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먹고, 몸 큰다고
진짜 어른이 아닐텐데

# 버스에서 내리니 비가 내리기 시작합니다. 횡단보도를 건너 동네가 있는 길목으로 들어섭니다. 아파트 축대를 타고 덩굴식물이 무성히 올라왔습니다. 비에 젖어 촉촉한 초록의 생명입니다. 가만 보니 풀숲에 흰색을 띤 뭔가가 보입니다. 테이크아웃 종이컵입니다. 

# 진갈색의 액체는 커피 같습니다. 비가 주룩주룩 오는데 여전히 진한 빛깔입니다. 버리고 간 지 얼마 지나지 않은 모양입니다. 풀숲 깊숙한 곳에 꼿꼿하게 꽂은 건지, 그냥 던진 건데 저렇게 꽂힌 건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 초록의 식물은 생명을 키워가지만 쓰임을 다한 흰색 종이컵은 외로이 입을 벌린 채 빗물을 받아내고 있습니다.

# 커피를 마신 걸 보면 아마도 어른이 버렸을 겁니다. 아이들이 볼 때 어른은 다 큰 사람인 것 같지만 때론 그렇지 않습니다. 몸은 컸지만 마음이 크지 않은 어른도 많으니까요. 다 쓴 종이컵을 아무 데나 버리는 건 잘못입니다. 유치원에 다니는 우리집 막내도 아는 사실입니다. 유명한 책 제목이 생각났습니다. 「내가 정말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유치원에서 배웠다」. 정말 맞는 말입니다. 

# 다른 이를 탓하기 전에 저 스스로 부끄러운 어른이 아닌지 돌아봐야겠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어른은 책임지는 사람입니다. 어울리지 않는 곳에 있던 종이컵은 쓰레기통에 넣었습니다. 오늘 하루 조금 더 어른이 된 것 같습니다. 

사진·글=오상민 천막사진관 사진작가 
studiotent@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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