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납치된 서유럽-혹은 중앙 유럽의 비극」
유럽 문화예술사에서 중앙 유럽이 가지는 중요성과 정체성

쿤테라는 “체코, 헝가리, 폴란드는 로마 가톨릭 문화에 뿌리를 둔 서유럽 문화권에 속한다”고 말한다.[일러스트=게티이미지뱅크]
쿤테라는 “체코, 헝가리, 폴란드는 로마 가톨릭 문화에 뿌리를 둔 서유럽 문화권에 속한다”고 말한다.[일러스트=게티이미지뱅크]

밀란 쿤데라는 소련의 프라하 침공 전후를 배경으로 한 영화 ‘프라하의 봄’의 원작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으로 잘 알려진 작가다. 체코슬로바키아 출신으로 ‘프라하의 봄(1968년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일어난 민주자유화운동)’이 좌절될 때까지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운동’을 주도했던 쿤데라는 모든 공직에서 해직당하고 저서가 압수되는 등 수모를 겪은 후 1975년 프랑스로 이주해 작품 활동을 이어갔다. 

신간 「납치된 서유럽-혹은 중앙 유럽의 비극」은 밀란 쿤데라의 사상적 원점을 보여주는 에세이 모음이다. 1967년 체코슬로바키아 작가 대회의 연설문 ‘문학과 약소민족들’과 프랑스 정착 이후인 1983년 갈리마르 출판사 간행 잡지 ‘데바(Le Debat)’에 실린 시론 「납치된 서유럽-혹은 중앙 유럽의 비극」을 한데 엮었다. 

이 글들을 쓸 당시 쿤데라는 오랜 침체 끝에 황금기를 맞은 조국의 문화가 스탈린주의라는 또 다른 장애물을 만나 파괴되며 쇠락할 것을 예감한다. ‘문학과 약소민족들’에서 발견되는 이같은 문제의식은 「납치된 서유럽」에서 거대 통합을 향해 나아가던 서유럽과, 그들과 같은 역사적·문화적 뿌리를 공유함에도 외면당하는 중앙 유럽 약소국들의 운명으로 확장한다. 

쿤데라는 이 글들에서 소련의 탄압하에 언어와 문화가 위협받는 중앙 유럽 약소국들이 국가 정체성을 잃고, 결국엔 서구 세계마저 파괴될 것이라 호소하며 서방의 각성을 촉구한다. 

“‘납치된 서유럽’이란 중앙 유럽이 유럽의 정치·사회·문화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을 간과해 서유럽 자체가 사라질 위험을 가리킨다.” 쿤데라에 의하면 이는 세계사에서 주도적 위치에 있지 못하고 변방에 자리함으로써 늘 소멸 위기에 시달리는 중앙 유럽의 작은 국가(구체적으로 오스트리아·체코·헝가리·폴란드)들의 비극적 처지를 뜻한다. 

글이 발표될 당시 오스트리아를 제외한 세 나라는 러시아의 위성 국가로 전락하면서 흔히 동유럽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쿤데라는 “동유럽은 비잔틴, 정교회 문화에 뿌리를 두는 반면 체코·헝가리·폴란드는 로마 가톨릭 문화에 뿌리를 둔 서유럽 문화권에 속한다”고 말한다. 러시아의 서진西進 욕망으로 ‘슬라브 세계’라는 실체 없는 개념에 묶여 동유럽으로 인식됐다는 얘기다. 

쿤데라는 “중앙 유럽이 바로크 문화를 꽃피우고 서유럽과의 문화 교류를 통해 유럽 문화 사조 발전에 기여했음에도 이들 나라의 중요성은 점점 간과돼 이젠 그 존재조차 희미해졌다”고 지적한다. 

그렇다면 중앙 유럽의 망각과 소멸을 가장 강력히 추동하는 것은 러시아란 걸까. 쿤데라는 “중앙 유럽의 진정한 비극은 러시아가 아니라 서유럽”이라고 강조한다. 정확히 말하면 서유럽 사회의 상업화 물결에 의한 다종다양한 문화의 소멸이 원인이란 것이다. 서유럽은 상업적 변화로 가장 강력한 정체성으로서의 문화를 부정함으로써 스스로 존재감을 상실하고, 그럼으로써 ‘최대 다양성’을 문화적 가치로 표방하던 중앙 유럽은 더 철저하게 지워졌다고 서술한다. 

한번도 단행본에 포함되지 않았던 두 편의 에세이는 수십 년이 지난 2021년 11월 프랑스 갈리마르의 「데바 총서」로 출간됐는데, 공교롭게도 몇 개월 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일어나 이를 예견한 듯한 그의 글들은 다시 한번 화제를 불러모았다. 

세 가지 스토리 

「사유 식탁」
알랭 드 보통·인생학교 지음|오렌지디 펴냄


“누군가를 위해 요리하고 함께 식사한다는 것은 사랑 고백과 같다.” 연애와 철학을 접목한 독특한 글쓰기로 잘 알려진 알랭 드 보통. 그가 이번엔 ‘요리책’으로 한국 독자를 찾아왔다. 음식과 대화를 넘나들며 유무형의 레시피를 제안하고, 성찰과 자기 위로의 기회를 독자들에게 건넨다. 132가지의 레시피와 버무려진 진지한 사유를 읽어나가다 보면 요리를 통해 마음을 어루만지는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다. 

「모두 거짓말을 한다」
세스 스티븐스 다비도위츠 지음|더퀘스트 펴냄 


‘대학교수의 90% 이상은 자신이 평균 이상의 성과를 낸다고 주장한다’ ‘고등학교 졸업생의 4분의 1은 자신의 사교성이 상위 1% 안에 든다고 여긴다’ 이 책의 저자는 “이렇듯 사람들은 쉽게 거짓말을 하고, 자기 자신마저 속인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인종주의, 정신질환, 성생활, 아동학대, 광고, 종교 등 다양한 주제에 걸쳐 인간의 감춰진 본성을 드러낸다. 우리가 지금까지 믿어온 지식 대부분이 어떻게 거짓으로 왜곡돼 왔는지 보여준다. 


「디지털 폭식 사회」
이광석 지음|인물과사상사 펴냄 


‘별점’이 영세 자영업자의 생존을 좌우하고, 공유 택시의 배차 알고리즘이 택시기사의 노동 방식을 길들인다. 플랫폼의 알고리즘이 사회의 편견을 확대 재생산한다. 디지털 플랫폼이 장악한 우리의 현실은 이대로 괜찮은 걸까. 이 책은 우리 삶을 파고든 기술만능주의와 그 기술 효과가 미치는 독성과 폭력을 고발한다. 저자는 “디지털의 달콤한 유혹에 빠져 그것의 폭주와 폭식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다”고 꼬집는다. 

이지은 더스쿠프 기자  
suujuu@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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