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린의 ‘특별한 감정이 시가 되어’
윤동주의 ‘쉽게 씌어진 시’
친일 대신 독립 선택했지만
시대 대신 개인의 시를 쓰는
부끄러움을 그린 솔직함

쉽게 씌어진 시 

부끄럽지 않아도 
되지만 부끄럽다 

창(窓) 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육첩방(六疊房)은 남의 나라. 

시인(詩人)이란 슬픈 천명(天命)인 줄 알면서도 
한 줄 시(詩)를 적어 볼까. 

땀내와 사랑내 포근히 품긴 
보내 주신 학비 봉투(學費封套)를 받어 

대학(大學) 노트를 끼고 
늙은 교수(敎授)의 강의(講義) 들으러 간다. 

생각해 보면 어린 때 동무를 
하나, 둘, 죄다 잃어버리고 

나는 무얼 바라 
나는 다만, 홀로 침전(沈澱)하는 것일까? 

인생(人生)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詩)가 이렇게 쉽게 쓰여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육첩방(六疊房)은 남의 나라 
창(窓) 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時代)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最後)의 나.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慰安)으로 잡는 최초(最初)의 악수(握手).

윤동주
시인ㆍ독립운동가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의 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1948년, 창작 시기 1942년 

친일하는 시인들 사이에서 윤동주는 신념을 지키고도 부끄러움을 감당하지 못했다.[사진=게티이미지뱅크]
친일하는 시인들 사이에서 윤동주는 신념을 지키고도 부끄러움을 감당하지 못했다.[사진=게티이미지뱅크]

윤동주는 일제강점기 때 자신을 학대하듯 내내 ‘부끄러움’을 안고 살았던 시인이다. 일제강점기 상황에서도 시인들에게 분명 ‘양지’와 ‘음지’는 따로 있었다. 일제에 협조하면 ‘양지’에서 평탄한 삶을 살았을 것이고, 일제에 저항하면 ‘음지’에서 가혹한 삶을 살았을 것이다. 윤동주는 분명 ‘친일親日’을 하지 않았는데도 끊임없이 부끄러웠다.

왜 그렇게 부끄러움을 느꼈을까. 그가 살았던 1930년대 중반부터 1940년대 초반엔 일제에 협조하는 일이 일반화했다. 태평양전쟁을 준비하던 일제의 병참기지화 정책으로 시인들은 친일시를 썼고, 친일을 도모하는 강연까지 했다. 그런 분위기였기에 윤동주는 오히려 더더욱 떳떳할 수 있었다. 그런데도 윤동주는 자신의 부끄러움을 감당하지 못했다. 타인의 시선 때문이 아니라 자아의 양심 때문에 부끄러움을 집요하게 펼쳐나갔다. 

「쉽게 씌어진 시」에도 이런 태도가 반영됐다. 불합리한 현실에 적극적으로 저항하지 못하고 편하게 시를 쓴 것에 내내 부끄러워했다. ‘천명(天命)’이란 하늘이 준 타고난 운명이란 뜻도 있지만 하늘의 명령이란 뜻도 있다. 일제 강점기 때 윤동주는 시인으로서 ‘천명’을 어떻게 인식했을까.

시대의 아픔과 불합리를 적극적으로 노래하는 것이 ‘천명’이라고 여겼을 것이다. 그런데 자신은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다고 여겼다. 자꾸 개인적인 것을 노래하고 “땀내와 사랑내 포근히 품긴” “학비 봉투(學費封套)를 받어/대학(大學) 노트를 끼고” 나태하게 “늙은 교수(敎授)의 강의(講義) 들으러” 간다고 여겼다. 더군다나 ‘육첩방(다다미 6장을 깐 좁은 방·3.3㎡)’이 있는 일본 제국주의 국가에서….

그런 와중에도 윤동주는 자기 연민과 희망을 향한 의지를 동시에 품고 있었다. 부끄러운 ‘나’와 그런 ‘나’를 가엽게 여기는 ‘나’를 솔직하게 표현했다.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눈물과 위안(慰安)으로 잡는 최초(最初)의 악수(握手)”라고 명명하며, 부끄러움과 자기 위안적인 정서를 진실되게 언술했다.

이런 심리는 윤동주의 「자화상(自畵像)」에 나온 화자의 심리와도 상통한다.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 가만히 들여다볼 때 거기에 비친 ‘나’의 모습이 너무나 부끄럽고 못나 보여 화자는 되돌아온다. 되돌아오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런 ‘나’도 ‘나’의 또 다른 하나의 본질이구나 하고 여겨져서 다시 또 우물가로 가서 자신의 얼굴을 비춰본다. 못난 마음과 부끄러움이 또다시 밀려온다. 그렇게 부끄러움과 자기 연민이 교차하면서 형상화한 것이 윤동주의 「자화상」이다. 

[사진 | 뉴시스]
[사진 | 뉴시스]

이것이 바로 윤동주 시가 갖는 매력이다. 인간적인 솔직함과 인간적인 ‘부끄러움’을 진정성 있게 표출해서 읽는 이로 하여금 시대성을 뛰어넘는 떨림과 울림을 맛보게 했다. 거기에 허무주의로 떨어지지 않는 극복의지까지 덧붙여져 시의 감동을 극대화했다.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시대(時代)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最後)의 나”를 제시해 암울함 속에서도 희망과 ‘별’을 품는 의지를 피력했다. 

우리 문단엔 친일시를 쓴 시인을 옹호하는 사람들이 일부 있다. 필자는 그들에게 이렇게 묻고 싶다. “그 친일시를 읽고 당신의 아들이나 손자가 학도병에 지원해 일제를 위해 싸우다 죽었다면 당신은 그 시인을 용서할 수 있겠는가?”

그들은 또 이렇게 반문할지 모른다. “시인들이 무슨 힘이 있다고?” 분명 일제강점기 시대의 시인들은 오늘날 시인들이 갖는 사회적 지위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차이가 난다. 그 시대 시인들은 엄청나게 높은 대중적 인지도와 사회적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말과 행동을 함부로 해서는 안 되는 존재였던 것이다. 그들에게 양심과 부끄러움이 조금이라고 있었다면 그들이 선뜻 친일시를 썼을까. 

친일을 하고도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는 시인들과 편법과 비리를 저지르고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 오늘날 정치인들은 너무나 닮았다. 하지만 윤동주는 타인 때문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양심 때문에 부끄러움을 내내 가졌다. 어느 쪽이 역사에 오래 기억돼야 하겠는가.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들은 명확하게 알고 있을 것이다. 

하린 시인 | 더스쿠프
poethr@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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