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지이야기➌ 대한적십자사 자화상
국민의 회비와 헌혈로 운영
조직법상 현직 대통령이 명예회장
사무총장 임명에 장관들 관여
고위직 모럴해저드 빨간불
전 사무총장 징계 숨긴 채 임명
법인카드 유용 혐의로 불명예 퇴진
현 사무총장 출퇴근 기록 없어 질타
성비위 인사가 미래 설계하기도
내부감사 시스템 작동하지 않아

# 워치독(Watch dog·감시견)의 역할은 정부·기업·조직의 법적 부정과 도덕적 해이를 통제하는 거다.  워치독이 울지 않는 조직은 그래서 퇴행적일 뿐만 아니라 모럴해저드의 늪에 빠질 가능성이 높다. 

# 여기 한 공공기관이 있다. 누군가 징계 이력을 숨긴 채 고위직 임원에 올라도 내부감사실은 움직이지 않는다. 그런 그가 법인카드를 유용하고, 내규에 없는 값비싼 사택舍宅에 주거해도 별반 다르지 않다. 심지어 그 자리에만 오르면 ‘출퇴근 기록’을 남기지 않지만 내부 감시망은 침묵한다. 웃지 못할 불공정 특혜다. 

# 이뿐만이 아니다. 계약직 직원을 성추행한 혐의로 징계를 받은 이가 기관의 미래를 설계하는 자리에 올라도, 이를 두고 비판의 목소리가 차고 넘쳐도, 감사실은 복지부동한다. 

# 이 기관의 정체는 국민의 혈액과 회비 등으로 운영되는 대한적십자사다. 더스쿠프가 이곳의 민낯을 심층 취재했다. 그 마지막 편 데스크와 현장의 관점이다. 

감시견이 짖지 않는 조직은 퇴행적일 수밖에 없다. 사진은 지난해 10월 한덕수 총리가 대한적십자사 117주년 기념식에 참석해 축사를 하고 있는 모습. [사진=뉴시스]
감시견이 짖지 않는 조직은 퇴행적일 수밖에 없다. 사진은 지난해 10월 한덕수 총리가 대한적십자사 117주년 기념식에 참석해 축사를 하고 있는 모습. [사진=뉴시스]

# 임기 없는 2인자

‘공공기관’ 대한적십자사 사무총장의 공식 서열은 넘버2다. 언뜻 1인자의 그늘에 가려진 2인자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회장(옛 총재)이 비상근직이란 점을 감안하면, 조직 내 ‘최고 서열’은 사실상 사무총장이다.

역할과 임기만 봐도 그렇다. 회장의 지시를 받긴 하지만, 사무총장은 조직의 사무를 총괄한다. 정해진 임기도 없다. 별문제만 일으키지 않는다면 ‘무한권력’을 누릴 수 있는 셈이다. 

사무총장을 임명하는 절차는 당연히 까다롭다. 회장이 사무총장을 공식적으로 낙점하기 전, 대한적십자사 중앙위원회 위원 28명의 승인을 얻어야 한다. 28명의 명단엔 정부 부처의 장관 8명이 포함돼 있다.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기획재정부장관, 교육부장관, 통일부장관, 외교부장관, 법무부장관, 국방부장관, 행정안전부장관, 보건복지부장관…. 내각의 장관 18명 중 무려 44.5%가 사무총장의 인선에 관여한다는 얘기다. 그만큼 대한적십자사의 사무총장직은 선임되는 것조차 쉽지 않은 자리다. 이런 상황에서 전·현직 사무총장들은 법과 규정이란 엄정한 틀 안에서 제 역할을 해냈거나 하고 있을까. 

# 사무총장의 비위

유감이다. 그렇지 않다. 실상을 하나씩 살펴보자. 2020년 11월 25대 사무총장에 오른 A씨는 임명 전부터 구설에 휘말렸다. 인선 과정에서 ‘직원운영규정 제33조 품위유지의무’ ‘경남혈액원 성희롱예방지침 제5조’ 등을 위반해 받은 징계 전력을 은폐했기 때문이다. 특히 A씨가 경남혈액원에 근무하던 시절, 간호사들에게 던진 말은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다. “살쪄서 유니폼 하의가 타이트하다” “바지가 너무 붙는다” “일자 몸매다”….

그런데도 대한적십자사는 눈과 귀를 모조리 닫았다. “A씨의 임명 과정에서 징계 전력이 담긴 서류가 누락된 건 사실이지만 절차상 문제는 없다”고 강변했다.

하지만 잘못 끼운 첫단추는 끝내 ‘화’를 불렀다. 사무총장에 오른 뒤 A씨는 법인카드를 멋대로 쓰고, 규정에도 없는 값비싼 사택舍宅에 머물렀다. 감사 시스템을 작동해도 모자랄 판에 대한적십자사는 되레 ‘불법적 공모’를 택했다. A씨가 법인카드를 유용했다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내부결재 서류를 허위로 작성했다. 심지어 그가 사택에 머무를 수 있도록 근거조항까지 신설해줬다. 

