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라미드 구조였던 자동차 벤더 체계
전기차 시장 첨단 기술 전쟁터 되며
기술력 가진 벤더 우월적 지위 확보
LG전자, 현대모비스와 맞붙는 상황

자동차 산업의 밸류체인은 간단하다. 나사부터 문짝까지 각 부품이 단계별로 만들어지는데, 공정의 순서대로 4차, 3차, 2차, 1차 부품업체가 피라미드 구조를 이룬다. 그런데 전기차 시대가 도래하면서 상황이 달라지고 있다. 전기차에 들어가는 부품 수가 줄면서 기술력을 가진 벤더가 ‘갑甲’이 되는 시대가 온 거다. 국내에도 그런 기업 있는데, 흥미롭게도 LG전자다. 더스쿠프(The SCOOP)가 LG전자가 불러일으킨 벤더의 반란을 취재했다. 

전기차 부품 라인업을 강화하며 급성장한 LG전자가 국내 자동차 부품 시장을 뒤흔들고 있다.[사진=LG전자 제공]
전기차 부품 라인업을 강화하며 급성장한 LG전자가 국내 자동차 부품 시장을 뒤흔들고 있다.[사진=LG전자 제공]

어느 자동차 제조공장. 한 노동자가 부품업체가 납품한 작은 나사못을 컨베이어벨트에 올려놓는다. 벨트를 타고 이동한 작은 나사못은 또다른 자동차 필수부품인 사이드미러와 결합하고, 그 사이드미러는 커다란 문짝과 합쳐진다. 이렇게 사이드미러가 붙은 문짝은 또다시 ‘윗단계’로 향하고, 비로소 차체와 연결된다. 

어떤가. 자동차가 탄생하려면 부품 생태계의 가장 밑단에서 꼭대기에 이르는 긴 여정이 필요하고, 그 여정의 단계를 구성하는 업체들을 우리는 ‘벤더’라고 부른다. 자동차 산업에서 벤더는 필수 불가결한 요소다. 자동차 한대에 필요한 부품만 3만개에 이르는 만큼 완성차 기업이 자동차를 홀로 만들기란 불가능해서다.

벤더는 각 부품을 생산하는 데 필요한 기술적 난이도와 중요성에 따라 4가지 유형으로 나뉜다. 이때 부품 공급망의 최상단에 위치한 부품사가 1차 벤더, 최하단에 속하는 부품사가 4차 벤더에 해당한다. 이를테면, 나사못을 만드는 업체는 4차 벤더, 각 벤더에서 공급한 부품을 통합해 완성차 업체에 전달하는 곳을 1차 벤더라고 이해하면 쉽다. 

이런 벤더 체계는 연간 300만대 이상의 자동차를 생산하는 완성차 기업으로선 가장 효율적인 수단이다. 8000곳 이상의 크고 작은 부품사로 이뤄진 공급망을 통해 빠르게 부품을 조달받고, 부품사 간 도급 계약을 통해 비용 절감을 이룰 수 있어서다. 이렇듯 완성차 기업의 편의를 위해서라도 벤더 체계는 공고히 유지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최근 벤더 생태계에서 놀라운 일이 벌어지고 있다. 부품 공급망의 중간 지대에 머물던 2차 벤더가 완성차 기업의 우위에 서고, 1차 벤더가 완성차 기업과 경쟁을 벌이는 ‘기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거다. 

그 중심에는 자동차 산업의 패러다임을 송두리째 바꾼 ‘전기차’ 트렌드가 있다. 전기차의 전체 부품 수는 내연기관차의 절반 수준이다. 대신 배터리ㆍ자율주행 센서 등 신기술을 적용하는 파트가 훨씬 많아졌다. 

‘혁신의 장’이 열리자 뛰어난 기술력을 가진 벤더들이 기존의 틀을 깨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2차 벤더였던 이스라엘의 자율주행 기술업체 ‘모빌아이’의 예를 들어보자. 이 회사는 카메라 기술(첨단운전자보조시스템ㆍADAS) 하나로 세계 시장을 독점하며 ‘슈퍼갑’이 됐다. 

완성차 업체의 눈치를 살피던 2차 벤더가 이젠 완성차 업체를 고르는 위치에 올라선 거다. 현대차의 1차 벤더인 ‘만도’가 자율주행 센서(라이다ㆍLidar) 시장에서 볼보ㆍGM 등 글로벌 완성차 기업과 경쟁에 돌입한 것도 좋은 예다. 

‘벤더 파괴’ 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신호탄은 이뿐만이 아니다. 국내에서도 두 거대 기업이 이 흥미로운 현상을 보여주고 있다. 바로 LG전자와 현대모비스다. 혹자는 ‘LG전자’라는 이름에 물음표를 붙일지 모른다. 세탁기나 청소기 같은 가전기기의 명가名家로 유명한 기업이 어째서 자동차 부품 시장에 나타났느냐는 거다. 

이런 의구심이 생길 수도 있다. “과연 LG전자가 자동차 전문 회사인 현대모비스의 상대가 될 수 있을까.” 이 모든 질문을 해결하기 위해선 먼저 현대모비스를 중심으로 한 국내 자동차 부품사의 서열부터 살펴봐야 한다. 

현대모비스(이하 모비스)는 국내 자동차 부품 생태계의 최상단에 있는 ‘1차 벤더’다. 2~4차 벤더가 생산한 모든 부품은 모비스로 모인다. 모비스는 수백개에 이르는 부품을 통합해 하나의 큰 덩어리 형태로 조립하는 ‘모듈화’와 각 부품에 세부적인 기능을 부여하는 ‘시스템화’ 기술을 갖고 있다. 

