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찰·열정·소통의 리더 이순신⓮
아들 학폭 문제로 낙마한 정순신
국가수사본부장 추천한 경찰청장
기초적 인사검증 맡았던 법무부
“몰랐다”“어쩔 수 없었다” 책임 회피

과거든 지금이든 잘못을 솔직하게 시인하는 고위 공직자나 정치인은 드물다. 혹자는 꽁무니를 빼거나 남의 탓으로 돌리기 일쑤다. 아들의 볼썽사나운 학폭 문제로 낙마한 정순신 변호사를 둘러싼 논란이 점입가경이다. 문제는 그를 국가수사본부장에 추천했던 경찰청장도, 그의 1차 인사검증을 맡았던 법무부도 책임을 회피하고 있다는 거다. 고위 공직자의 태도는 언제쯤 바뀔까. 

정순신 논란에 국민이 분노했지만, 정작 책임지는 이는 없다.[사진=뉴시스]
정순신 논란에 국민이 분노했지만, 정작 책임지는 이는 없다.[사진=뉴시스]

신임 부산첨사 정발은 부하들과 용감하게 싸우며 대항했으나 왜군 조총 10여발을 맞고 장렬하게 전사했다. 이렇게 부산진의 3000여 장병들은 최후의 1인까지 싸우다 모두 전사했다. 다대포성에서는 윤흥신이 하루를 버텼으나 역시 전사했고, 동래성에선 송상현이 분전했지만 성은 함락되고 말았다.

그럼에도 경상좌수사 박홍은 자신의 가족을 피난시킨 채 먼 산에 올라 부산성의 위급한 형세만 바라보며 관망만 했다. 우후 등 부하 군관들이 아군을 구원하자고 청했지만 박홍은 군사를 경솔히 움직일 수 없다며 움직이지 않았다.

수군대장인 박홍이 비겁한 태도를 보이자 부하 장수들은 태도를 바꿔 모두 도망치고 말았다. 그는 이런 와중에도 후일의 책임을 피하고자 장계를 올리고 병선 수십척과 무기와 군량미가 들어 있는 창고에 불을 놓고 달아났다. 박홍의 군관이던 오억년吳億年은 몇명 되지 않는 동료들과 함께 좌수영의 텅빈 성을 지키기 위해 격렬히 항거하다가 전사했다. 

이런 급박한 소식들은 이순신에게 쉴 새 없이 공문으로 날아들어 왔다. “함락됐습니다” “패했습니다” “회군했습니다” “막아낼 수가 없습니다” “후원해주십시오”…. 순신은 분하고 원통한 심정을 날마다 「난중일기」에 기록했다. 특히 이각과 박홍의 줄행랑 소식에는 “더욱 가슴이 아프다”고 썼다. 그러면서도 관할지역 장수들에게 군사와 병기, 병선을 정돈하라는 명령을 내려 출전 준비를 갖추도록 했다. 또한 전라감사, 병사, 우수사 등 각처에 이 사실을 알릴 것을 지시했다. 

순신의 가슴에 깊은 상처를 남긴 이각의 줄행랑 이야기를 들여다보자. 동래부사 송상현은 왜군이 침입했다는 경보를 전달받자 바로 경상좌병사 이각, 울산군수 이언성, 양산군수 조영규 등에게 통지해 구원을 청했다.

양산군수 조영규는 군사 2000명을 거느리고 다음날 동래성에 입성했다. 좌병사 이각은 조방장 홍윤관, 울산군수 이언성과 총 7000병마를 거느리고 같은 날에 도착했다. 2만여의 병마가 집결했다. 이때 부산첨사 정발이 전사하고, 좌수사 박홍이 성을 버리고 도주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이각은 이 소식을 듣더니 송상현에게 “여보, 동래영감! 나는 일도의 대장인즉 성 밖에서 도에 있는 여러 장수를 지휘할 것이니 영감은 성을 지키시오”라며 군사를 돌려 소산역蘇山驛으로 향했다. 

“같이 성을 지키며 나라를 위해 함께 죽읍시다.” 송상현의 제지에도 이각은 대꾸도 없이 성을 나가 버렸다. 사실 이각은 맹장으로 이름을 날리던 부산첨사 정발이 전사했다는 소식에 잔뜩 겁을 먹고 동래성을 빠져나온 것이다. 

자! 이쯤에서 현재 이야기를 해보자. 아들의 학폭 문제로 국가수사본부장에서 낙마한 정순신 변호사를 둘러싼 ‘책임 공방론’이 뜨겁다. 한편에선 정 변호사를 추천한 경찰청장의 책임을 꾸짖지만, 정작 청장은 “몰랐다”면서 인사검증을 맡은 법무부에 화살을 돌린다.

그렇다고 법무부가 속시원하게 잘못을 인정하는 것도 아니다.  법무부 장관은 ‘정무적 책임’은 인정했지만, “정 변호사가 밝히지 않았기 때문에 아들의 학폭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다”면서 책임의 사각지대로 은근슬쩍 밀어넣었다. 송사訟事 등 개인사와 관련한 부분은 당사자가 직접 말하지 않으면 그 문제를 확인할 수 없다는 취지의 말인데, 그렇다면 법무부가 왜 인사 검증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다. 