이런 불법의 꼬리는 내부 저항이 일고 나서야 끊겼다. 대한적십자사 노조가 A씨를 2021년 3월 8일 업무상 배임 혐의로 고발했고, 그로부터 23일 후인 3월 31일 그는 사직서를 냈다. A씨가 임명된 날로부터 고작 100여일이 흐른 시점이었다. 

대한적십자사는 국민의 헌혈과 적십자회비 등으로 운영된다. [사진=뉴시스]
대한적십자사는 국민의 헌혈과 적십자회비 등으로 운영된다. [사진=뉴시스]

# 출퇴근 기록과 관용차 

그럼 A씨가 물러난 후 사무총장에 오른 이상천(26대·2021년 11월 임명)씨는 어떨까. A씨와 달랐을까. 그렇지 않다. 놀랍게도 대한적십자사 본사엔 그가 ‘사무총장’으로 근무한 흔적이 없다. 이 기관은 ‘직원카드’가 인식됐느냐 아니냐로 출퇴근을 확인하는데, 이씨는 지난해 8월 16일까지 카드를 찍지 않고 회사를 오갔다.

[※참고: 2022년 8월 16일은 국회에 감사 자료를 제출하기 위해 설정한 기준점이다. 국회의 자료 요구가 없었다면 이씨의 출퇴근 기록은 지금까지 없었을지 모른다. 그럼에도 대한적십자사 측은 “사무총장은 관용차를 타고 다니기 때문에 출퇴근 기록이 없는 것”이란 황당한 해명을 늘어놨다.]

그렇다고 본사의 고위직 근태 관리가 허술했던 것도 아니다. 기획조정실장, 국내사업본부장 등 본사 내 다른 임원은 직원카드를 제대로 찍고 출퇴근했다. 사무총장 이씨만 ‘불공정한 특혜’를 누리면서 출퇴근했다는 건데, 공교롭게도 본사에 그런 이가 또 있었다.

직전 사무총장인 A씨다. 전·현직 사무총장이 모두 ‘제멋대로 출퇴근’을 일삼았다는 얘기다. 명색이 ‘공공기관’인 대한적십자사에서 이런 일이 벌어져도 괜찮은 걸까. 이 기관의 방향키는 올바른 쪽으로 향해 있는 걸까. 

# 피플 리스크와 감사 

이 심층적인 질문을 파헤치기 전에 관점을 ‘인적 리스크(People Risk)’로 돌려보자. 조직 구성원의 일탈행위는 비의도적 행위와 의도적 행위로 나눌 수 있다. 전자는 실수, 후자는 부정不正으로 수렴한다. 

이중 실수는 일련의 매뉴얼과 시스템을 통해 통제할 수 있다. 반면, 부정은 구성원의 속마음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에 예방하거나 통제하는 게 어렵다. 특히 규율이나 제도가 느슨하게 적용되기 쉬운 고위직의 의도적 일탈행위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과 같다. 

이럴 때 필요한 게 위험 징후를 감지할 수 있는 감사 시스템이다. 글로벌 전략컨설팅 업체 ‘매킨지’는 이를 흥미롭게 해석했다. “… 감독 구조는 필수적이지만, 이 역시 위험을 관리하는 방법의 일부다. 몇몇 조직에선 위험의 첫번째 방어선인 구성원의 태도와 행동을 관리하지 않을 때 위기가 발생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소위 말하는 ‘위험 문화’는 모든 조직의 일상을 지배한다….” 쉽게 말해, 감사 시스템의 효율적인 작동 여부를 결정하는 변수는 ‘제도’가 아니라 ‘문화’라는 게 매킨지의 견해다.

매킨지가 던진 학술적 논제를 좀 더 쉽게 풀어보자. 리스크 관리에 능숙한 조직은 문제가 발생했을 때 이 사실을 발빠르게 ‘명령 체계’ 위에 얹는다. 신속한 보고를 통해 감사 시스템을 작동시키기 위해서다. 좋든 나쁘든 위험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문화를 갖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반대로 리스크를 감추는 데 급급한 조직은 감사 시스템을 장막 속에 가둔다. 위험·위기란 나쁜 소식이 조직 안팎에 퍼지는 걸 두려워하는 문화 탓이다. 이런 문화를 갖고 있는 조직의 감사시스템은 퇴행적이거나 형식적일 가능성이 높다. 문제는 대한적십자사의 감사 시스템이 ‘후자’에 가깝다는 거다. 

# 감사실 복지부동 

관점을 다시 전·현직 사무총장 문제로 돌려보자. 징계를 감춘 채 사무총장에 오른 A씨는 숱한 논란에 휘말렸는데도 감사를 받지 않았다. 법인카드 유용, 불법적 사택 입주 등의 사실이 밝혀졌을 때도 감사 시스템은 작동하지 않았다. 현 사무총장 이씨도 다르지 않다. 지난해 국정감사에서 ‘출퇴근 기록을 남기지 않은 건 도적적 해이의 전형’이란 질타를 받았지만, 이씨를 향한 감사는 이뤄지지 않았다. 

