는 중로에서 조ㆍ명 연합군과 맞싸우기로 했다.

쫓아가던 명군 역시 두가지로 주장이 갈렸다. 부총병 사대수는 평양 승전의 여세를 몰아가자는 ‘급격물실론急擊勿失論’을 앞세웠다. 곧바로 한양으로 쳐들어가자는 얘기다. 반면 전세정은 ‘궁구물박론窮寇勿迫論’을 펼쳤다. 8개 지역으로 흩어져 있던 왜군이 한양에 집결했으니 서서히 전진하면서 격퇴하자는 거였다. 

이런 가운데 “왜군이 명군의 진격 소식에 놀라서 절반이나 도망갔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왜군의 계책이었다. 이여송은 몸소 선봉에 나서 대군을 이끌고 빠른 속도로 진격, 26일 석양을 바라보며 파주 동파역에 도달했다.

이튿날 조선의 장수 고언백이 부하 300명을 거느리고 추격에 합류했고, 사대수의 기마병 800명이 뒤를 따라갔다. 사대수의 군사는 한양 인근의 벽제관을 지나 박석薄石 고개와 혜음惠陰 고개 사이에서 왜군 정찰대와 맞붙어 100여급을 베고 이를 보고했다.

보고를 받은 이여송은 경적지심輕敵之心(적을 가벼이 보는 마음)이 생겼다. 즉시 자신의 기병대 1000여명을 몰아 질풍처럼 혜음령을 넘어 박석고개가 보이는 곳까지 내달렸다. 이를 발견한 왜군은 달아나는 듯한 모양새를 취했다. 이여송은 ‘평양에서 명군이 승전한 뒤 한양의 적병이 자꾸 달아난다’는 풍설을 믿고 적의 형세를 염탐하지 않은 채 군을 좌우로 나눠 박석고개 위로 올려 보냈다.

그런데 고개 너머엔 1만8000여명의 왜군이 긴 칼을 번득이며 고함을 치고 있었다. 불시에 대군을 맞은 이여송은 겁이 덜컥 났지만 싸우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매복에 걸려 병사 절반 이상을 잃은 이여송은 말머리를 돌려 달아났다. 결국 조ㆍ명 연합군은 1월 27일 벽제관 전투에서 패퇴했고, 이여송은 더 이상의 전투를 포기하고 후퇴를 거듭하면서 평양성으로 퇴각하고 말았다.  

이때 의주의 선조 일행은 평양성 수복 소식에 한껏 들떠 있었다. 그래서 육지와 해상의 전투를 적극 독려했다. 선조는 이순신에게 출전을 독려하는 장계를 3번이나 보냈다. “그대는 퇴각하는 왜군의 귀로歸路를 차단하고 해전을 통해 왜적을 무찔러 단 1척도 돌아가지 못하게 하라.”

또 평양성에 틀어박혀 꼼짝할 기미를 보이지 않는 이여송에게 “빨리 행군해 한성도 회복시켜 달라”고 계속 요청했다. 하지만 전혀 먹혀들지 않아 조선 조정의 요구는 단지 ‘희망사항’으로만 남았다.

당시 명군은 벽제관 전투에서 상당한 타격을 받은 데다, 특히 1월 말엔 말 1만2000여필이 병사하는 바람에 전투에 나설 동력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렇다고 조선이 자력으로 전쟁을 이어갈 수도 없는 형편이었다. 군량과 병력 수급 문제에 전염병까지 창궐하는 등 난관에 봉착했기 때문이다. 특히 당시의 전염병은 조선군뿐만 아니라 명군과 왜군에도 큰 골칫거리였다.

명나라 장수 이여송은 오만함이 하늘을 찔렀다.[사진=더스쿠프 포토]
명나라 장수 이여송은 오만함이 하늘을 찔렀다.[사진=더스쿠프 포토]

그 무렵, 선조의 거듭된 출정명령서를 받은 이순신은 전라우수사의 이억기와 경상우수사 원균에게 연락을 넣어 2월 7일 견내량에서 집결하기로 했다. 이순신의 전라좌수영 함대는 전날 여수에서 출발해 사량도에서 하룻밤을 묵고 다음날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경상우수사 원균이 제일 먼저 도착해 있었다. 해남에서 출발한 이억기의 함대는 다음날 정오에 도착했다.

원균은 이억기가 늦게 도착했다며 불같이 화를 내며 비판했다. 좀 과한 부분이 있었다. 원균의 본영에서 견내량까지는 노를 저어가는 시간을 기준으로 몇시간밖에 걸리지 않는다. 같은 기준으로 이순신 함대는 36시간, 이억기 함대는 나흘이 걸린다. 이 같은 사정을 감안하면 원균이 분노할 정도는 아니었다. 문제는 이같은 사례가 조정에 왜곡 전달되면서 ‘가짜 여론’이 만들어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다음호에 계속> 

이남석 더스쿠프 발행인
cvo@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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