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라면 물가 상승률 두자릿수
시장지배적 기업 조사, 정부 권한
英, 장관이 식품업체 직접 압박
英 유통업체 가격인하 줄줄이 선언
韓 부총리 “소비자단체가 좀…”

# 지난 18일 추경호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한 방송에 출연해 “라면 회사들이 국제 밀 가격의 하락에 맞춰 가격을 적정하게 내렸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추 부총리가 “정부가 하나하나 원가를 조사하고 가격을 통제할 수는 없고, 이 문제는 소비자단체가 압력을 행사하면 좋겠다”면서 구체적 방법을 제시한 지 이틀 만에 소비자단체의 관련 성명이 나왔다.

# 하지만 영국은 총리와 재무장관, 공정경쟁청장 등 고위 공무원들이 직접 시장지배적 위치의 식품·유통회사들을 만나 설득해 가격 인하를 이끌어냈다. 한국과 영국이 이른바 ‘탐욕 인플레’를 다룬 방식에 차이가 있었던 건데, 둘 중 어떤 방식이 더 효과가 있을까. 

라면 물가가 두 자릿수 상승률을 기록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라면 물가가 두 자릿수 상승률을 기록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 라면‧밀가루의 발목=한국의 5월 소비자물가지수(CPI)는 전년 동월 대비 3.3% 상승하는 데 머물렀다. 4월 3.7% 대비 0.4%포인트 하락했다. 올해 2월과 3월엔 각각 4.8%, 4.2%였다. 

반면 라면과 밀가루 물가는 좀처럼 내려오지 않고 있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지난 5월 라면 물가는 1년 전보다 13.1% 상승했다. 라면 회사들이 지난해 10월 공급가격을 인상하면서 라면 물가는 올해 1월 12.3%, 2월 12.6%, 3월과 4월 각각 12.3%씩 상승했다. 

국제 곡물가격과 직결되는 밀가루 물가는 올해 1월 21.7%, 2월 22.3%, 3월 19.8%, 4월 19.2%, 5월 10.0% 급등했다. 우리와 달리 세계 곡물 가격은 안정을 되찾았다. 유엔 식량농업기구(FAO)가 조사해 발표하는 세계곡물가격지수는 올해 1월 147.5, 2월 146.7, 3월 138.6, 4월 136.1로 하락세가 뚜렷하다.

곡물‧설탕‧유제품 가격을 포함한 세계식량가격지수는 지난해 11월 134.7로 정점을 기록한 후 12월 131.8, 올해 1월 130.2, 2월 129.8, 3월 127.0, 4월 127.7, 5월 124.3으로 차츰 떨어졌다. 

■ 시장지배적 지위=그럼 라면‧밀가루 회사를 어떻게 해야 할까. 추경호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지난해 9∼10월 (기업들이 라면 가격을) 많이 인상했는데, 현재 국제 밀 가격이 그때보다 50% 안팎 내렸으니 내린 부분에 맞춰 적정하게 (라면 가격을) 내렸으면 좋겠다”며 “이 문제는 소비자단체가 압력을 행사하면 좋겠다”고 말했다. 

추 부총리의 주장과는 달리 공정거래법에 따르면 라면‧밀가루 회사는 정부가 하나하나 원가를 조사할 수 있다. 애초에 라면과 밀가루는 그만큼 ‘요주의 산업군’이다. 이 시장의 기업들은 가격 결정력이 다른 산업의 기업들보다 훨씬 강하다. 우리는 이런 기업들이 ‘시장지배적 지위’를 갖고 있다고 말한다.

공정거래법 제6조는 “연간 매출액 또는 구매액이 40억원 이상인 사업자들 중에서 1개 사업자의 시장점유율이 50% 이상이거나, 3개 이하 사업자의 시장점유율 합계가 75% 이상인 경우 시장지배적 지위를 가지고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라면시장 1위 업체는 농심으로 시장점유율이 50%를 넘는다. 닐슨코리아 조사 결과에 따르면, 농심의 지난해 3분기 기준 국내 라면시장 점유율은 55.7%다. 2위 오뚜기는 23.4%, 3위 삼양식품은 11.3%다. 제분시장은 CJ가 6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 자료에 따르면, 2018년 기준 CJ의 점유율은 65.4%, 2위인 대한제분은 25.2%다. 

