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린의 ‘특별한 감정이 시가 되어’
황인찬의 ‘단 하나의 백자가 있는 방’
신세대 시인의 새로운 감수성
미니멀리즘 보여주는 심플 포엠
사설도 논평도 몽상도 없는 응시

단 하나의 백자가 있는 방

조명도 없고, 울림도 없는 
방이었다 
이곳에 단 하나의 백자가 있다는 것을 
비로소 나는 알았다 
그것은 하얗고 
그것은 둥글다 
빛나는 것처럼 
아니 빛을 빨아들이는 것처럼 있었다 
 
나는 단 하나의 질문을 쥐고 
서 있었다 
백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수많은 여름이 지나갔는데 
나는 그것들에 대고 백자라고 말했다 
 
모든 것이 여전했다  

조명도 없고, 울림도 없는 
방에서 나는 단 하나의 여름을 발견한다  

사라지면서 
점층적으로 사라지게 되면서 
믿을 수 없는 일은 
여전히 백자로 남아 있는 그 
마음 

여름이 지나가면서 
나는 사라졌다 
빛나는 것처럼 빛을 빨아들이는 것처럼 

황인찬
2010년 현대문학 데뷔
김수영문학상 등 수상
시집 「사랑을 위한 되풀이」등 다수

「구관조 씻기기」, 민음사, 2012.

황인찬 시인의 시에는 대상을 그냥 바라보기만 하는 화자가 등장한다.[사진=게티이미지뱅크]
황인찬 시인의 시에는 대상을 그냥 바라보기만 하는 화자가 등장한다.[사진=게티이미지뱅크]

황인찬의 첫번째 시집 「구관조 씻기기」를 읽는 내내 ‘심플 포엠(simple poem)’이란 단어가 떠올랐다. 심플 라이프를 사는 신세대 젊은 시인의 새로운 감수성이 묻어나는 시편들이 시집에 포진해 있다. 그의 시는 장식적인 요소를 일체 배제하고 표현을 아주 적게 하는 기법이나 양식을 가리키는 미니멀리즘(minimalism)의 시학을 보여준다. 

그런데 미니멀리즘이란 말엔 기법적인 측면이 강조돼 있어 포괄적으로 황인찬의 시를 나타낸다고 볼 수 없기에, 필자는 심플 포엠이란 조어를 사용하려 한다. 막 뽑은 아메리카노와 담백한 크래커를 탁자 위에 놓고 세상을 심플하게 응시하는 시인의 얼굴을 상상한다. 그 시인의 눈 속에 담긴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

황인찬 시 속 화자는 대상이나 일에 최대한 관여하지 않는다. 어찌 보면 무덤덤한 화자다. 대상에 관여하지도 않고 관계성이나 존재성을 작위적으로 해석하지 않으며 그냥 바라본다(읽는다). 눈앞에 있는 것에 사설이나 논평도 없고 일부러 몽상도 하지 않는다. 

시인은 대상의 본질을 알고 있으면서도 모르는 척, 일부러 짐짓, 거리를 둔다. 이것이 다른 젊은 시인과의 차별점이다. 일부러 어떤 것을 하지 않는 것. 진지한 척, 상처가 많은 척하지 않고 우울과 환상, 몽상과 같은 젊은 시인들이 자주 찾는 정서에도 빠져들지도 않는다. 그저 솔직하게 담백하게 그 시적 정황을 전하고 미묘한 여백을 포진시킬 뿐이다.

황인찬은 구조적인 면에서 시선의 중첩을 통해 여백을 드러낸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아무 의도로써 행동하지 않는 자기 자신이나 대상을 자기 자신이 바라보는 구조를 취하고 있다. 

자신이 카메라의 눈의 돼 자신과 대상의 일면을 지켜보고 있는 식이다. 「면역」 「파수대」 「구조」 「단 하나의 백자가 있는 방」 등에서 그것이 느껴지는데, 「단 하나의 백자가 있는 방」만 일부 언급하겠다.

「단 하나의 백자가 있는 방」에서는 백자처럼 돼 버린 자기 자신을 담담하게 이야기한다. “조명도 없고, 울림도 없는/방”에 “단 하나의 백자가 있다는 것을” 화자는 어느날 문득 알게 된다.

[사진 | 펙셀] 
[사진 | 펙셀] 

백자는 처음부터 단순한 백자였다. “그것은 하얗고/그것은 둥글다/빛나는 것처럼/아니 빛을 빨아들이는 것처럼 있었다”. 그런데 화자는 아무런 의미 부여가 되지 않는 백자에게 질문을 던진다. 그러나 “백자는 대답하지 않”는다.

“수많은 여름이 지나”가고 화자는 “그것들에 대고 백자라고 말했다”. 여기서 ‘그것들’은 백자일 수도 있고 질문들일 수도 있다. 질문들이라면 질문들에게 백자라고 말한 것이다. 질문들이 백자처럼 그저 앉아 있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것이 여전”하게 된다. 화자는 이제 “조명도 없고, 울림도 없는/방에서” “단 하나의 여름을 발견한다”. 해가 바뀌고 모든 것이 사라져도 사라지지 않는 여름인 것이다.

“여전히 백자로 남아 있는 그/마음”과 함께. 그 여름은 내가 사라지던 단 하나뿐인 여름일 것이고 그때의 마음은 백자로 남을 것이다. “빛나는 것처럼 빛을 빨아들이는 것처럼” 내가 사라지는 것을 내 자신이 보고 있다. 이 시선의 구조가 낯설게 다가오면서, 대상과 시적 거리감을 형성한다. 존재의 안타까운 소멸. 그 존재의 소멸을 버티고 있는 공간의 울림이 화자만의 여백을 만들어낸다.

황인찬의 시가 새롭게 다가오는 것은 기존의 시 문법에 얽매이지 않고, ‘젊은 시’를 써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리지 않고 자신만의 시 문법을 창조한 것 때문이다. 심플한 삶과 심플한 시상 전개, 심플한 메시지가 그가 창조한 시적 영역이다. 언어의 적절한 포석과 시적 정황이 만들어내는 미묘한 여백, 대상이 사라지는 것 같으면서도, 대상의 부재가 만들어내는 신비스러운 공명空鳴이 황인찬의 시를 읽는 맛이다.

하린 시인 | 더스쿠프
poethr@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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