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걸 회장, 원칙은 세웠지만 기준은 흔들렸다
이동걸 회장, 원칙은 세웠지만 기준은 흔들렸다
  • 고준영 기자
  • 호수 284
  • 승인 2018.04.18 09:1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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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걸 산업은행 회장의 과제

취임한 지 약 7개월, 이동걸(65) 산업은행 회장이 받아든 성적표는 나쁘지 않았다. 금호타이어와 STX조선해양의 노사합의를 이끌어내 회생 가능성을 높였고, 정치적 이해관계에 휘둘리지 않고 원칙대로 구조조정을 진행했다. 하지만 일부에선 엄정한 원칙은 있었지만 명확한 기준은 없었다고 지적한다. 더스쿠프(The SCOOP)가 이 회장의 어깨에 새롭게 얹힌 과제를 취재했다. 

▲ 이동걸 회장(오른쪽)은 “구조조정은 엄정한 원칙 아래 투명한 절차에 따라 진행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사진=뉴시스]

2017년 9월 11일, 여의도 산업은행 본점에 첫발을 내디딘 이동걸(65) 당시 산업은행 신임회장의 두 어깨는 무거웠다. 금호타이어 매각 실패, 대우건설 매각 추진, STX조선해양 경영정상화, 한국GM 관리 소홀 등 숱한 과제가 산업은행에 산적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금융위원회는 위기에 놓인 산업은행의 수장 자리에 그를 앉히며 “전문성과 경험을 바탕으로 기업 구조조정을 원활하게 추진할 적임자”라고 치켜세웠다.

막중한 책임감과 부담감을 안고 취임식에서 그가 강조한 건 ‘원칙’이었다. “국가경제와 해당기업에 최선이 되는 판단 기준과 엄정한 원칙 아래 투명한 절차에 따라 구조조정을 진행해야 한다.” 또다른 의미에서 이 말은 부실기업들의 구조조정 문제를 피하지 않고 직면하겠다는 의지로도 내비쳤다.

그로부터 약 7개월, 이 회장의 행보는 단호했다. 회생 가능성이 있으면 살리고, 그렇지 않으면 법정관리 절차를 밟는다는 단순하면서도 명확한 구조조정 원칙을 통해 기업을 강하게 압박했다. 일단 자금을 투입해 살리고 보자는 주먹구구식 구조조정은 없었다.

이 회장의 이런 원칙은 최근 법정관리 문턱에서 극적으로 회생한 금호타이어 사례에서 잘 드러난다. 금호타이어가 살아날 수 있는 최상의 시나리오는 중국 타이어업체 더블스타에 매각하는 것이라고 판단한 이 회장은 직접 광주행 열차를 탔다. 이 회장은 금호타이어 광주공장 파업 현장을 찾아 노조를 설득했고, 결과적으로 해외매각은 없을 거라던 노조의 마음을 돌려놓는 데 성공했다. 광주공장 파업광장은 1년 4개월 만에 철거됐다.

 

입장차이가 좀처럼 좁혀지지 않던 STX조선해양 노사의 합의를 이끌어낸 것도 이 회장의 원칙을 고수하겠다는 단호함이었다. STX조선해양은 올해 초 정부와 채권단이 주관해 삼정KPMG회계법인이 실시한 산업경쟁력 컨설팅에서 생산직 노동자 500여명을 감원해야 한다는 결과를 받아들었다. 노조의 반발은 거셌다. 산은이 정한 노사확약서 제출 데드라인(4월 9일) 하루 전까지 희망퇴직ㆍ아웃소싱을 신청한 인원은 144명. 정부가 제시한 자구방안에는 한참 못 미쳤다.

기존에 보였던 산은의 방침대로라면 STX조선해양의 자구노력을 감안해 데드라인을 연기하거나 독자생존할 수 있는 기회를 줬을 수도 있겠지만 이동걸 회장은 끝까지 원칙을 내세웠다. 기업의 근본적인 원가 구조 개선노력이 미흡하면 밑빠진 독에 물 붓는 격이 될 가능성이 높다는 거였다.