이처럼 모비스는 완성차 기업으로 가는 ‘최종 관문’이기 때문에 각 벤더는 모비스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모비스가 ‘1차 벤더 위의 벤더’로 군림하며 피라미드의 꼭대기를 차지할 수 있었던 이유다.

[※참고: 물론, 1ㆍ2차 벤더 중엔 모듈화 기술을 갖고 있는 곳이 있다. 하지만 완성차 기업의 니즈에 맞춰 각 부품에 ‘설정값’을 부여하는 시스템화 기술을 갖고 있는 벤더는 거의 없다. 가령, 똑같은 브레이크 부품이라도 각 브랜드 고유의 드라이빙 타입에 따라 탄도ㆍ장력ㆍ제동력 등의 강도를 다르게 설정하는 것이 바로 시스템화다.] 

서막 오른 벤더 파괴의 시대   

그런데 전기차의 시대가 도래하며 압도적인 지배력을 가진 모비스의 아성에 도전하는 ‘공룡 벤더’가 나타났다. 그 주인공이 바로 LG전자다. 언뜻 자동차 회사도 아닌 가전기업이 갑자기 자동차 시장에 도전장을 내민 것처럼 보이지만, LG전자와 자동차의 연은 깊다. 2004년 자동차 설계ㆍ엔지니어링 분야로 부품사업을 시작한 LG전자는 2013년부터 전기차용 부품 개발을 본격화하며 영역을 확장하기 시작했다. 

흥미롭게도 가전제품을 만들던 노하우가 LG전자에 득이 됐다. LG전자는 청소기 모터에 사용하던 기술을 전기차 모터에 적용하고, TV사업을 통해 축적한 디스플레이 기술로 전기차의 패널을 만들었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가정용 엔터테인먼트 상품에 잔뼈가 굵은 LG전자는 통신 기술을 활용해 차량용 인포테인먼트 시장까지 진출했다. 

전장電裝 부품(디스플레이ㆍ인포테인먼트 장비)을 중심으로 구동계(모터) 장치까지 아우르며 전기차 부품 라인업을 구축한 LG전자는 현재 자체적인 글로벌 공급망을 키워가고 있다. 특히 미국의 완성차 기업인 제너럴모터스(GM)와는 차량용 인포테인먼트 장비를 포함한 11개의 부품을 공급하며 긴밀한 협력관계를 구축 중이다. 

LG전자가 독자적인 기술력을 바탕으로 ‘벤더 중심의 생태계’를 탈피하고 있다는 건데, 이런 행보는 모비스에 위협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 대다수 국내 부품업체들이 모비스를 ‘최종 관문’으로 여기는 것과 달리 LG전자는 독자적으로 완성차 기업과 접촉하고 있어서다. 아울러 부품업체들에 LG전자란 새로운 존재는 또 하나의 대형 공급업체가 생겼다는 의미가 될 수도 있다.   

기존의 탑티어 부품업체들은 변화의 바람을 피할 수 없게 됐다.[사진=현대모비스 제공]
기존의 탑티어 부품업체들은 변화의 바람을 피할 수 없게 됐다.[사진=현대모비스 제공]

유병용 경일대(자율주행자동차학) 교수의 설명을 들어보자. “국내 부품업계는 내수 중심의 기형적인 구조 때문에 특정 기업에 종속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측면에서 글로벌 공급망을 보유한 새로운 사업자의 등장은 부품업계에 ‘연쇄이동’을 불러올 수 있다.”  

물론 “모비스의 아성이 쉽게 무너질 가능성은 높지 않다”는 의견도 많다. LG전자와 현대모비스 사이에 분명한 ‘계급차’는 존재해서다. LG전자는 개별 부품을 통합ㆍ설계하는 모듈화에는 능하지만 시스템화에는 아직 이르지 못한 탓이다. 

이선봉 계명대(자동차시스템공학과) 교수는 “모듈화 기술만으로는 LG전자도 여느 2차 벤더에 지나지 않을 것”이라며 “LG전자가 현대모비스를 넘어 강력한 ‘공급 파워’를 가지려면 글로벌 완성차 기업들의 주문을 완벽하게 커스터마이징할 수 있는 시스템화 기술이 필수”라고 말했다. 

꼭대기의 주인 바뀔 수 있을까 

모비스 측은 “회사 차원에서 따로 언급할만한 내용이 아니다”면서 말을 아꼈지만 한 외국계 완성차 기업의 관계자는 이렇게 말했다. “핸들의 감도, 브레이크의 강도처럼 각 부품에 부여한 설정값의 미세한 차이에 따라 자동차의 성능이 달라진다. 이 부분에서 모비스만큼 탁월한 감각을 가진 회사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기존의 ‘벤더 시스템’에 균열이 생기고 있는 건 분명하다. LG전자가 탁월한 기술력으로 완성차 기업을 넘어 ‘애플카’ ‘구글카’의 납품업체가 된다면, 기존 ‘벤더 시스템’은 더 빠르게 붕괴할 수 있다. 국내의 2차ㆍ3차 벤더가 이스라엘의 모빌아이처럼 되지 말란 법도 없다. 김용진 서강대(경영학) 교수 역시 “기술적으로 아예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업체들이 나타날수록 벤더의 파편화는 가속화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윤정희 더스쿠프 기자
heartbring@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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