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스쿠프 전쟁과 문학
3편 불편한 과거의 응시
엔도 슈사쿠 「바다와 독약」
규슈대 생체 해부 사건 모티브
실험에 참가하고 무뎌진 인물들
평범한 이들이 만든 잔혹한 풍경
죄 짓고도 쉽게 망각하는 게 문제
기억하는 자만이 용서받을 수 있어

우리는 모든 것을 기억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많은 것을 잊는다. 기억은 불안정하고 우리는 이 불안한 기억을 취사 선택한다. 하지만 불편하고 수치스러운 과거를 응시하는 자만이 용서를 바랄 수 있다. 이런 점에서 2차 세계대전 때 생체실험을 진행한 규슈대학 의학부가 2015년 그 자료를 전시하기로 결정한 건 함의가 크다.

규슈대학 의학부 의학역사관.[사진=규슈대학 의학역사관 홈페이지]
규슈대학 의학부 의학역사관.[사진=규슈대학 의학역사관 홈페이지]

1945년 6월, 미군의 B-29 폭격기 한대가 일본 규슈(九州) 상공에서 격추돼 승무원 12명이 포로로 잡혔다. 미군의 공습으로 큰 피해를 입은 일본인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일본 군부는 재판도 없이 미군 8명의 처형을 결정했다. 그때 규슈대학 의학부는 미군 포로를 생체 실험에 이용하게 해달라고 요구했고, 즉각 수락됐다. 

규슈 의대 교수들은 미군 포로들의 폐를 절제하고, 혈관에 바닷물을 주입하는 생체 실험을 진행했다. 그들은 사망한 시신의 장기를 조리해 육군 고위 장교들의 연회에 제공했다. 태평양 전쟁이 끝난 후 생체실험에 연루된 전범 23명이 유죄 판결을 받았고, 9명이 처형됐다. 

그러나 한국전쟁 발발로 미국이 일본에 유화정책을 펼치는 과정에서 나머지 전범들은 대부분 석방됐다. 만주 지역에서 생체실험을 진행했던 악명 높은 ‘731부대’ 관련자 다수도 처벌을 면했다. 전후 냉전 질서에 편승한 일본의 전쟁범죄는 서서히 잊혔고, 일본은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으로 벌어들인 ‘피 묻은 달러’로 경제적 번영을 이뤘다. 

일본 작가 엔도 슈사쿠의 「바다와 독약(1958년)」은 규슈대학 생체 해부 사건을 모티브로 삼은 소설이다. 평범한 샐러리맨인 ‘나’는 도쿄 인근 ‘니시마쓰바라’란 신흥 주택지로 이사한다. 처제의 결혼식을 앞두고 ‘나’는 기흉을 치료하려고 동네 의원에 방문한다. 원장은 ‘스구로’라는 의사였다. 

스구로를 보고 왠지 모를 불안을 느낀 ‘나’는 그에게 치료받기를 주저한다. ‘나’는 결혼식에서 만난 지인에게서 스구로의 과거 얘기를 듣게 된다. 스구로는 의대 재학 시절 미군 포로 생체실험에 참가한 전력이 있었다. 전쟁과 연루된 자들은 동네 어디에나 있었다. 주유소 주인은 중국에서 학살에 가담한 사실을 자랑삼아 떠들고, 헌병으로 복무했던 양복점 주인도 전쟁포로들을 가혹하게 다룬 경험을 얘기한다. 

전쟁이 끝난 지 10년 정도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들은 과거의 기억을 잊고 평화롭게 살고 있다. 스구로는 ‘나’의 가슴에 주삿바늘을 찔러 넣으면서 낮은 소리로 중얼거린다. “어쩔 도리가 없었으니까. 그때도 그랬지만 앞으로도 자신이 없어. 앞으로도 같은 상황에 처한다면 난 또 그렇게 할지 몰라…. 그 짓을 말이야.”