공정거래위원회의 법적 근거인 공정거래법은 1980년 제정됐다. 하지만 처음으로 공정거래법 입법을 시도한 것은 1963년이었다. 당시 시멘트‧밀가루‧설탕을 독점으로 생산하던 기업들이 가격을 마음대로 올리며 ‘삼분三粉 폭리사건’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 ‘탐욕 인플레’ 작동 방식=지난해부터 서구 매체들은 탐욕(Greed)과 인플레이션(Inflation)의 합성어인 그리드플레이션(Greedflaion‧탐욕 인플레)을 꼬집는 기사를 쏟아내고 있다. 미국과 영국에선 정부가 1970년대 도입한 바 있던 가격상한제를 시행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왔다. 탐욕 인플레는 기업이 원가 인상률 이상으로 탐욕적인 가격을 책정해 기업가치를 극대화한다는 말이다. 

기업, 특히 상장사의 목적은 이윤을 많이 남겨서 주주들에게 배당이나 주가 상승분으로 돌려주는 것이다. 컨설팅회사 맥킨지는 지난해 8월 주식회사들은 물가 상승률을 감안해도 1800년 이후 매년 수익률 6.5~7.0%를 기록했다고 발표했다. 맥킨지는 1996~2022년 상반기까지 S&P500에 속하는 기업 주식의 평균 연간 총 수익률이 배당금을 포함해 9%라고 설명했다. 

기업의 이윤이 줄어들고, 이자 비용은 급증한 지난해와 올해는 탐욕 인플레가 작동할 수 있는 최적의 상황이었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대한상공회의소의 12일 보고서에 따르면 국내 상장사 1612개의 지난해 영업이익은 전년 대비 34.2% 감소하고, 이자비용은 31.9%나 늘어났다. 이런 상황에서 기업들은 가격상승의 유혹을 떨쳐내기 어렵다. 제품 가격의 인상이 기업 수익에 가장 큰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 영국의 자발적 가격인하=영국 역시 지난해부터 식품·유통회사들의 가격 인상으로 고통받고 있다. 식품가격이 고공행진을 하면서 소비자물가지수 상승률이 좀처럼 잡히지 않았고, 이는 다시 기준금리 인상으로 이어지면서 고통의 악순환이 생겼다. 


영국의 CPI 상승률은 지난해 7월 10.1%로 두 자릿수에 진입한 후 오랜 기간 10%대를 유지했다. 이는 대부분 식품 가격의 인상에서 비롯됐다. 영국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식품의 물가 상승률은 올해 3월 19.2%, 4월 19.1%, 5월 17.2%를 기록했다. 1977년 8월 21.9%를 기록한 이후 45년 만에 최고치다. 이에 따라 세계 주요국의 CPI 상승률이 안정을 찾고 있는 상황에서 영국은 4월 CPI가 전년 동월 대비 8.7% 상승했다.

리시 수낵 영국 총리. [사진=뉴시스]
리시 수낵 영국 총리. [사진=뉴시스]

영국에서는 총리와 장관들이 직접 나섰다. 리시 수낵 영국 총리는 지난 1월 연설에서 “올해 안에 인플레이션을 절반으로 줄이겠다”며 목표치를 제시했다. 지난 14일 영국 매체 데일리 텔레그래프 보도에 따르면, 영국 정부는 식품에 가격상한제 도입을 추진했지만 유통업체들의 강한 반발로 입법에 실패했다. 

하지만 제러미 헌트 재무장관은 지난 5월 경쟁시장청(CMA) 사라 카델 청장과 함께 식품회사 관계자들을 직접 만났다. 헌트 장관은 이 자리에서 “올해 최우선 과제는 물가상승률을 절반으로 내리는 것”이라고 못 박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자 영국 유통업체들은 마침내 백기를 들었다. 지난 12일 유기농 식료품을 파는 슈퍼마켓 체인 웨이트로즈는 200개 이상의 제품 가격을 내리겠다고 발표했다. 13일엔 영국 3위 슈퍼마켓 체인 ASDA가 8월까지 500개 이상의 제품 가격을 동결하겠다고 발표했다. 영국 1위 유통업체인 테스코는 아일랜드에서 700개 이상의 제품 가격을 평균 10% 내리겠다고 발표했는데, 가격 인하 정책이 영국에서도 적용될지는 더 지켜봐야 한다. 

시장조사회사 칸타는 20일 지난 4주간 영국의 식품 인플레이션율이 16.5%로 지난 5월 17.2%보다 꺾였다고 발표했다. 

한정연 더스쿠프 기자
jayhan0903@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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