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찰ㆍ열정ㆍ소통의 리더 이순신 46편
세상 이끄는 건 소수 권력자 아닌
다양한 곳에서 발휘하는 리더십
그런 이들 많아야 위기 극복 가능
우리나라 곳곳엔 그런 리더 있나

권율은 행주산성에서 승전보를 올렸다. 이순신은 부산 바다에서 연일 승리하고 있었다. 그 덕분에 의주로 도망쳤던 선조는 평양으로 다시 내려왔다. 이처럼 세상을 이끄는 건 몇몇 소수의 권력자가 아니다. 다양한 곳에서 다양한 리더십을 발휘하는 사람들이 많아야 세상을 리드하고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 우리나라 곳곳엔 그런 리더들이 있는가. 

위기를 극복하는 원동력은 다양성에서 나오기 마련이다.[사진=게티이미지뱅크]
위기를 극복하는 원동력은 다양성에서 나오기 마련이다.[사진=게티이미지뱅크]

권율이 진을 치고 있는 행주산성에는 전라도 군사 7000명, 방어사 조경이 거느린 군사 3000명, 전라도 처영의 승군 1000명, 행주산성 부근의 민병 1000명 등 총 1만2000여명이 주둔하고 있었다. 

행주산성의 남쪽은 한강을 바라보는 절벽지대이고, 동쪽과 북쪽은 평야였지만 역시 절벽이었다. 서쪽으로는 산이 크지 않지만 협곡이 많아 군사를 감춰놓아도 알아보기 힘들다. 한양 인근에서 왜군과 사투死鬪를 벌이기에는 이만한 곳도 없었다. 게다가 물러나도 피신할 배가 한척도 없는 형편이었다. 

1593년 계사년 2월 12일 아침, 왜군이 몰려오고 있다는 척후병의 보고가 들어왔다. 권율은 군사들에게 3번 먹을 밥을 싸주게 하고 몸소 군사들이 배치된 곳을 순회하면서 장졸들을 격려했다. “오늘은 적병을 다 죽이거나, 우리가 다 죽거나 할 날이다. 이 세 덩어리 밥을 다 먹고도 적을 격파하지 못하면 다시는 밥을 먹을 수 없을 것이다.”

권율은 의승장 처영에게 승군 1000명과 함께 서쪽의 관문을 막게 했다. 또 휘하의 조경 등 여러 장수에게도 구역을 할당해 지키게 했다. 부녀자와 아동들에게까지 돌멩이를 주워 나르게 했고, 가마솥에 물을 끓이게도 했다.

이윽고 적군의 선봉에 이어 2만 대군이 몰려와 함성을 지르며 행주산성을 에워쌌다. 왜군이 산성 밑으로 바짝 다가오자, 그때를 기다렸던 권율은 칼을 빼어들고 군사에게 호령했다. “지금이다. 싸우자!” 목책과 흙구덩이 속에 숨어있던 군사들이 일제히 신기전, 비격진천뢰 등의 화기와 화살로 대응했다.  

적은 수없이 쓰러졌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후속부대를 계속 내보내 죽을힘을 다해 공격에 나섰다. 일부는 목책 부근까지 접근하는 데 성공했지만, 쏟아지는 열탕과 돌멩이에 비명을 지르며 나뒹굴었다. 석양이 내리는 행주산성 앞에 고인 피가 냇물을 이룰 지경이었다. 


어느덧 아군의 군사들은 반이나 죽고 화살도 바닥이 났다. 돌멩이를 나르는 부녀자들의 손은 피로 물들었다. 적도 병력을 절반가량 잃었지만 공세를 멈추지 않아 행주산성은 위태로운 상황이 됐다. 이때 이순신의 조방장이던 충청수사 정걸과 경기도 수군이 물자를 싣고 왔다. 한강을 이용해 산성 절벽 밑으로 들어와 화살과 군량을 풀었다. 이렇게 지원된 화살에 힘입어 권율은 행주산성을 지켰고, 적은 퇴각했다. 