실제로 산은은 STX조선해양이 데드라인까지 노사확약서를 제출하지 못하자 구체적인 법정관리 신청 절차에 돌입했다. 이런 산은의 방침에 위기감을 느낀 STX조선해양 노사는 데드라인을 하루 넘기고 가까스로 타결에 성공, 독자생존을 향한 길을 열었다.

산은의 변화에 가장 먼저 민감하게 반응한 건 업계였다. 업계 한 관계자는 “예전 같았으면 노사가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버티고 있으면 금융당국이 자금을 지원해서라도 어떻게든 회생하는 쪽으로 갔을 것”이라면서 “하지만 합의가 없으면 지원도 없고 회생도 없다는 의지가 확고하니 노사도 한발 물러설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시장 분위기 바꾼 단호함 


전문가들도 이 회장의 행보에 후한 점수를 매겼다. 큰 틀에서 보면 옳은 방향이라는 이유에서다. 정은미 산업연구원 산업경쟁력연구본부 본부장은 “그동안 기업 구조조정은 정치적인 이해관계자 하나하나의 목소리에 따라 크게 좌우돼왔다”면서 “하지만 최근 산은은 산업경쟁력과 기업의 비전을 중점적으로 고려하는 등 긍정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데, 이는 시장에도 좋은 시그널을 줄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렇다고 이 회장을 향한 우려의 목소리가 없는 건 아니다. 빠른 의사결정이 ‘섣부른 결과’를 부추기는 게 아니냐는 것이다. 정은미 본부장의 말을 들어보자. “산은이 단호한 입장을 취하면 부실기업들이 자생력을 키우기 위해 스스로 노력할 것이라는 점은 동의한다. 대신 산은이 생존과 퇴출을 결정하는 명확한 기준을 제시해야 한다. 지금까지만 봤을 땐 이런 부분은 부족한 것 같다. 단순히 ‘산업경쟁력과 전망을 고려해서’라는 식의 기준으로 구조조정을 진행해선 안 된다.”

STX조선해양의 독자생존 결정 과정에서 빚어진 마찰은 이런 우려가 드러난 대표적 사례다. STX조선해양은 당초 산은이 제시한 자구방안과 다른 대책을 내놨다. 생산직 노동자 500여명을 감원하라는 요구를 임금 삭감과 무급휴직으로 대체했다.

업계에선 “산은이 수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요구치를 밑도는 자구계획이라는 게 이유였다. 하지만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이 회장은 “회계법인에서 검토한 결과 요구한 수준 이상”이라며 결과에 흡족해했다. 시장과 이 회장이 생각하는 생존ㆍ퇴출을 가르는 기준이 크게 달랐다는 얘기다.

업계 한 관계자는 “당초 산은이 STX조선해양에 생산직 노동자를 감원하라고 했던 건 장기적인 관점에서 경쟁력 약화와 업황 침체가 지속되고 있어 생산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유휴인력을 줄이려는 의도가 컸다”면서 “하지만 STX조선해양이 제시한 임금 삭감과 무급휴직은 효율성 제고 차원이 아닌 고정비 축소에만 그쳐 맥락이 다르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 이동걸 회장은 지난 11일 STX조선해양이 제출한 자구계획을 수용했다.[사진=뉴시스]

또다른 관계자도 “자원을 효율적으로 배분하기 위해서는 먼저 연명하고 있는 비효율적인 자원을 정리해야 한다”면서 “하지만 STX조선해양이 제시한 자구안은 비효율적인 자원을 연명하겠다는 거다”고 덧붙였다.

생존ㆍ퇴출 기준 명확해야

하지만 이 회장은 STX조선해양이 기존 요구와 다른 자구계획을 제시했음에도 생존을 결정한 이유를 명확히 밝히지 않았다. 산은 관계자는 “STX조선해양과 구체적인 내용을 공개하지 않기로 했다”면서 말을 아꼈다.

이 회장에게 남은 과제는 아직 숱하다. 가깝게는 한국GM 지원 여부를 결정해야 하고, 멀리는 대우건설, 대우조선해양, 현대상선 등 부실 자회사들의 정상화를 일궈내야 한다. 이런 험난한 구조조정 과정에서 모든 이해관계자가 납득할 만한 명확한 기준을 세우는 건 이 회장의 과제다. 그의 어깨는 여전히 무겁다.
고준영 더스쿠프 기자 shamandn2@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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