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지이야기 | 데스크와 현장의 관점 
경제 현장에 도사린 수많은 변수
21세기 정부 효율적 처방전 마련해야
이념에 매몰된 역대 권력자의 처방전  
文 정부 소득주도성장 한계 노출 
尹 정부 비즈니스 프렌들리 괜찮을까
세일즈 외교 성과와 말실수란 리스크 
난방비 폭탄에 공공요금까지 꿈틀 
취약계층 무너지는 데 감세책 강행 

오늘날 정부의 능력은 적절한 대안과 처방전을 제시하는 것이다. [일러스트=게티이미지뱅크]
오늘날 정부의 능력은 적절한 대안과 처방전을 제시하는 것이다. [일러스트=게티이미지뱅크]

# 엉뚱한 경제모델 

1949년 런던 정치경제대학교(LES) 학생 윌리엄 필립스는 수력 컴퓨터 ‘모니악(MONIAC)’을 개발했다. 투자·수출입·통화량 등의 변화가 영국 경제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물로 분석하기 위해서였다.

2m 높이의 커다란 물탱크, 파이프, 밸브와 펌프, 그리고 수문으로 이뤄진 모니악의 분석기법은 대략 이랬다.  “탱크에 물을 넣으면 파이프에 물이 흐른다. 시장에 돈이 도는 것처럼 말이다. 통화공급량을 늘렸을 때 어떤 효과가 나타나는지 보고 싶으면 밸브를 열어 더 많은 물을 내려보내면 된다.” 

지금 와서 보면 엉뚱한 모델인 모니악은 놀랍게도 하버드 경영대학원, 호주 멜버른대에서 경제이론을 검증하기 위한 측정도구로 채택했다. 글로벌 자동차 제조업체 포드와 과테말라 중앙은행도 모니악을 도입했다. 시장의 미래를 가설과 실험을 통해 예측할 수 있다는 ‘실증주의’가 파도처럼 밀려오던 시절의 일이었다.

[※참고: 모니악을 개발한 윌리엄 필립스는 훗날 경제학자가 됐다. 케인스 학파의 완전고용 재정정책에 긍정적인 영향을 준 학설 ‘필립스 곡선’을 만든 학자가 바로 그다. ‘필립스 곡선’은 높은 물가상승률을 감당해 내야 실업률이 떨어진다는 걸 주창한 이론이다.] 

# 거장의 과신 

실증주의는 꽤 오랜 기간 시장을 지배했다. 많은 경제학자는 미래 시장을 예측하기 위해 연산력이 뛰어난 제2, 제3의 모니악을 활용했다. 그럴수록 경제학은 마치 ‘자연과학’인 것처럼 무언가를 입증하거나 예측하는 도구로 쓰였고, 그 밑단에선 경제학의 정확성을 맹신하는 기류가 형성됐다. 흥미롭게도 이를 주도한 건 이름만 대면 알 법한 경제학계의 거장들이었다. 

실례를 들어보자. ‘효율적 시장 가설’을 창시한 유진 파머 시카고대 교수는 2007년 매거진 더 리전(The Region)과의 인터뷰에서 유명한 말을 남겼다. “거품이란 단어는 날 미치게 만든다(The word ‘bubble’ drives me nuts).” 이 말은 합리적인 시장엔 거품 따윈 없다는 의미다.

벤 버냉키 미 연방준비제도(연준·Fed) 전 의장도 2005년 ‘의장 인준 청문회’에서 현대 경제학을 발판 삼아 성장한 금융 시스템의 안정성을 과신했다. “금융시장의 유동성과 유연성은 대단히 좋아졌다. 주요 금융센터의 거래 시스템이 위기에 견딜 수 있는 힘도 강해졌다.”

윤석열 정부는 친기업 전략을 꺼내들었다. 이명박, 박근혜 집권 시절과 같은 전략이다. [사진=뉴시스]
윤석열 정부는 친기업 전략을 꺼내들었다. 이명박, 박근혜 집권 시절과 같은 전략이다. [사진=뉴시스]

두 사람만 그랬던 건 아니다. 거장이란 타이틀로 치장한 학자들은 경제학을 ‘실증적’으로 활용하면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고 여겼다. 이를 신봉한 정책 결정자들은 경제학이 제공한 미래의 밑그림을 추종했다. 하지만 시장은 ‘거장의 과신’ 밖에서 춤을 췄다.

2007년 미국에서 ‘대출상품 부실이슈(서브프라임 모기지)’가 터지면서 주택 시장이 무너졌다. 2008년엔 글로벌 투자은행 ‘리먼브러더스’가 붕괴하는 예기치 못한 사태가 벌어졌다. 경제학의 예측력과 실증력을 과신했던 경제학자들로선 충격적인 일이었다. 