넷플릭스에서 방영 중인 경성크리처는 731부대의 생체실험을 모티브로 삼았다.[사진=넷플릭스 제공]
넷플릭스에서 방영 중인 경성크리처는 731부대의 생체실험을 모티브로 삼았다.[사진=넷플릭스 제공]

의대 재학 시절 스구로와 친구 토다는 교수의 갑작스러운 호출을 받는다. 교수는 그들에게 생체실험에 참여하라고 지시한다. 생체실험이 의학 연구를 빙자한 살인 행위임을 알고 있지만, 두 사람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스구로는 집도하는 교수의 메스를 뺏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히지만 결국 어떤 행동도 하지 못한다. 

그 후로 스구로는 깊은 죄의식에 사로잡힌다. 반면 토다는 생체실험에 능동적으로 가담한다. 토다는 어린 시절부터 어른들이 자신에게 기대하는 것이 무엇인지 간파한 영악한 아이였다. 그는 도둑질과 거짓말도 마다하지 않으면서 성장한다.

토다는 사촌누나와 간통을 저지르고, 의대에 진학한 후에는 식모와 관계를 맺어 아이까지 갖게 한다. 토다는 자신이 나쁜 짓을 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마음의 통증은 느끼지 못한다. 그가 두려워하는 것은 오직 ‘타인의 시선’과 ‘타인의 평가’였다. 

토다가 생체실험에 참여한 것도 자신이 양심의 가책을 느낄 수 있는가를 알아보기 위해서다. “지금 토다가 원하는 것은 가책이었다. 가슴의 격렬한 통증이었다. 가슴을 찢는 듯한 후회였다. 그러나 이 수술실에 들어와서도 그런 감정은 역시 일어나지 않았다.”

간호사 우에다는 아이를 사산하고 남편과 이혼한 후 감정이 마비된 상태에서 생체실험에 참여한다. 그녀는 병원 업무를 기계적으로 수행하며 적막감과 고독을 느낀다. 그녀는 하루하루 맡겨진 일을 기계적으로 처리할 뿐이다.

이렇듯 생체실험에 가담한 세 사람은 무기력하게 순응(스구로)하고 타인의 시선과 평가에 집착(토다)하거나 기계적으로 업무를 처리(우에다)한다. 그러면서 자신의 입장이라면 누구라도 그렇게 했으리라고 자위한다. 시간이 흐를수록 죄의식은 점차 희미해진다. 타인의 죽음과 고통에도 무감각해진다. 

이같은 내용의 소설 「바다와 독약」을 쓴 엔도 슈사쿠는 죄를 짓고도 무뎌지는 이 과정을 ‘독약’에 비유했다. 그렇다면 ‘바다’는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그것은 용서, 사랑, 운명 등으로 다양하게 해석된다.

인간은 비겁하게 순응하고, 타인의 평가를 의식하며 자기 앞의 현실에 얽매인다. 굳이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을 상정하지 않아도 된다. 이미 당신과 나 역시 그렇게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자기합리화에 익숙한 나약한 인간들은 무력감과 피로감에 지쳐 쉽게 망각을 선택한다. ‘스구로’ ‘토다’ ‘우에다’는 지금 여기 우리의 모습이기도 하다. 

평범한 사람들이 만든 잔혹한 풍경을 제시하며 작가는 기억의 의미를 다시 묻는다. 기억하기를 멈출 때 인간은 어리석은 실수를 거듭한다. 기억은 필연적으로 고통을 동반한다. 그래서 인간은 기억을 아프지 않을 정도로 편집한다. 여기서 엔도 슈사쿠가 실제 사건을 모티브로 소설을 쓴 이유를 깨닫게 된다. 그는 이 소설로 과거의 사건을 기억할 토대를 닦은 것이다. 쉽게 소비되는 뉴스와는 달리 문학은 이야기의 형태로 과거를 박제한다.

2015년, 종전 70주년을 맞아 규슈대학 의학부는 의학역사관을 개관하면서 생체실험 자료를 전시하기로 결정했다. 이 결정을 끌어낸 것은 전쟁 당시 19세 의대생이었던 89세 노인이었다. 나약한 순응자 ‘스구로’는 70년을 지나서야 입을 열었다. 아마도 그 노인은 1958년에 출간된 「바다와 독약」을 읽었을 것이다. 기억하는 자만이 용서받을 수 있다. 불편한 과거를 응시하는 이 소설의 메시지는 간명하다. 그래서 더 아프게 읽힌다. 

이정현 평론가 | 더스쿠프
21cbach@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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