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회의 영화로 읽는 한국사회 | 올드보이 ❹

영화 ‘올드보이’의 시작과 끝에는 “아무리 개만 못한 사람이라도 살 권리는 있지 않느냐”는 대사가 배치된다. 당연한 듯해 보이나 그리 쉬운 질문만은 아니다. 특히나 견유학파犬儒學派 철학자(냉소주의 철학자)들에게는 난해한 질문이다. 견유학파가 보기에 인간은 분명 개만도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세치 혀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점에서 사람은 개만도 못하다.[일러스트=게티이미지뱅크]
세치 혀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점에서 사람은 개만도 못하다.[일러스트=게티이미지뱅크]

15년간 사설 감옥에 갇혀 군만두만 강제급식을 당하던 오대수(최민식)는 마침내 15년 만에 ‘의문의 출소’를 한다. 왜 갇혔는지도 모르고 왜 풀려났는지도 모른다. 왜 태어났는지도 알 수 없고 왜 죽어야 하는지도 모르는 인간의 운명처럼 말이다.  오대수가 풀려난 곳은 어느 건물의 옥상이다. 마치 박혁거세가 박에서 태어나듯이 오대수는 커다란 가방 속에서 햇살 쏟아지는 세상에 새로 태어난다.

태양 숭배 민족인 한민족의 시조들은 대개 태양을 닮은 둥근 박이나 알에서 태어난다. 박에서 태어난 혁거세나 알에서 태어난 김알지는 인간과는 ‘클래스’가 다른 인물이었듯 가방에서 태어난 오대수도 범상한 인물일 리가 없다. 그러나 박도 아니고 알도 아닌 시커먼 여행 가방에서 태어난 오대수는 박혁거세나 김알지처럼 신계와 인간계의 중간쯤 자리하지만 그들처럼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온 것은 아니다. 심판과 복수를 위해 시커먼 가방을 헤치고 세상에 나온다. 박혁거세와 김알지가 천사에 해당한다면 오대수는 타락천사인 사탄쯤에 해당한다.

오대수가 세상에 나와 처음 맞닥뜨린 인간은 건물 옥상에서 강아지 한마리를 껴안고 뛰어내려 자살하려는 자살남(오광록)이다. 구구절절한 사연은 모르겠지만 아마 집에서 강아지만도 못한 취급을 당하다 결국 자살을 결심한 불우한 가장인 모양이다. 자살남은 “아무리 개만 못한 인간도 살 권리는 있지 않느냐”고 절규한다. 무표정한 얼굴로 허공에 매달린 자살남의 넥타이를 쥐고 있던 오대수는 넥타이를 놓아버린다. 타락천사 오대수는 ‘개만도 못한 인간은 살 권리가 없다’는 판결을 내리고 그 길로 또 다른 타락천사 이우진(유지태)을 찾아 심판과 복수에 나선다.

영화 속 이우진의 펜트하우스는 드넓은 신전을 연상케 한다.[사진=더스쿠프 포토]
영화 속 이우진의 펜트하우스는 드넓은 신전을 연상케 한다.[사진=더스쿠프 포토]

‘상록(evergreen)’이라는 ‘영원한 청춘’의 ID를 사용하는 이우진은 제우스 신처럼 까마득한 펜트하우스에 산다. 그의 아이디처럼 이우진은 오대수와 고등학교 동기라고 보기에는 터무니없이 젊어 보인다. 오대수가 절대 노안이 아니라면 이우진이 절대 동안일 것이다. 오대수에게 악마와 같은 복수를 다짐한 이우진은 고교 졸업반 이후 인간계를 떠나 더 이상 나이를 먹지도 않은 듯하다.

늙지 않은 이우진은 ‘인간의 나이’를 먹은 고교 동기 오대수를 신이 인간을 조롱하고 경멸하듯 ‘아저씨’라고 부른다. 그리스ㆍ로마의 신이나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像처럼 드넓은 자신의 신전에서 당당하게 올누드로 돌아다닌다. 신이나 제왕은 무치無恥의 특권을 누린다. 이우진은 그의 펜트하우스 통유리 창가에서 하늘을 배경으로 마치 아폴로 신처럼 완벽하게 정돈된 요가 자세를 선보인다.

그의 심장은 인간과 같이 무질서한 생명의 힘으로 무질서하게 뛰지 않고 외부의 기계 장치에 의해 한치의 오차 없이 질서 있게 뛴다. 신에게 인간의 너절한 감성 따위는 없다. 오대수나 이우진 모두 인간이면서 인간이기를 포기하거나 혹은 인간의 영역을 벗어난 듯한 착각 속에 산다. 그러나 이들 모두 실상은 ‘개만도 못할’ 뿐이다.

마지막에 이우진의 발아래 엎드려 ‘나는 개’라고 이우진의 발을 핥던 오대수는 가위로 자신의 혀를 자르고서야 사면을 받는다. 개는 세치 혀로 사람을 죽이는 죄를 짓지 않지만 인간은 세치 혀로 사람을 죽인다. 역시 개만도 못하다. 개만도 못한 혀를 잘라낸 오대수는 최면술사에게 편지를 보내 자신의 기억을 모두 지워줄 것을 요청한다.

개만도 못하게 살면서 타인을 함부로 재단하려는 사람들이 많다.[일러스트=게티이미지뱅크]
개만도 못하게 살면서 타인을 함부로 재단하려는 사람들이 많다.[일러스트=게티이미지뱅크]

그 편지의 마지막에 오대수는 ‘개만도 못한 사람도 살 권리는 있지 않겠느냐’고 적는다. 옥상 위의 자살남이 오대수에게 했던 절규를 이제 오대수가 한다. ‘개만도 못한 인간은 살 가치가 없다’고 믿었던 오대수는 자신이 스스로 개만도 못하다는 것을 깨닫고서야 개만도 못한 인간의 살 권리도 인정한다.

‘나쁜 사람은 있는 모양이지만 나쁜 개는 없다’고 한다면 사람이 개만 못하다는 견유학파의 관점이 옳은 모양이다. 많은 사람들이 개같이 살거나 개만도 못하게 살면서도 함부로 신의 영역까지 넘보고 신처럼 인간을 재단하려 든다. 그러나 인간보다 못할 것도 없는 개들은 감히 신의 영역을 넘보지는 않는다. 개들의 미덕이다. 그렇게 사람들은 오대수와 이우진의 불행에 빠진다.
김상회 정치학 박사 sahngwhekim5353@gmail.com | 더스쿠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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