# 미래, 짐작의 연속 

‘리먼 사태’ 이후 경제학계 안팎에선 자성의 목소리가 쏟아져 나왔다. 폴 크루그먼 뉴욕시립대 교수는 “경제학자들은 미국의 금융시스템이 얼마나 허약한지 이해하지 못했다”고 비판했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2013년)인 로버트 실러 예일대 교수는 “경제 전문가들이 기술적·수학적 모델에 집착했던 게 위기의 원인으로 작용했다”고 꼬집었다. 이런 반성의 물결은 ‘경제학 과신론’이 힘을 잃고 있다는 방증이기도 했다. 

사실 미래 경제를 내다보는 과정은 ‘짐작의 연속’이다. 시장엔 통제해야 할 변수가 너무 많다. 하나의 변수가 움직이면, 다른 하나의 변수가 꿈틀댄다. 평소엔 ‘숨어 있던’ 변수가 느닷없이 등장해 영향력을 발휘할 때도 있다.

이 때문인지 현대경제학의 아버지 폴 새뮤얼슨은 절대적인 객관성을 확보할 수 없는 실증주의의 한계를 지적했다. “모든 과학은 제한된 지식을 바탕으로 한다. 시간이 지나면 지식의 양은 늘어나지만 이론이 모든 것을 설명할 순 없다(2010년 중앙선데이 인터뷰).” 

# 명의와 처방전 

폴 새뮤얼슨의 말대로 인간의 지식은 제한적이다. 세상엔 이론이나 모델로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이 차고 넘친다. 경제학도 마찬가지다. 실증모델을 통해 치밀하게 계산한 경제학적 분석도 가설을 벗어난 변수 앞에선 속수무책일 때가 많다. 

이는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시장에서 ‘방향키’를 잡아야 하는 정부에 시사하는 점이 많다. 이제 경제학·통계학 등 이론을 통해 미래를 예측하는 건 무의미해졌다. 숱한 가변적·유동적 요인이 미래를 휩싸고 있어서다.

그래서 오늘날 정부에 필요한 능력은 현 상황을 진단한 다음 거기에 걸맞은 ‘처방전(정책)’을 내놓는 거다. ‘병에 걸릴지도 모른다’고 겁을 주기보단 ‘이 약을 먹으면 병을 예방할 수 있다’고 처방하는 이를 명의名醫라고 일컫듯 말이다. 

난방비 폭탄은 취약계층의 곤궁함을 보여주는 단면이다. [사진 | 뉴시스, 자료 | 통계청, 더스쿠프]
난방비 폭탄은 취약계층의 곤궁함을 보여주는 단면이다. [사진 | 뉴시스, 자료 | 통계청, 더스쿠프]

자! 이쯤에서 관점을 돌려 우리나라의 심상찮은 경제 지표를 살펴보자. 총수출에서 총수입을 뺀 국내 무역수지는 2022년 4월 이후 9개월째 적자다. 올 1월 1~20일 무역수지도 –102억600만 달러를 기록했다. 지금과 같은 추세가 이어진다면 10개월 연속 적자에 빠질 공산이 크다. 수출로 먹고사는 우리나라엔 치명적인 지표다.

당연히 경제성장률 전망치도 둔화하고 있다. 지금으로선 2%대 성장률도 감히 품기 어려운 기대치가 됐다. 민생도 고달프다. 3고高(고물가‧고유가‧고금리)는 여전히 서민을 벼랑으로 몰아세우고 있다. 찬바람을 피할 언덕마저 잃은 취약계층의 삶은 말할 것도 없다.

최근 터진 ‘난방비 폭탄’은 취약계층의 곤궁함을 보여주는 애달픈 단면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지하철·버스비 등 교통요금 인상까지 꿈틀대고 있다. 이렇게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윤석열 정부는 ‘적절한 처방전’을 마련했을까.  

# 사실상 같은 길 

봄, 여름, 가을…, 벌써 네번째 계절이다. 봄바람을 맞고 돛을 올린 ‘윤석열호號’는 어느덧 출항 260여일(1월 25일 기준)을 맞았다. 정책의 뼈대를 세우는 대통령직인수위 시절까지 포함하면 300일이 훌쩍 넘는다. 거의 1년이다. 이젠 ‘전前 정부 탓’은 통하지 않는 시기다. 여소야대 정국 역시 상생과 협치로 풀고도 남았을 때다. 이쯤 됐으면 어떤 정책이든 심판대에 올려놔도 무방하다.  

그럼에도 정책을 평가하는 시선은 좀 더 ‘먼 곳’에 두는 게 좋다. 정책이 시장에 침투하려면 생각보다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한 법이다. 다만, 우려스러운 점은 있다. 직전 정부의 실패 속에서 탄생한 현 정부가 색깔만 달리했을 뿐 사실상 그들과 ‘같은 길’을 걷고 있어서다. 

하나씩 비교해보자. 경기침체와 양극화란 난제를 풀기 위해 문재인 정부는 ‘소득주도성장’이란 처방전을 꺼내 들었다. 경제 밑단부터 활력이 돌도록 만들겠다는 일종의 ‘바텀-업(Bottom-up)’ 전략이었다. 이를 두고 지금의 집권여당 쪽에선 ‘경제는 이념이 아니다’ ‘경제학엔 존재하지도 않는 이론이다’면서 거칠게 비판했고, 실제로 이 정책은 실패로 끝났다는 평가가 많다.  

