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찰·열정·소통의 리더 이순신㉙
임진강 전투, 시작부터 삐걱
왜군 두려워한 선조와 대신들
평양 지키자는 류성룡의 주장

1592년 5월 개성으로 도망친 선조는 ‘임진강’을 사수하라면서 신할, 유극량, 권징, 한응인 4명을 그곳에 배치했다. 그런데 이들 중 적임자는 단 한명도 없었다. 결국 왜군은 임진강을 돌파했다. 한편에선 이들 4명의 실패라고 말하지만, 오합지졸을 그곳에 배치한 권력자의 잘못된 판단이 결정적인 패착이었다. 지금 우리의 권력자는 선조와 달리 진짜 인재를 선별해 옆에 두고 있는 걸까. 

권력을 가진 이는 아랫사람을 보는 눈이 정확해야 한다.[사진=게티이미지뱅크]
권력을 가진 이는 아랫사람을 보는 눈이 정확해야 한다.[사진=게티이미지뱅크]

신할은 용맹한 지도자이긴 하지만 공명심公明心보단 공명심功名心이 많은 인물이다. 유극량은 용기는 뛰어나나 통찰이 빈약하고, 경기감사 권징은 전투에 문외한인 서생일 뿐이다. 

이런 세 사람이 많은 군사를 거느리고 강을 건너 왜군을 추격하려 할 때에 평안도 압록강변에서 국경을 지키던 병사 ‘강변정병 3000명’도 도착했다. 임금의 명을 받고 ‘강변정병’을 데리고 온 한응인은 김명원에게 ‘도원수의 절제를 받지 말라’는 선조의 패문을 보여준 후 적의 형세를 물었다.

김명원이 답했다. “내가 적병을 10여일이나 막았소이다. 그런데 적병이 오늘 돌연 여막을 불사르고 물러나더이다. 필시 계교를 낸 것이오. 중로中路에 복병을 숨겨놓고 유인전략을 펼칠 수도 있소. 그런데도 신할과 권징은 내 말을 듣지 않고 강을 건너 추격하려 하고 있소.” 

김명원의 말을 들은 한응인은 신할이 앞서 강을 건너 큰 공을 세울지도 모른다는 걱정부터 앞섰다. 능력도 없으면서 공적만 쌓으려는 탐욕에 그는 신할이 군사들과 함께 타고 출발하려는 배를 불러들였다. 강변정병과 함께 태워 도강하기를 재촉했다. 

이때 강변정병의 간부급 군사 한명이 나섰다. “저희들은 서둘러 달려온 터라 아직 밥도 먹지 못했습니다. 후발대가 아직 도착하지 못한데다 적의 사정도 아직 알 수 없으니 오늘 하루를 여기서 쉬면서 척후병을 내놓아 적의 동정을 알아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한응인의 명령이 무모하다는 점을 에둘러 지적한 것이다.

그러자 한응인은 “미천한 놈이 사대부를 몰라보고 무엄이 막심하다!”라는 말과 함께 칼을 빼어들며 “오냐, 네 놈들이 죽기를 무서워하는구나. 주둥아리를 함부로 놀려 군심을 요란케 하니 베어 마땅하다”며 강변정병을 겁박했다. 조방장 유극량은 대장 신할에게 이렇게 말했다. “저 강변정병의 말을 들으니 지당하오. 경솔하게 움직이는 것은 만전지계가 아닌 듯하오.” 

하지만 신할은 선조가 내어 준 상방검尙方劍으로 이번엔 유극량을 베겠다며 위협했다. 유극량은 “내가 일생을 전장에서 살았거늘 어찌 죽기를 피하겠소마는 나랏일이 그릇되니까 하는 말이오”라며 자기의 부하들과 함께 선봉으로 나섰다. 신할도 강을 건너 군사를 재촉해 달려갔다.

한응인과 경기감사 권징은 문관이자 백면서생이어서 무기를 다루지도 못했다. 전장에 발을 디디는 것조차 무서워 군사들만 내보내고 자기네들은 강 이쪽 북안에 머물러 도원수 김명원과 함께 승전보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신할의 군사와 강변정병들은 임진강 남쪽 벌판을 지나 문산포汶山浦 뒷산에 다다랐다. 그 순간 적의 복병이 사방에서 나타났다. 숨어있던 왜군은 조총·화살·대도·장창 등 온갖 무기를 동원해 사정없이 공격을 퍼부었다. 