필자는 아쉬움이 남는다. 국민의 분노를 불러일으킨 사건 앞에서 경찰청장이 잘못을 깔끔하게 인정하고 고개를 숙였다면 어땠을까. 법무부 역시 인사 검증의 허술한 시스템을 운운하지 말고, 자신들의 검증 부실을 시인했다면 어땠을까. 우리 공직자들은 왜 책임 앞에서 꽁무니를 빼면서 달아날 생각부터 할까. 

다시 이순신 이야기로 돌아와보자. 좌병사가 꽁무니를 빼자 동래부사 송상현이 주장이 됐다. 울산군수 이언성을 좌위장 삼아 동문을, 양산군수 조영규를 우위장을 삼아 서문을, 조방장 홍윤관을 중위장 삼아 북문을 각기 지키게 하고 자기는 남문을 지키기로 했다. 

임진년 4월 14일, 왜군은 남문 밖 연병장에 개미떼처럼 모여 진을 치고 목패를 성 안으로 던졌다. 목패에는 “명을 토벌하고자 하니 귀국은 길을 빌려주기 원한다”고 쓰여 있었다. 송상현은 부하를 시켜 “죽기는 쉬우나 길을 빌려주기는 어렵다”는 말을 큰 목패에 써서 성위에 세우고 포를 쏴댔다. 문신이자 학자인 동래부사 송상현의 충의와 기개는 부산첨사 정발 못지않았다. 

다음날인 15일 아침, 왜군은 큰 인형을 만들어 동문 밖 광장에 세웠다. 높이가 100척에 달하는 인형을 본 성안 군사들은 지레 겁을 먹었다. 적들은 조총을 난사하며 운제(성을 공격할 때 사용하던 높은 사다리)를 성 동북쪽에 걸고 개미떼처럼 넘어오며 칼을 휘둘렀다. 울산군수 이언성은 적군에게 붙들렸다. 왜군은 살려달라고 애걸하는 이언성을 앞세우고 성내의 길을 안내하라고 윽박질렀다.

북문을 지키던 조방장 홍윤관은 적군이 동문을 무너뜨리고 성내로 들어와 남문으로 향하는 것을 보고 군사를 돌려 이를 막았다. 홍윤관은 맹렬히 싸워 적에게 많은 타격을 입혔지만 결국 탄환을 맞고 장렬하게 전사했다. 홍윤관의 군사가 전멸을 당한 뒤 왜군은 그 시체를 밟고 넘어 객사 앞으로 나왔다. 왜군의 잔인함은 끝이 없었다.

36명의 왜군 장군들이 이끄는 대규모 부대가 이번엔 양산군수 조영규 쪽으로 몰려왔다. 조 군수는 부하 2000명을 이끌고 적과 접전을 펼쳤다. 역부족이었다. 적의 총알을 맞은 그는 비장하게 전사하고 부하들도 전멸하다시피 했다. 이제 남은 건 남문의 본진뿐이었다.

앞뒤로 적의 공격을 받았지만 동래부사 송상현은 비장 송봉수, 김희수 등과 끝까지 싸웠다. 송상현은 “죽더라도 나라의 신하되는 절개와 예의를 잃지 않으리라”며 갑옷 위에 조복朝服을 걸쳐입고 조정이 있는 북쪽으로 네번 절을 한 뒤 전투를 독려했다.

경찰청장이 잘못을 깔끔하게 인정하고 고개를 숙였다면 어땠을까.[사진=뉴시스]
경찰청장이 잘못을 깔끔하게 인정하고 고개를 숙였다면 어땠을까.[사진=뉴시스]

이윽고 왜군이 돌입해 송상현을 칼로 치려 했지만 송상현은 태연부동했다. 왜군 중에 평조신 등이 달려드는 군사를 물리치고 송상현에게 피신하기를 권했다. 평조신이 한해 전 사신으로 왔을 때 송상현의 예의 밝은 후대를 받았던 인연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송상현은 자신의 부채에 글 몇 구절을 써 내려갔다. “외로운 성은 달무리에 갇힌 듯 적군에 포위됐는데 다른 진에서는 베개를 높이 하여 잠만 자고 있습니다. 군신의 의리가 무거우니 부자의 은정은 가벼이 해야겠습니다(孤城月暈 列鎭高枕 君臣義重 父子恩輕).”

부친 송흥복宋興復에게 보내는 결별사였다. 송상현은 왜군 장수의 칼을 빌려 동래성 남문루에서 순절했다. 송상현이 죽자 그 뒤를 이어 비장 송봉수, 김희수와 양리良吏 송백, 그리고 그 집 하인 신여노申汝櫓도 항복하지 않고 주장의 곁에서 죽음을 맞았다. 왜군 장수 종의지, 평조신 등이 송상현의 시체를 거둬 동문밖에 매장하고 송상현의 소실 김섬金蟾은 포로가 되어 일본으로 잡혀갔다. <다음호에 계속> 


이남석 더스쿠프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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