감사실이 복지부동한 사례는 이뿐만이 아니다. 계약직 여직원을 성추행한 혐의로 징계를 받은 B씨는 2021년 대한적십자사의 청사진을 그리는 미래전략본부 ‘수장’에 올랐다. 그 이후엔 보란 듯이 기관장에 해당하는 2급으로 승진하는 영예까지 누렸다. 본사 곳곳에서 ‘성비위 공화국’이란 비아냥이 쏟아지고, 노조까지 나서 ‘길거리 시위’를 벌였지만, 감사실은 침묵했다. 

냉동실 4개와 냉장실 2개, 여기에 7억원어치의 혈액제제를 날려버린 2022년 7월 대구경북혈액원의 화재 사건 때도 마찬가지였다. 대구경북혈액원 주변에선 ‘직원이 내버린 담배가 화재의 시작점이었다’는 소문과 ‘직원 2명이 경찰 조사를 받았다’는 사실이 함께 나돌았지만, 감사실은 단 한번도 그곳을 방문하지 않았다. 

제대로 된 감사 한번 진행하지 않은 상황에서 대한적십자사는 대외적으로 ‘(대구경북혈액원) 화재는 노후시설 때문’이란 회피성 발언만 거듭했다. 감사실은 해당 직원이 지난해 11월 실화失火(실수로 불을 냄) 혐의로 약식기소된 후에야 ‘때늦은 감사’에 착수했다. 화재사고가 발생한 지 5개월 만이었다. 이는 대한적십자사의 감사 시스템이 퇴행적일 뿐만 아니라 ‘면책용’으로 전락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례다. 

# 흔들리는 도덕적 우위 

불법과 편법, 성추행과 승진, 불공정한 특혜, 제멋대로 출근…. 대한적십자사란 장막 안에서 ‘상상을 뛰어넘는 일’이 공공연하게 벌어지자, 누군가는 이렇게 비꼬며 묻기도 한다. “대한적십자사는 누구도 손댈 수 없는 불가침의 영역에 존재하는가.”

당연히 아니다. 도리어 냉정한 감시와 면밀한 주의를 기울여 지켜봐야 할 기관이다. 대한적십자사는 국가복지사업의 중추다. 재난재해 구호, 남북이산가족 상봉, 해외재난복구 지원, 여기에 혈액사업까지 담당한다. 올해 예산은 연 1조516억원에 이르는데, 헌혈(3273억원), 적십자회비(837억원), 정부 보조금(481억원) 등으로 이뤄져 있다. 한마디로 대한적십자사는 ‘국민의 돈과 피’로 운용되는 기관이나 다름없는 셈이다.
 
이 때문에 대한적십자사 구성원은 준엄한 윤리적 잣대를 요구받는다. 대한적십자사 직원복무관리엔 국가공무원법을 준용한다. 46개 조항의 임직원 행동강령도 있다. 핵심은 반부패와 청렴이다. 

이렇게 ‘도덕적 우위’가 필수불가결한 기관에서 근무하는 고위직 임원들이 어떻게 ‘법망 밖’에서 춤을 추고 있는지, 이를 통제해야 할 감사실은 왜 손을 놓고 있는지 도무지 알 길이 없다. 

국민의 헌혈 등으로 운영되는 대한적십자사는 도덕적 우위를 견지해야 한다. [사진=뉴시스]
국민의 헌혈 등으로 운영되는 대한적십자사는 도덕적 우위를 견지해야 한다. [사진=뉴시스]

# 명예회장과 전·현직 대통령 

대한적십자사의 직원은 4375명이다. 소중한 시간을 쪼개 헌신하는 봉사자는 12만명에 이른다(2022년 기준). 이런 숭고한 사명감을 품은 이들이 대한적십자사 고위직의 ‘모럴해저드’를 어떤 눈으로 바라볼지는 짐작하고도 남을 일이다. ‘징계 이력’을 숨긴 채 조직의 2인자에 임명되고, 그 자리에만 오르면 유령처럼 ‘출퇴근 기록’을 남기지 않는 공공기관이 이곳 말고 또 있을 리 만무해서다. 

공교롭게도 대한적십자사의 조직법상 명예회장은 대통령이다. 얼마 전까진 변호사 문재인 전 대통령이 명예회장이었고, 지금은 헌법주의자 윤석열 대통령이 명예회장이다. 대한적십자사 적폐 앞에서 두 사람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이윤찬 더스쿠프 편집장 
chan4877@thescoop.co.kr
  
김다린·강서구 더스쿠프 기자 
quill@thescoop.co.kr

※ 533호 데스크와 현장의 관점은 2월 20일 발간한 더스쿠프 커버 총론입니다. 2월 22일 출고한 「출퇴근 기록 안 남기는 사람들」 등과 함께 읽으시면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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