순식간에 아군 관군 수천명이 목숨을 잃었다. 신할과 유극량도 적의 창검에 죽었다. 간신히 살아난 군사들은 사력을 다해 도망쳤지만 결국 황천길 신세가 됐다. 김명원과 권징은 처음에는 도망쳐 오는 아군을 구출하기 위해 배를 내보냈지만 구름같이 몰려오는 적병을 보자 보내던 배를 뒤로 물리고 북쪽으로 도망쳤다.

결국 강을 못 건너온 관군들은 한응인을 원망하다 뒤따라온 왜군을 피해 어쩔수 없이 강물에 뛰어들어야만 했다. 후일 류성룡은 「징비록」에 “그 뛰어드는 모양이 마치 바람에 날리는 어지러운 나뭇잎 같았다”는 기록을 남겼다. 이런 광경에 도원수 김명원 등은 넋을 잃었다. 상산군商山君 박충간이 제일 먼저 말을 타고 달아나자 군사들도 목숨을 지키고자 뿔뿔이 도망쳤다. 한응인은 물론 김명원과 권징도 달아나 버렸다. 

10여일 동안 임진강을 넘어서지 못했던 소서행장 등 왜군은 유인전략 한번으로 조선군을 격파하는 데 성공했다. 1592년 음력 5월 18일의 일이다. 왜군은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손쉽게 개성을 손에 넣었다. 

개성을 함락한 왜군 주력부대는 뿔뿔이 흩어져 조선 8도를 유린하기 시작했다. 풍신수길(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에 따라 소서행장과 가등청정은 평양으로 향하다가 안성역(황해도 평산과 서흥 사이)에 이르러 가등청정은 함경도, 소서행장은 평안도로 향했다.

황해도는 흑전장정, 전라도는 도진의홍에게 맡기고, 경기도와 서울은 대장인 부전수에게 지키도록 했다. 강원도는 모리승신, 충청도는 복도정칙과 장종아부원친, 경상도는 대장인 모리휘원에게 맡겼다. 특히 조선 연해안과 섬의 제해권을 구귀가륭, 협판안치, 가등가명 등 여러 장수가 나눠서 장악하라는 게 풍신수길의 명령이었다. 소서행장과 흑전장정, 소조천융경, 대우의통의 무리가 개성을 점령한 뒤 봉산에 불을 지르고 황해도를 짓밟으며 대동강 남안에 닿았다. 

상황이 이쯤 되자 선조 일행이 머물고 있던 평양성에서는 또 한번 큰 입씨름이 벌어졌다.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의 고위 직책을 맡고 있던 인물들이 연일 평양을 버리고 영변寧邊으로 옮기기를 청했다. 인성부원군 정철도 평양을 버릴 것을 주장했다.

드라마 ‘징비록’ 속 류성룡의 모습.[사진=더스쿠프 포토]
드라마 ‘징비록’ 속 류성룡의 모습.[사진=더스쿠프 포토]

류성룡은 달랐다. “평양을 지키는 것이 옳소. 평양은 백성의 마음이 대단히 굳고 앞에 대동강이 있어 지킬 만한 가망이 있소. 여기서 며칠만 있으면 명나라의 구원병이 올 것이니 밖에서 돕고 안에서 응하여 적병을 물리칠 수가 있을 것이오. 그렇지 아니하고 평양을 버리고 떠난다 하면 의주에 이르기까지는 다시는 웅거할 만한 요해지가 없으니 나라는 반드시 망하고 말 것이오.” 좌의정 윤두수가 류성룡의 주장에 찬성하고 나섰다.

정철은 강력 반대했다. “평양이 비록 민심이 굳고 앞에 대동강이 있다 하나 장수가 없이 어떻게 지킨단 말이오”라며 적을 피해 떠나자는 ‘피출설避出說’을 고집했다. 

류성룡은 분개한 표정으로 정철을 향해 이렇게 꾸짖었다. “영변도 의주도 적만 온다면 또 떠나야 할 터이니 장차 어디로 성상을 모시고 가려 하오? 나는 평소에 대감이 강개한 뜻이 있어서 어려운 것을 겁을 내는 사람이 아닌 줄 믿었더니 오늘 이런 말은 참으로 의외요.”

윤두수도 정철의 무기력함에 분개해 ‘내가 칼을 빌려서 이 간신을 베고자 한다(我欲借劍斬臣)’는 문산(중국 남송 말기의 정치가·시인)의 시를 읊었다. <다음호에 계속> 

이남석 더스쿠프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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