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린의 ‘특별한 감정이 시가 되어’
기형도 시인의 질투는 나의 힘
문청에겐 통과의례인 기형도
반성이 아닌 반영하는 청춘
불완전하기에 질투하는 그 시기

질투는 나의 힘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힘없는 책갈피는 이 종이를 떨어뜨리리
그때 내 마음은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웠으니
어리석게도 그토록 기록할 것이 많았구나
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니는 개처럼
지칠 줄 모르고 공중에서 머뭇거렸구나
나 가진 것 탄식밖에 없어
저녁 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두고
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보았으니
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기형도 
· 1960.3.13~1989.3.7
· 언론인·시인
· 시집 「입속의 검은 잎」
· 윤동주 문학상 수상

「입속의 검은 잎」, 문학과지성사, 1991.

[일러스트=게티이미지뱅크]
[일러스트=게티이미지뱅크]

불안하고 암울한 청춘의 대명사 ‘기형도’. 문청들은 한번쯤 ‘기형도’를 과도기적 통과의례인 양 살아간다. 그들에게 ‘기형도’는 단순한 고유명사가 아니다. 시간이고 공간이며 텍스트다. ‘기형도’ 안에 거주하면서 ‘기형도’와 하나가 되려고 몸부림치다가 또 다른 ‘기형도’가 돼 분화한다.

‘왜? 그렇게 기형도라는 텍스트에 집착하는가?’ 그런 질문은 필요하지 않다. 그냥 「입 속의 검은 잎」을 읽어 보면 자동으로 느끼게 된다. 설명할 수 없는 묘한 분위기, 절망과 비애가 깔려있는 그늘진 정서가 읽는 순간 중독성 있게 스며들 것이다. 

「질투는 나의 힘」은 ‘지금-여기’를 살아가는 기형도가 미래로 가서 자신이 발간한 시집을 보고 회고하듯 언술한 시다. ‘쓰기’ 자체 행위와 ‘써진 것’을 진단하면서 비탄에 젖은 정서를 암울하게 드러낸다. 평자들은 이 시를 ‘반성’의 맥락으로 읽기도 한다. 그러나 필자에겐 이 시가 ‘반성’이 아니라 ‘반영’의 맥락으로 읽혔다. ‘반성’은 그 자체로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시 속의 화자는 하나도 잘못한 게 없다.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초반을 살아온 시인들은 공동체를 암울하게 했던 비민주적 환경과 싸우다 ‘6·29선언(1987년)’ 이후 그것들로부터 서서히 벗어나 ‘개인’과 생태학적인 불합리에 겨우 눈을 뜨고 있을 때다. ‘개인’적인 것보다 공동체적인 것을 우선시했던 시대를 기형도도 힘겹게 통과했을 것이다.

시인들은 아무 잘못 없이 청춘을 그 시대의 용광로에 던지고 말았다. 그러니 「질투는 나의 힘」은 ‘반성’이 아니라 공동체와 ‘개인’이 만나는 접면에서 드러난 청춘의 고뇌 내지는 후회의 ‘반영’이다. 

시 속 정황을 자세히 살펴보자.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 화자는 자신의 ‘쓰기’를 되돌아본다. 부질없는 행위를 한 것만 같다. 힘없이 떨어지는 책갈피를 보며 마음속에 세운 “너무나 많은 공장”을, 어리석게도 기록할 것이 너무 많았던 것을 후회한다. 왜 청춘은 그토록 “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니는 개처럼” 방황을 부추기고, 그것을 기록하지 못해 안달 나게 만들었던가. 

[사진=문학과지성사 제공]
[사진=문학과지성사 제공]

화자에겐 ‘가진 것’이 “탄식밖에 없고”, 쓰는 행위가 자신의 전부라고 여겼기 때문이리라. 그러니 “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봐도 화자에겐 존재감을 확인할 흔적이 하나도 없다. 사람들은 화자를 주목하지 않았고 화자를 두려워하지도 않았다.

존재감이 없이 어정쩡하게 살아온 삶. 화자에게 이제 남은 것은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라는 결론뿐이다.

사랑을 제대로 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미친 듯이 자기 생을 가꾸지도 못한 채 질투의 힘으로 어정쩡하게 도달한 미래. 그 지점이 싫어서 화자는 “지칠 줄 모르고 공중에서 머뭇”거렸던 것이다. 

청춘은 완벽할 수 없고 완전할 수 없다. 그렇기에 청춘이 ‘좌충우돌’ ‘시행착오’를 하는 것도, 질투할 것이 많은 것도 당연하다. 그런데 우리는 ‘좌충우돌’과 ‘시행착오’를 쉽게 용납하지 않는다. ‘속도’와 ‘성공신화’에 길들여진 성급한 기성세대가 많기 때문이다.

그런 기성세대의 시선 때문에 지금도 가진 것이 ‘탄식’ 밖에 없는 청춘들은 현존을 확신하지 못하고 방황한다. 청춘들이 섣부른 자해적 결론에 도달하지 않도록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믿고 청춘이 가진 결핍을 존중하고 사랑해야 한다. 그렇게 했을 때 ‘질투’를 긍정적으로 승화하는 젊은이들이 수없이 늘어날 것이다. 

하린 시인 | 더스쿠프
poethr@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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