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찰ㆍ열정ㆍ소통의 리더 이순신 43편
부하 섬기는 서브 리더십 덕에
장졸들도 해전서 연전연승 기록
이순신이 제해권 장악 못했다면
왜적 수군은 조선 임금 잡았을 것

1592년 9월 1일. 명나라와 왜나라가 ‘휴전’에 합의했다. 명나라든 왜나라든 전열을 정비할 필요가 있었다. 아쉽게도 이 합의 과정에 ‘조선’은 없었다. 요즘 말로 패싱을 당한 셈이었다. 가정이긴 하지만, 이순신의 선전이 없었다면 조선의 미래는 장담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조선의 조정은 순신을 두고 분열하기 바빴다. 그때나 지금이나 높으신 양반들은 ‘분열’이 습관인 듯하다.

우리나라 권력층이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힘을 모은 적 있을까.[사진=게티이미지뱅크]
우리나라 권력층이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힘을 모은 적 있을까.[사진=게티이미지뱅크]

이순신은 부산포해전의 승전 보고서를 조정에 올리면서 별도의 장계를 올렸다. 전사한 녹도만호 정운을 이대원李大源의 사당에 함께 모셔달라는 청을 담은 장계였다. 그 결과, 전남 고흥군 녹동의 쌍충사 사당에는 이대원과 정운이 배향돼 있다. 조선 중기 장수인 이대원은 임진왜란 5년 전인 1587년 남해안에 침입한 왜구를 물리치는 공을 세웠다. 

이를 통해선 순신의 남다른 ‘서브 리더십’을 읽을 수 있다. 순신은 휘하 장졸을 섬기는 마음으로 상호 존중과 신뢰, 소통을 이어가며 리더로서 책임감을 발휘했다. 그의 장졸들이 해전에서 연전연승을 기록할 수 있었던 배경도 여기에 있다. 

1592년 9월 1일. 순신이 부산 바다에서 왜군 함선 100여척을 격파하고 있을 때 평양에선 명나라와 왜나라가 거래 하나를 이뤄냈다. 명나라 심유경과 왜나라 소서행장이 이날부터 10월 20일까지 50일 동안 서로 싸우지 말자는 내용으로 휴전을 합의했다. 

합의가 이뤄지던 당시 평양의 전후사정을 살펴보자. 조선에서 임진왜란이 터졌을 때 명나라는 내란을 겪고 있었다. 재정도 어려운 형편이었다. 그래서 조선의 줄기찬 지원군 요청은 꽤나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대의명분을 지키지 않을 도리가 없었던 명나라는 예의상 마지못해 6월 19일 요동부총병 조승훈에게 병사 1300여명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도록 했다. 이어 3000명의 추가병력을 의주로 보냈다. 이를 계기로 평양을 떠나 의주에 머물고 있던 임금 선조는 더 이상 피란길에 오르지 않고 의주에 눌러앉았다.

조선 땅에 도착한 조승훈은 그를 맞이하던 류성룡에게 뜬금없이 이렇게 물었다. “평양성에 왜군이 아직 있습니까? 없습니까?” 명나라 군사가 압록강만 건너면 왜군이 겁을 먹고 달아날 줄로 알았던 것이었다. “평양성에 왜군이 아직 있다”는 류성룡의 대답에 조승훈은 7월 17일 군사를 재촉해 평양성 보통문으로 쳐들어갔다. 적막이 흘렀다. 명나라 군사들이 더 나아가 대동관으로 진입하자마자 길가 좌우 담벼락 사이로 무수한 조총 탄환이 쏟아졌다.

아뿔사! 때는 이미 늦었다. 간신히 성을 빠져나오긴 했지만 평양성으로 진군한 명나라 병사들 절반이 죽었다. 선봉장인 사유史儒까지 총알을 맞고 낙마해 생을 마감했다. 조승훈은 패잔병을 거둬서 염치없이 요동으로 되돌아갔다. 조승훈은 거칠고 경솔하기 짝이 없는 장수였기에 무수히 많은 휘하 장졸들을 죽음으로 몰아갔다. 

