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엔 환율 8년 만에 최저치
미국 금리 동결, 원화 강세 영향
일본은행 금리 인상 여력 부족
엔저 장기화 땐 일 반도체 약진

원·엔 환율이 빠르게 하락하고 있다. 원·엔 환율은 지난 18일 장중 한때 100엔당 897.4원까지 떨어지며 2015년 이후 8년 만에 최저치를 기록했다. 원·엔 환율이 더 하락할 것에 베팅하는 국내 투자자들도 늘고 있다. 엔화 가치 하락의 이유는 무엇이고, 언제까지 계속될까. 

원·엔 환율이 8년 만에 최저치를 기록했다. [사진=뉴시스]
원·엔 환율이 8년 만에 최저치를 기록했다. [사진=뉴시스]

■ 8년 만의 800원대=지난 4월 26일 원·엔 환율은 100엔당 1004.17원이었다. 그런데 불과 두 달도 안 돼 지난 18일 장중 800원대까지 떨어졌다. 엔저에 베팅하는 국내 투자자들이 급증하고 있다. 국민·신한·하나·우리은행에 예치된 엔화 예금 잔액은 지난 4월 5788억엔에서 지난 16일 8320억엔으로 30% 가까이 급증했다.

국내 개인 투자자들은 6월 들어 엔화 상장지수펀드(ETF) 투자도 크게 늘렸다. 개인투자자들은 ‘TIGER 일본엔선물’을 6월에만 235억원어치 순매수했다. 개인들은 올해 이 ETF를 306억원어치 순매수했는데 대부분 6월에 매수했다는 뜻이다.

일본 닛케이지수가 올해 들어서만 29% 급등하고, 엔저로 투자환경이 좋아지면서 일본 주식시장에 직접투자를 하는 개인 투자자들도 많이 늘어났다. 한국예탁결제원에 따르면 올해 들어서 국내 투자자들은 일본 주식 6억3474만 달러어치를 매수했다. 이는 지난해 전체 투자 금액의 3분의 2에 해당한다. 

■ 원·엔 환율 하락 이유=일본 중앙은행인 일본은행은 지난해 12월 사실상의 기준금리 인상을 시도했는데, 예상을 깨고 올해 들어 다시 통화 완화 기조를 보이고 있어서다. 미국이 기준금리를 15개월 만에 동결하며 금리 인상 기조가 막바지에 왔고, 원화의 가치가 상승한 것도 영향을 미쳤다. 

미국 달러 가치는 연방준비제도(연준·Fed)가 6월 셋째주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에서 15개월 동안 이어온 기준금리 인상을 멈추고 동결한 영향으로 하락했다. 달러화의 가치를 나타내는 달러 인덱스는 지난 5월 104까지 상승하다가 101까지 하락했고, 20일 현재 102.15를 기록하고 있다.  

원화 가치는 지난 5월 2일 달러당 1342.1원에서 20일 현재 1280.50원으로 상승했다. 이는 6월 들어서 한국 수출이 회복되는 모습을 보이면서 무역적자폭이 축소될 가능성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대기업들의 해외법인 배당금이 국내로 많이 들어온 영향이라는 분석도 있다. 달러에 대한 원화의 가치는 엔화뿐만 아니라 중국 위안화, 유로화보다도 월등하게 상승했다. 

우에다 가즈오 일본은행 총재는 최근 완화 정책을 이어받고 있다. [사진=뉴시스]
우에다 가즈오 일본은행 총재는 최근 완화 정책을 이어받고 있다. [사진=뉴시스]

■ 일본은행의 선회=엔화 가치의 급락을 설명하는 결정적 이유는 일본은행의 정책 흐름이다. 일본은행은 지난 16일 금융정책결정회의에서 일본이 오랜 기간 펼쳐온 무제한 양적완화 정책을 다시 확인했다.

우에다 가즈오 신임 총재가 4월에 이어 6월에도 완화 정책을 이어받겠다고 밝히고 실행에 옮기면서, 시장은 지난해 12월 일본 중앙은행의 금리 인상 시도가 단발성 이벤트에 불과했다는 확신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일본은행은 지난해 12월 기준금리는 -0.10%로 유지했지만, 기준금리 역할을 하는 10년물 국채 금리의 목표치 허용범위 상단을 ±0.25%에서 ±0.5%로 확대했다. 엔화 가치가 지나치게 하락하고, 일본 물가 상승률이 지난해 12월 4.0%까지 치솟았기 때문이다. 엔·달러 환율은 150엔대에서 130엔대로 안정됐다. 당시 일본은행은 이 조치가 금리 인상이 아니라고 주장한 바 있다. 

