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린의 ‘특별한 감정이 시가 되어’
이승하 '시인의 이 사진 앞에서'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은
한가지만을 고집하면
‘방관자’가 되고 만다

이 사진 앞에서

식사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 교인을 향한 
인류의 죄에서 눈 돌린 죄악을 향한 
인류의 금세기 죄악을 향한 
인류의 호의호식을 향한 
인간의 증오심을 향한 
우리들을 향한 
나를 향한 

소말리아 
한 어린이의 
오체투지의 예가 
나를 얼어붙게 했다 
자정 넘어 취한 채 귀가하다 
주택가 골목길에서 음식물을 게운 
내가 우연히 펼친 <TIME>지의 사진 
이 까만 생명 앞에서 나는 도대체 무엇을

이승하
중앙대 문예창작과 교수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데뷔
지훈상, 편운상 등 수상

「공포와 전율의 나날」, 문학의전당, 2015

[사진=펙셀]
[사진=펙셀]

‘무심無心하다’는 두가지 뜻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마음이 텅 비어서 아무런 감정이나 생각이 없는 태도를 나타내고, 또 하나는 남의 일에 관심이 전혀 없는 상태를 나타낸다.

전자가 지시하는 마음은 자기 자신을 향한 마음이다. 스스로 자신을 진단할 때, 자신 안에 아무런 감정과 생각이 없을 때 “나는 지금 무심한 상태라서 아무 말도 하기 싫어”라고 쓸 수 있다. 후자의 경우는 타인을 향한 마음이다. 타인의 일에 무관심으로 일관할 때 “불쌍한 사람을 보고도 너는 참 무심하구나”라고 쓸 수 있다. 

이승하 시인의 ‘이 사진 앞에서’와 어울리는 ‘무심하다’는 후자 쪽이다. 무신경과 무반응으로 기아에 허덕이는 아이의 고통을 외면하고 있으니 인류애적인 입장에서 이것은 너무나 무심한 상황이다. 그러나 개인주의가 발달한 현대 사회에서 무심함은 필연적인 심리이고 자생적인 현상일 뿐이다. 

‘필연적이다’라는 것은 자연 발생적이라는 말과 상통한다. 그러니 우리가 갖는 무심함은 나쁜 것이 아니라 흔하게 발현하는, 정상적인 인간이 가진 태도 중 하나다. 사람 속에 거주하는 자아는 수없이 많다.

그 자아들 중에서 몇가지가 두드러져 삶을 이끌어 나간다. 삶에 영향을 미치는 대표적인 자아가 이기적 자아와 윤리적(양심적·이타적) 자아다. 이 두 자아는 상반된 속성을 지니고 있는데, 서로 충돌하고 결합하면서 삶의 방향을 결정한다. 

중요한 것은 인간이 어느 한쪽만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이 두 자아가 동시에 나타나거나 한쪽이 많거나 한쪽이 적은  경우는 있어도 한쪽이 아예 삭제되는 경우는 없다. 물론 반사회적 인격장애가 있는 사람은 제외해야겠지만. 

미 타임에 실린 사진. [사진=미 타임]
미 타임에 실린 사진. [사진=미 타임]

그러니 이 시에 나오는 윤리적 자아는 제거할 대상이 아니라 조절할 대상이다. 고통받는 타인들 앞에서 윤리적 자아가 실천적(몸)으로 움직일 때만 ‘나’는 스스로 온전한 존재임을 인식하고 정서적 만족감을 스스로에게 부여한다.

그런데 이 시에서처럼 그렇지 못한 경우엔 ‘나’는 후회하고 스스로 자괴감에 빠져 괴로움 속에 놓이게 된다. 따라서 시 속 ‘나’의 태도를 ‘반성’의 코드로만 읽을 필요는 없다. 윤리적 자아를 적극적으로 조절하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는 자발적 ‘후회’로 읽어도 무방하다.

이제 시를 세밀하게 살펴보자. 1연에서 화자는 굶주리고 있는 소말리아 어린이의 오체투지(두 무릎을 먼저 땅에 꿇고, 두 팔을 땅에 댄 다음 머리를 땅에 닿도록 절을 함) 사진을 제시하며 그 예禮의 대상이 누구인지를 언술한다. “식사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 교인” “인류의 죄에서 눈 돌린 죄악” “호의호식” “인간의 증오심” “우리들” 그리고 “나”. 그 모든 것들에게 뼈밖에 남지 않은 아이가 ‘제발’이란 단어가 떠오르도록 온몸으로 예를 올리고 있다.

2연에서 화자는 충격적인 사진을 본 ‘얼어붙은’ 자기 자신의 정서를 솔직하게 진술한다. “우연히 펼친 <TIME>지”에서 발견한 ‘까만 생명’ 때문에 자신이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지(할 수 있는지)를 생각한다.

그런데 왜 하필 음식물을 게워내다가 ‘타임지’를 발견하게 되는가? 게워낸다는 것은 단순히 체질에 맞지 않아 토해 낸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인류가 지나치게 부각한 이기적 자아 때문에 역겨워 토한 것이고, 처참한 빈곤과 대비되게 넘치게 먹은 자기 자신이 부끄러워 토한 것이다.

이승하 시인은 지금까지 수사적 묘사를 최소화하고 현존이 가진 실체를 담백하게, 실감 나게 또는 극적으로 반영해 ‘지금-여기’를 살아가는 존재들의 고통과 ‘광기’ ‘폭력’ ‘이기심’ 등을 진정성 있게 형상화하는 작업을 꾸준히 해왔다. 

‘이 사진 앞에서’에서도 마찬가지다. 실존이 가진 결핍과 인류가 가진 무심함을 아무런 수사 없이 담백하게 극적으로 표출했다. 거기에 시각적 효과를 드러낸 사진과 상징적 효과를 드러낸 점강법과 점층법의 시행 배열(탐욕스럽게 입을 크게 벌린 상태를 암시)을 더해 ‘비극’이 갖는 효과를 극대화했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은 얼마나 이기적 자아와 윤리적 자아를 조절하면서, 통합하면서 살아가고 있는가. 두가지 중에서 한가지만을 고집하면 심각한 ‘방관자’가 되고 만다. 이기적 자아가 결여되면 자기 자신에게 ‘방관자’가 되고 윤리적 자아가 미약하면 타인에게 ‘방관자’가 된다.

‘나’를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고는 타인을 사랑할 수 없고, 타인을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고는 온전한 ‘나’에 도달할 수 없기에, 우리는 대립하는 두 자아를 자연스럽게 조절해 융합해야 한다. ‘책임’ ‘의무’ ‘도덕’ 때문에 나타난 자발성이 아니라 인간 본연의 ‘측은지심’이 발현해 나타난 자발성으로 ‘나’와 타인을 동시에 사유하고 동시에 끌어안아야 한다. 

하린 시인 | 더스쿠프
poethr@hanmail.net

 

저작권자 © 더스쿠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