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린의 ‘특별한 감정이 시가 되어’
백석의 남신의주 유동 박씨봉방
민족의 고난과 개인의 비애
자의식 있기에 처량하진 않은
현실을 피하지 않는 처연함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南新義州 柳洞 朴時逢方)

어느 사이에 나는 아내도 없고, 또, 
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 
그리고 살뜰한 부모며 동생들과도 멀리 떨어져서, 
그 어느 바람 세인 쓸쓸한 거리 끝에 헤매이었다. 
바로 날도 저물어서, 
바람은 더욱 세게 불고, 추위는 점점 더해 오는데, 
나는 어느 목수네 집 헌 삿을 깐, 
한 방에 들어서 쥔을 붙이었다. 
이리하여 나는 이 습내나는 춥고, 누긋한 방에서, 
낮이나 밤이나 나는 나 혼자도 너무 많은 것 같이 생각하며, 
딜옹배기에 북덕불이라도 담겨 오면, 
이것을 안고 손을 쬐며 재 우에 뜻없이 글자를 쓰기도 하며, 
또 문밖에 나가지도 않고 자리에 누워서, 
머리에 손깍지베개를 하고 굴기도 하면서, 
나는 내 슬픔이며 어리석음이며를 소처럼 연하여 새김질하는 것이었다. 
내 가슴이 꽉 메어 올 적이며, 
내 눈에 뜨거운 것이 핑 괴일 적이며, 
또 내 스스로 화끈 낯이 붉도록 부끄러울 적이며, 
나는 내 슬픔과 어리석음에 눌리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을 느끼는 것이었다. 
그러나 잠시 뒤에 나는 고개를 들어, 
허연 문창을 바라보든가 또 눈을 떠서 높은 천정을 쳐다보는 것인데, 
이 때 나는 내 뜻이며 힘으로, 나를 이끌어 가는 것이 힘든 일인 것을 생각하고, 
이것들보다 더 크고, 높은 것이 있어서, 나를 마음대로 굴려 가는 것을 생각하는 것인데, 
이렇게 하여 여러 날이 지나는 동안에, 
내 어지러운 마음에는 슬픔이며, 한탄이며, 가라앉은 것은 차츰 앙금이 되어 가라앉고, 
외로운 생각이 드는 때쯤 해서는, 
더러 나줏손에 쌀랑쌀랑 싸락눈이 와서 문창을 치기도 하는 때도 있는데, 
나는 이런 저녁에는 화로를 더욱 다가 끼며, 무릎을 꿇어 보며, 
어니 먼 산 뒷옆에 바우 섶에 따로 외로이 서서, 
어두워 오는데 하이야니 눈을 맞을, 그 마른 잎새에는, 
쌀랑쌀랑 소리도 나며 눈을 맞을,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백석
·1934년 5월 16일 조선일보 데뷔
·시집 「사슴」 발간
·한국의 대표 모더니즘

고형진 엮음, 정본 「백석시집」, 문학동네, 2007.

[사진=게티이미지뱅크]
[사진=게티이미지뱅크]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南新義州 柳洞 朴時逢方)’은 백석의 대표작 중 하나로 1948년 10월 「학풍」 창간호에 발표한 시다. 시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 중 한 사람인 백석은 향토적인 서정을 가장 아름답게 표현한 시인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 시는 향토적인 서정보다는 개인적인 간절함을 더 많이 담아내고 있다.

민족의 고난과 함께 유랑생활을 하는 화자의 비애가 나타나 있으며, 동시에 고매한 정신을 지향하는 숭고한 의지를 암시하고 있다. 발표 시기만 놓고 따졌을 때 이 시는 북한 정권 수립(1948년 9월 9일) 이후에 세상에 얼굴을 드러낸 작품이다. 하지만 해방 전이나 직후에 쓰였을 확률이 높다. 문맥상 철저하게 개별 화자의 처지와 개별 정서의 무늬를 담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필자는 거시적 입장에서 언급되는 ‘민족’이나 ‘숭고’의 의미를 빼고 이 시를 미시적 입장에서 감상해 보고자 한다. 처음 이 시를 읽었을 때 다가온 개별 정서가 너무나 강렬했기 때문이다. 다가온 정서로 인해 떠오른 단어는 ‘처량하다’와 ‘처연하다’이다. 처량하다는 ‘마음이 구슬퍼질 정도로 외롭거나 쓸쓸하다’ 또는 ‘초라하고 가엾다’의 뜻을 가지고 있고, 처연하다는 ‘애달프고 구슬프다’의 뜻을 가지고 있다.