■ 의도된 엔저인가=우에다 가즈오 일본은행 총재가 지난해 12월 일본은행의 출구전략을 이어가지 않고, 통화완화적인 결정을 하면서 물가 불안이 해소되지 않고 있다. 일본의 소비자물가지수(CPI) 상승률은 지난해 12월과 올해 1월 각각 4.0%, 4.3%로 정점을 기록했다. 4월 CPI 상승률은 예측치인 2.5%보다 1.0%포인트나 초과했다. 오는 23일 발표되는 5월 CPI 상승률 예측치는 4.1%다. 

그런데 일본은행의 딜레마는 기준금리를 끌어올릴 여력이 다른 나라들에 비해 현저히 부족하다는 데 있다. 일본은 국가총생산(GDP) 대비 국가부채 비율은 3월 기준 226.4%에 달한다.

일본의 국가부채 비율은 1994년 12월 55.9%에서 2010년대에 200%를 넘어섰지만, 코로나19 팬데믹 이전까지만 해도 190%대에서 움직였다. 하지만 2020년 통화완화 정책을 시작하면서 일본의 국가부채는 급증해 지난해 6월엔 227.1%로 최고치를 기록했다. 일본은행이 보유한 국채가 전체의 50%인데 기준금리를 인상하면 막대한 손실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우에다 총재는 고물가를 인식하고 있다. 그는 16일 “(물가 상승이) 국민에게 큰 부담이 된다는 사실을 강하게 인식하고 있다”면서도 “끈기 있게 금융완화를 지속하겠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환율 수준과 변동 이유, 평가에 관한 구체적인 코멘트는 삼가겠다”고 말했다. 일본은행이 지난해 12월의 출구전략을 이어가지 않은 것은 정책적 판단이라는 뜻으로 봐야 한다.

일본은행은 무제한 양적완화 정책을 이어가겠다고 밝혔다. [사진=뉴시스]
일본은행은 무제한 양적완화 정책을 이어가겠다고 밝혔다. [사진=뉴시스]
[자료 | 일본 총무성]
[자료 | 일본 총무성]

■ 엔저와 반도체=일본이 엔저와 맞물려 반사이익을 얻을 수 있는 분야는 반도체다. 최근 일본은 과거 한차례 실패했던 반도체산업에서 이목을 끌 만한 행보를 보이고 있다. 

일본 반도체 파운드리 회사 라피더스는 지난 5월 미국 IBM과 협력해 2나노미터(㎚)급 반도체를 2027년 양산하겠다고 발표했다. 라피더스는 지난해 8월 일본 주요 기업들이 공동으로 설립한 반도체 회사다.

현재 세계적으로 상용화된 초미세 공정은 3㎚급이다. 10㎚ 미만의 공정이 가능한 회사는 삼성전자와 TSMC뿐이다. 만약 라피더스가 2㎚를 선점한다면 반도체 시장의 판도가 바뀐다. IBM은 지난 2021년 세계 최초로 2㎚ 반도체를 개발했다고 발표한 바 있다. 

반도체는 대표적인 수출 산업이다. 미국의 견제로 중국의 반도체산업은 당분간 경쟁력을 되찾기 힘들다. 엔화의 과도한 약세는 일본에도 유리한 상황은 아니다. 하지만 엔화 약세가 글로벌 시장에서 한국 반도체 기업들과 경쟁하는 데 호재인 것은 분명하다. 한국과 일본은 제조업의 수출경합도가 어느 나라보다도 높다.

한국경제연구원에 따르면 2020년 기준 양국의 수출경합도는 69.2로 한국과 미국, 한국과 중국보다 높다. 일본이 1980년대 세계 반도체 시장을 주도하던 시기에도 일본 엔화의 가치는 달러당 120엔 수준으로 지금보다 높았다. 20일 현재 엔·달러 환율은 달러당 141.81엔이다. 

한정연 더스쿠프 기자
jayhan0903@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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