행주대첩 이후 권율은 군사를 파주산성으로 옮기는 한편 백성들에게 멀리 피신하도록 조치했다. 한편으로는 싸움에 지친 장졸들에게 휴식을 제공하고 다른 한편으론 적의 재공격을 대비해야 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소서행장, 가등청정 등 두 장수를 앞세운 왜군 2만5000명이 행주산성으로 다시 쳐들어왔다. 하지만 성안은 텅텅 비어있었다. 헛걸음한 왜군은 산성에 불을 놓고 하릴없이 돌아갔다. 의주에 머물던 선조 일행은 1월 9일 평양성이 회복된 데 이어 2월 12일 육지에서는 권율의 행주대첩, 바다에서는 이순신의 웅천공격이라는 긍정적인 승리에 힘입어 3월 23일 평양으로 남하했다.

그 무렵, 조선 연합함대는 전투가 소강상태에 빠져든 3월 6일 이후 속절없이 경상도 웅천 해역에서 머물러야 했다. 순신은 고민에 빠졌다. 적을 5차례나 공격하면서 군량미와 화약은 물론 병사들의 체력도 고갈 직전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와중에 모내기 철이 다가오고 있어 대부분이 농민인 수군에게 농사지을 때를 놓치게 할 수는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순신은 4월 3일 연합함대를 각자의 본영으로 돌아가도록 하는 결단을 내려야 했다.  

당시 조선 전역은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고 있었다. 장기간 계속된 전쟁으로 인한 흉년과 약탈로 굶어 죽는 백성들이 속출했다. 여기에 전염병까지 발생해 고통을 가중시켰다. 민간뿐만 아니라 전쟁을 치르는 아군, 왜군, 명군도 전염병을 피해 가지는 못했다. 

조선에 상륙한 왜군은 15만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 가운데 절반이 전쟁과 전염병으로 죽어나갔다. 이에 따라 당시 한양에 집결했던 왜군 규모는 5만여명 수준이었다. 이들이 가장 힘겹게 여겼던 문제는 조ㆍ명 연합군이 아닌 군량미 부족이었다. 

이유가 있었다. 1월 말 벽제관 전투 이후 이여송의 아우 이여매와 부총병 사수대의 군사들이 밤중에 용산창龍山倉을 습격해 왜군의 군량미를 모두 불태워 버렸다. 경상도 연해의 군량선마저 순신에 의해 불탔다. 

낭패를 당한 왜군 제장들은 대책회의에서 서로 주장이 엇갈려 언성을 높이는 일이 잦아졌다. 석전삼성(이시다 미쓰나리), 증전장성(마시다 나가모리) 등 ‘삼봉행三奉行’으로 일컬어지는 영향력 있는 장수들은 “군량이 오지 못하니 부산 방면으로 가는 수밖에 별도리가 없다”고 우겼다.

이순신은 전쟁 와중에도 민생을 걱정했다.[사진=더스쿠프 포토]
이순신은 전쟁 와중에도 민생을 걱정했다.[사진=더스쿠프 포토]

반면 가등광태(가토 미쓰야스)는 “한강의 모래를 먹을지언정 한양은 버릴 수 없다”고 주장했고, 가등청정(가토 기요마사) 무리는 “이여송의 군량을 탈취하자”며 강공을 펴자는 목청을 높였다. 이들은 후일 본국에 돌아가 서로 죽이는 관계가 되기도 했다.

이처럼 농사를 못 지은 조선 계사년 춘궁기는 당시 사람들을 어렵게 만들었다. 전장에 있는 군인뿐만 아니라 백성들도 굶어 죽기 시작했다. 시체가 길가에 늘어설 정도로 그 수가 많았다. 기근에 힘겨워하던 경기도 지역 백성들은 당시 동파에 체류하고 있던 체찰사 류성룡에게로 모여들었다. <다음호에 계속>


이남석 더스쿠프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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