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스쿠프 한주를 여는 시
이승하의 ‘내가 읽은 이 시를’
윤동주의 투르게네프의 언덕
가난했고 비참했던 일제강점기
지킬 수 없었던 보국의 다짐

투르게네프의 언덕

나는 고갯길을 넘고 있었다……그때 세 소년 거지가 나를 지나쳤다.
첫째 아이는 잔등에 바구니를 둘러메고, 바구니 속에는 사이다병, 간즈메통, 쇳조각, 헌 양말짝 등 폐물이 가득하였다.
둘째 아이도 그러하였다.
셋째 아이도 그러하였다.
텁수룩한 머리털, 시커먼 얼굴에 눈물 고인 충혈된 눈, 색 잃어 푸르스럼한 입술, 너들너들한 남루, 찢겨진 맨발
아― 얼마나 무서운 가난이 이 어린 소년들을 삼키었느냐!
나는 측은한 마음이 움직이었다.
나는 호주머니를 뒤지었다. 두툼한 지갑, 시계, 손수건…… 있을 것은 죄다 있었다.
그러나 무턱대고 이것들을 내줄 용기는 없었다. 손으로 만지작거릴 뿐이었다.
다정스레 이야기나 하리라 하고 ‘얘들아’ 불러보았다.
첫째 아이가 충혈된 눈으로 흘끔 돌아다볼 뿐이었다.
둘째 아이도 그러할 뿐이었다.
셋째 아이도 그러할 뿐이었다.
그리고는 너는 상관없다는 듯이 자기네끼리 소근소근 이야기하면서 고개로 넘어갔다.
언덕 우에는 아무도 없었다.
짙어가는 황혼이 밀려들 뿐.

1939년 9월 작.

[일러스트=게티이미지뱅크]
[일러스트=게티이미지뱅크]

이 작품을 동시로 봐야 할지 성인시로 봐야 할지 판단이 금방 안 선다. 윤동주가 연희전문학교에 다닐 때 쓴 이 작품은 일단 제목에서 러시아 산문시의 개척자이자 소설가인 투르게네프의 「거지」를 패러디했다고 밝히고 있다. 그의 시 창작 방법론을 배우고 익혀 쓴 것임을 미리 말한 것이다. 투르게네프가 쓴 원작은 이렇다.

길을 걷고 있었지요. 늙은 거지 한 사람이 나의 발길을 멈추게 했습니다. 눈물 어린 붉은 눈, 파리한 입술, 다 해진 누더기 옷, 더러운 상처…… 아아, 가난이란 어쩌면 이다지도 잔인하게 이 불행한 사람을 갉아먹는 것일까요!

그는 빨갛게 부푼 더러운 손을 나에게 내밀었습니다. 그는 신음하듯 중얼거리듯 동냥을 청했습니다. 나는 호주머니란 호주머니를 모조리 뒤져 보았습니다. 지갑도 없고 시계도 없고 손수건마저 없었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이 외출을 했던 것입니다. ‘이 일을 어쩌나……’

그러나 거지는 여전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손은 힘없이 흔들리며 떨고 있었습니다. 당황한 나머지 어쩔 줄 몰라, 나는 힘없이 떨고 있는 거지의 손을 덥석 움켜잡았습니다.

“미안합니다, 형제. 내 급하게 나오느라 아무것도 가진 게 없구려.” 거지는 붉게 충혈된 두 눈으로 물끄러미 나를 올려다보았습니다. 그의 파리한 두 입술에 가느다란 미소가 스쳐 가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기대로 나의 싸늘한 손가락을 꼭 잡아주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혼자 중얼거리듯 말했습니다. “괜찮습니다, 선생님. 그것만으로도 고맙습니다. 그것도 역시 적선이니까요.” 나는 그때 깨달았습니다. 거꾸로 이 형제에게서 내가 적선을 받았다는 사실을.
[1878년 2월 작]


이 시에선 화자가 길을 가다 늙은 거지를 만난다. 적선을 원하는 거지에게 줄 게 없을까 호주머니를 뒤져봐도 줄 게 아무것도 없다. 가진 게 없어서 발을 구르고 있자 거지가 오히려 위로한다. 당신이 마음으로 나를 도와줬으니 적선한 셈이라고 한다. 그러자 화자가 이 늙은 거지한테 적선을 선물 받았구나, 생각한다.

[사진 | 펙셀]
[사진 | 펙셀]

윤동주의 시에서는 화자가 3명의 넝마주이 소년과 만난다. 고물을 넝마에 짊어지고 가는 아이들은 그것을 팔아봤자 몇푼 못 받을 것이다. 투르게네프 산문시의 화자는 마침 아무것도 집에서 갖고 나오지 않아서 줄 것이 없었다. 윤동주 시의 화자는 시계와 손수건 외에 두툼한 지갑도 갖고 있었지만 아이들에게 적선하는 것을 망설이다가 그만 헤어지고 만다.

이 작품을 보면 일제강점기 때 우리 국민이 얼마나 가난했는지를 알 수 있다. ‘유리걸식’이란 말이 금방 떠오른다. 윤동주 본인이 직접 겪었던 일일 수도 있다. 그는 아이들을 도와주고 싶었지만 용기를 내지 못한 자기를 비판했다. 용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해 일본으로 간 것일 수도 있다. 힘을 길러서 나중에 보국하리라. 하지만 그의 결심은 이뤄지지 않는다. 후쿠오카 교도소에서 옥사함으로써 생을 마감했기 때문이다.

이승하 시인
shpoem@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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