8월 1일. 평안도 관찰사 이원익은 평양성을 수복하기 위해 순변사 이빈과 힘을 합쳐 평양성 북쪽까지 쳐들어갔다. 때마침 만난 소서행장의 척후병 20여명을 죽이고 의기를 올려 평양성 코앞까지 다가갔다. 그러자 평양성에 주둔하던 왜군 본진의 병력이 몰려나왔다. 이를 보고 이원익과 이빈은 어찌나 겁을 먹었는지 군사를 버리고 달아났다. 버려진 군사들은 왜군에 의해 모두 쓰러졌다. 이어 평양 북쪽에서 벌어진 8월 15일의 순안전투에서는 조선군이 왜군의 북상을 저지하는 의미있는 승리를 거두기도 했다. 


이 무렵, 명나라 병부상서 석성石星이 왜군과의 화친을 꾀하고 있었다. 그는 가능한 한 군사를 움직이지 않고 수완을 발휘해 왜군을 조선에서 물러가도록 만들고 싶어 했다.

이때 명나라의 장사꾼 심유경沈惟敬이 완장을 차기를 자처했다. 그는 석상에게 자신이 왜나라에 다녀온 적도 있고, 그곳 사정을 잘 알고 있기에 세치 혀로 능히 왜군을 물리칠 수 있다고 장담했다. 심유경은 한발 더 나아가 병부상서의 비위를 맞춰가며 유격장군이란 관작을 받은 후 호위병 약간명을 대동하고 조선으로 건너왔다. 

선조를 만난 심유경은 마치 친구를 대하는 듯 오만하게 굴었다. 조선의 고위 관료를 대할 때에는 마치 부하를 다루듯 거만하고 무례했다. 최흥원 등이 “어떻게 적병을 물리치려 하오?”라고 물으면 그는 손으로 자기의 가슴을 가리키며 “이 흉중에 계책이 있으니 너희들은 알 바 아니다”는 태도를 보였다.

심유경은 조선이 의미있는 승리를 거둔 평양 북쪽의 순안 땅에 이르러 소서행장에게 만나자는 내용의 서신을 보냈다. 왜군의 선봉 제1군 대장 소서행장도 만남에 동의했다. 당시 소서행장이 이끄는 제1군의 군량미는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게다가 본국으로부터의 보급도 여의치 않았다. 순신이 바다에서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민간에서 식량을 약탈해 보충하다 보니 되레 조선 백성의 의병항쟁을 부추기고 있었다. 

문제는 또 있었다. 소서행장이 이끄는 병력 대부분은 조선의 남부지역보다 따뜻한 규슈 출신들이었다. 조선의 북쪽 날씨는 음력 9월이면 이미 겨울과 다를 바 없다. 소서행장의 입장에서는 별도리가 없었다. 

이렇게 명나라와 왜나라는 조선을 빼놓고 자기네들끼리 휴전하기로 합의했다. 그러면서도 왜군은 호남지역을 또다시 넘봤다. 부산포해전에서 대패한 왜군은 10월에 호남으로 넘어갈 수 있는 관문인 진주성을 공격했다. 하지만 진주성 성주 김시민과 주민들은 끈질기게 저항하면서 성을 지켜냈다. 이때 김시민은 전사했지만 왜군의 호남진출 재도전을 막아냈다.   

부산포해전과 진주성대첩 이후 전쟁은 소강상태로 빠져들었다. 왜적의 해상 보급이 끊어진 영향이 가장 컸다. 적의 육군은 더 이상 예전과 같은 속도전을 펼칠 수 없었다.

이순신의 활약이 없었다면 조선은 무너졌을 가능성이 높다.[사진=더스쿠프 포토]
이순신의 활약이 없었다면 조선은 무너졌을 가능성이 높다.[사진=더스쿠프 포토]

세상에 만약이란 게 없다지만, 만약 순신이 제해권을 장악하지 못했다면 어땠을까. 왜적 수군은 서해 바다를 거쳐 한강을 타고 한양으로, 예성강을 타고 개성으로, 대동강을 거슬러 평양으로의 군대 충원과 보급이 가능했을 것이다. 왜군은 압록강을 타고 들어가 의주에 있는 선조가 명나라로 도망가는 길을 막았을 것이고 조선의 임금을 사로잡았을 것이다.

이렇게 됐다면 우리나라의 역사와 지도는 지구상에서 사라졌을 것이다. 우리 국민 모두 그 존재도, 그 이름도 없어졌을 것이다. 순신 혼자 해낸 일은 우리가 아는 것보다 훨씬 더 의미가 있다. 그런 순신을 조선 조정이 동인이니 서인이니 따지면서 인정하지 않은 건 역사적 아이러니다. <다음호에 계속> 

이남석 더스쿠프 발행인
cvo@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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