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편 아산 제❷장 현충사~여수

이순신 장군은 47세가 돼서야 장군 직위를 받았다. 사진은 여수거북선축제.[사진=연합뉴스]
이순신 장군은 47세가 돼서야 장군 직위를 받았다. 사진은 여수거북선축제.[사진=연합뉴스]

이순신의 첫번째 묘소는 음봉면 금성산에 있었습니다. 그로부터 16년 뒤에 지금의 어라산으로 이장됐습니다. 왜 옮겨졌을까요? 여러가지 설이 있습니다. 그중 하나는 이순신 장군이 적군의 흉탄을 맞고 돌아가신 게 아니라 유명을 달리한 것으로 위장됐다는 겁니다. 쉽게 말해, 노량해전에서 무사히 귀환한 지 16년 뒤에 자연사하셨고, 그제야 비로소 묘에 묻히셨다는 겁니다. 금성산에서 어라산으로 이장된 게 이를 뒷받침하는 근거라고 합니다. 

또 다른 설도 있습니다. 마지막 전투에서 살아남았다가 임금으로부터 화를 입을까봐 몸을 스스로 던졌다는 겁니다. 이런 이야기들은 어디까지나 가설일 뿐입니다. 아마도 아래와 같은 마음에서 그런 설들이 떠돈 것 같습니다. “단 한번도 패배한 적 없는 장군이 마지막 전투에서 돌아가신 것을 안타까워하는 마음이 숱한 가설을 만들어냈으리라.” 이순신 장군이 잠들어 있는 어라산 묘소는 현충사에서 자동차로 10분 정도 걸립니다. 필자가 본 묘소 중 왕묘를 제외하곤 가장 규모가 컸습니다. 이곳에 서면 한 나라를 구한 위대한 인물의 기운이 느껴집니다.

해미읍성 : 이순신이 근무했던 충청 본영
충남 해미읍성은 군인 이순신의 세번째 부임지였습니다. 이곳은 이순신과 관련된 사연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규모는 상당히 큽니다. 조선시대 읍성의 모습을 복원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인 흔적도 많습니다. 고려 말과 조선 초부터 잦았던 왜구의 출몰에 대비하기 위해 서산 바닷가 근처에 있는 해미면에 성을 쌓았습니다. 당시 이름은 해미내상성海美內廂城이었고 충청도병마절도사가 머물렀습니다.

이순신은 당시 충청병사의 군관으로 약 10개월간 근무했습니다. 군관은 하급장교 또는 부관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 모두 끝난 이후 해미내상성은 행정기능을 부여받아 해미읍성이 됐습니다(효종ㆍ1651년). 호서지방 행정의 중심지가 된 것이죠. 그래서 복원된 성의 규모가 작지 않습니다. 이곳에 오시면 조선시대 행정 중심지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습니다.

자! 이제 여수로 넘어가보시죠. 먼저 율리우스 카이사르(Gaius Julius Caesar) 이야기를 꺼내야 겠습니다. 젊은 시절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던 그는 40세가 돼서야 역사의 전면에 등장했고, 20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서양사 500년을 정리하고 이후 500년의 질서를 만들었습니다. 그랬던 카이사르처럼 이순신도 빛을 보는 시기를 오래 기다려야 했습니다. 32살에 무과에 급제한 이순신의 관직 생활은 평탄하지 않았습니다. 변방을 떠돌며 승진과 강등을 반복하며 전전긍긍해야 했습니다. 그런 이순신이 47세가 돼서야 처음으로 장군의 직위를 가지고 부임하신 곳이 전라 좌수영이 있던 여수입니다. <다음호에 계속>
장정호 교육다움 부사장 passwing7777@naver.com | 더스쿠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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