2023년 한국 경제는 순탄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정부의 적절한 처방전이 필요할 때다. [사진=뉴시스]
2023년 한국 경제는 순탄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정부의 적절한 처방전이 필요할 때다. [사진=뉴시스]

그럼 윤석열 정부는 어떨까. 이념을 배제한 채 냉정하면서도 합리적인 정책을 선보였을까. 그렇지 않다. 윤 정부가 국민 앞에 내놓은 처방전은 ‘이익주도성장’이다. 대기업과 고소득층의 세금을 줄여주고, 대못(규제)을 뽑아내 시장에 자유와 활력을 불어넣겠다는 거다. 경제 윗단에 돈이 돌면, ‘착한 경제주체’들이 그 밑단까지 순순히 돈을 흘려보낼 것이라는 게 이들의 생각이다. 

하지만 이 또한 시장과 경제주체의 합리성을 맹신한 ‘자유주의’에 매몰된 정책이란 비판을 받고 있다. 시장의 자유화를 논하기 전에 시장의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는지 검토하는 절차를 건너뛰었다는 지적도 잇따른다.

더구나 이익주도성장의 핵심인 ‘낙수효과落水效果(trickle-down effect)’는 같은 철학을 공유했던 이명박·박근혜 정부 시절 이미 실패했던 모델이기도 하다. 이쯤 되면 문 정부나 윤 정부나 ‘도긴개긴’이다. 

주병기 서울대(경제학) 교수는 이렇게 꼬집었다. “윤 정부가 경제정책의 근간으로 삼은 낙수효과는 관료의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한 시대착오적인 정책이다. 경제가 일정 수준 이상 높아지면 낙수효과가 작동하기 어렵다는 게 학계와 주요 국제기구가 인정한 정설이다.”  

# 이념에 갇힌 처방전 

2001년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조지프 스티글리츠 컬럼비아대 교수는 그 이듬해 잭슨빌국제위원회(World Affairs Council of Jacksonville)가 주최한 강연회에서 이념에 갇힌 정책의 위험성을 설파했다.

“세계화는 기본 이념인 자유화(Liberalization) 등에 집착한 나머지 미처 준비가 되지 않은 지역에까지 자유화를 강요했다. 그 결과, 정책이 실패로 돌아가는 부작용을 피하지 못했다.” 

경제는 흐름이다. 직전 정부의 성과가 다음 정부로 이어지는 건 경제의 섭리다. 이런 경제의 자연적인 순환을 이념으로 끊는 건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권력을 잡은 이들이 ‘이념을 투영한’ 정책을 펼쳐놓는 건 착시효과에 취해서다.

이념을  ‘처방전’에 넣는 순간, 동조하는 진영은 뜨겁게 호응한다. 하지만 무조건적인 호응은 언제나 부작용을 양산한다. 이명박 정부도, 박근혜 정부도, 하물며 문재인 정부도 ‘이념적 처방전’에 몰두하다 실패란 멍에를 썼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진영을 위한 정책을 폈다는 비판을 받았다. 윤석열 대통령을 향한 평가도 비슷하다. [사진=뉴시스]
문재인 전 대통령은 진영을 위한 정책을 폈다는 비판을 받았다. 윤석열 대통령을 향한 평가도 비슷하다. [사진=뉴시스]

이 때문에 진영을 겨냥한 정부의 자찬自讚은 금물이다. 자신들의 성과를 따지려면 그 공과를 냉정하게 평가하고 진단하는 게 옳다. 현실은 이와 반대다. 대통령실과 집권여당(국민의힘)은 ‘UAE 국부펀드 투자 유치’를 직전 정부에선 해내지 못했던 세일즈 외교의 성과라고 자찬하고 있지만, 대통령의 말실수에서 기인한 위험요인은 애써 감추고 있다.

공교롭게도 이 역시 전 정부와 판박이다. 2017년 12월 청와대와 집권여당(더불어민주당)은 “문재인 대통령이 첫 중국 순방에서 사드(THAAD) 리스크를 털어냈다”면서 “3% 경제성장의 토대를 마련했다”고 자평했다. 하지만 그 이후에도 사드 문제는 수그러들기는커녕 우리 경제에 나쁜 영향을 미쳤다. 

정치는 ‘심판을 받아도’ 다음이 있다. 경제는 다르다. 무너지는 순간 민생은 죽고 위기는 걷잡을 수 없이 커진다. 윤 정부의 처방전은 과연 어떤 결과를 낳을까. 직전 정부와는 뭐가 다를까.  

이윤찬 더스쿠프 편집장 
chan4877@thescoop.co.kr
  
강서구·김다린 더스쿠프 기자 
ksg@thescoop.co.kr

※ 529호 데스크와 현장의 관점은 1월 23일 발간한 더스쿠프 커버 총론입니다. 이어지는 기사  「6가지 난제와 尹의 처방전」 등과 함께 읽으시면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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