뜻이 비슷함에도 필자는 ‘처연하다’가 훨씬 더 잘 어울린다는 생각에 젖었다. 이 시의 화자가 자신의 삶의 조건과 환경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는, 자의식이 강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처량하다에는 ‘가엾다’ ‘불쌍하다’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자의식이 강한 사람은 불쌍하지 않다. 가족과 떨어져 방황하다가 객지의 낯선 집, ‘박시봉’의 집에 들어가 살기까지 과정은 ‘처량하다’와 맞아떨어진다. 하지만 시가 전개될수록 드러나는 현실 인식과 끝부분에서 오롯하게 드러낸 의지와 각성 때문에 ‘처연하다’가 더 적절하다는 느낌을 준다.

21세기 상황에 맞춰 시의 내용을 나름대로 재구성해 봤다. “나는 아내도 없고 집도 없다. ‘살뜰한 부모며 동생들과도 멀리 떨어져’ 대도시를 떠돈다. 날이 저물어 ‘바람은 더욱 세게 불고, 추위는 점점 더해’ 온다. 빨리 방을 구해야 한다. 서민들이 많이 사는 변방으로 가서 가장 싼 방에 세를 든다. 방바닥은 차고 습하고 눅눅하다. 오래된 전기난로를 가져와 몸을 겨우 녹인 후 어둠 속에 뜻 없이 글자를 쓴다.

책임질 수 없는 내가 나에겐 너무나 많구나. 며칠 동안 ‘문밖에 나가지도 않고’ 하릴없이 ‘머리에 손깍지베개를 하고’ 몸을 이리저리 굴리면서 나 자신에게 부여된 슬픔과 어리석음을 ‘소처럼 연하여’ 되새김질해 본다. ‘가슴이 꽉 메어’오고, 뜨거운 눈물이 핑 돈다. 스스로 생각해도 나 자신이 너무나 못났다. ‘낯이 붉도록’ 내가 처연해서 화끈거린다. 아, 내가 못난 나를 이끌어 가는 것이 너무나 힘든 일이었구나, ‘더 크고, 높은 것이 있어서’ 나는 나를 마음대로 조정할 수 없는 것이었구나, 차라리 ‘내 슬픔과 어리석음에 눌리어’ 죽어버리는 것이 나을까. 나는 자포자기한다.

그런데 여러 날 지내고 나니 슬픔이나 한탄이 차츰 앙금이 되어 가라앉는다. 어느 날 저녁엔 ‘쌀랑쌀랑 싸락눈이 와서’ 창문을 두드린다. 그러다 문득 나보다 더 처연한 상태에 놓여 있을 갈매나무가 떠오른다. 높은 산 뒷옆에 있는 바위 섶에서 하얗게 눈을 맞고 있을 나무. ‘그 마른 잎새에는’ 싸락눈이 떨어져 ‘쌀랑쌀랑 소리도’ 날 것이지만, 나무는 아무렇지도 않게 굳세고 강한 정신으로 길고 긴 겨울을 통과할 것이다.”

[사진 | 한국학중앙연구원]
[사진 | 한국학중앙연구원]

시의 맛이 많이 반감했다. ‘처연하다’를 강조하기 위한 재구성이라지만 구성에 다소 무리가 따랐다. 백석을 사랑하는 독자들에게 ‘용서’를 구한다. 처연은 타자의 시선에 의해 느껴지는 처연보다는 이 시의 화자처럼 자기 자신에 의해 느끼지는 처연이 더욱 실감나고 애처롭다. 그럼에도 자기 자신의 처연을 자각한 자는 결코 ‘파국’을 선택하지 않는다. 처연의 본질을 자의식에 의해 파악했기 때문이다.

가난하고 힘없고 외롭고 쓸쓸한 자는 언젠가 자신이 처연한 처지에 놓여 있다는 것을 확인할 것이다. 그럴 때 처연은 ‘오기’가 될 수도 있고 ‘독’이 될 수도 있다. 선택은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의 몫이다. 당신은 어떤 처연을 선택하겠는가. 

하린 시인 | 더스쿠프
poethr@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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