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스쿠프 전쟁과 문학
6편 냉전과 문학의 응전
윌리엄 골딩 「파리대왕」
네빌 슈트 「해변에서」
미소 냉전 시대의 비극
세계 곳곳은 여전히 전쟁 중
증오와 폭력은 공멸의 시작

1950년대부터 시작한 미국과 소련의 냉전은 세계를 두 동강 냈다. 내 편이 아니면 다른 편이며 적을 끝장내기 전에는 나도 안심할 수 없다는 분위기가 전 세계를 뒤덮었다. 인류에게 남은 건 절멸밖에 없어 보였다. 윌리엄 골딩의 「파리대왕」과 네빌 슈트의 「해변에서」는 이런 분위기를 반영했다. 증오하는 상대를 박멸하려는 이들로 넘쳐나는 우리네 정치꾼들이 읽을 만한 책이다.

1950년대 냉전과 2024년 정치권의 냉전은 과연 무엇이 다를까.[사진=게티이미지뱅크]
1950년대 냉전과 2024년 정치권의 냉전은 과연 무엇이 다를까.[사진=게티이미지뱅크]

1952년 11월 1일, 미국은 세계 최초의 수소폭탄 실험을 태평양 에니위탁 환초에서 시행했다. 2년 후인 1954년 3월 1일엔 비키니 환초에서 수소폭탄 ‘캐슬 브라보(Castle Bravo)’를 터뜨렸다. 히로시마에 투하한 원자폭탄보다 1000배 이상의 파괴력을 지닌 폭탄이었다. 여기에 맞서 소련은 훨씬 강력한 폭탄 개발에 나섰다. 

1961년 10월 30일, 소련은 북극해 노바야제믈랴 제도 상공에서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자폭탄의 3000배가 넘는 위력을 지닌 수소폭탄 ‘차르 봄바(Tsar Bomba)’를 터뜨렸다. 그러자 영국, 프랑스, 중국도 핵무기 경쟁에 합류했다. 수소폭탄의 등장으로 인류는 절멸의 공포에 떨었다. 

수소폭탄 실험 직후 영국 작가 윌리엄 골딩(1911~1993년)은 소설 「파리대왕(1954년)」을 출간했는데, 그 내용을 펼쳐보자. 핵전쟁 발발 후 피난을 가던 소년들이 탑승한 비행기가 무인도에 불시착한다. 유일한 어른인 조종사는 사망했고, 섬에는 어린 소년들만 남는다. 리더 ‘랠프’는 사냥, 불 피우기 등 집단생존에 필요한 행동들을 정한 다음 소년들에게 제각기 임무를 부여하고 구조를 기다린다. 

그러나 소년들의 평화는 오래가지 않았다. 온화하고 합리적인 랠프와 정반대 성향을 가진 ‘잭’은 고기를 얻으려고 사냥에 나서면서 당장 눈앞의 생존이 최우선이라고 주장한다. 잭은 섬에 괴물이 있다는 루머를 퍼뜨린다. 소년들 사이에 공포감이 번지자 잭은 무장조직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소년들은 하나둘 잭에게 가담한다. 두 그룹으로 나뉜 소년들의 갈등은 점차 심각해진다. 

민주적인 질서가 무너지자 잭은 공포를 제어할 목적으로 종교적 제의를 벌인다. 공포로 형성된 질서를 유지하려면 또 다른 공포가 필요했다. ‘괴물’의 실체가 추락한 조종사의 시신이라는 사실이 드러나자 잭은 또 다른 희생물을 찾기 시작한다. 

그 과정에서 랠프의 친구 피기가 살해되고, 랠프의 생존까지 위협받는다. 두 집단의 갈등은 파국으로 치닫는다. 섬에서 피어오르는 불길을 보고 구조대가 도착하자 소년들은 거짓말처럼 예전으로 돌아온다. 어른들은 그들이 무인도에서 전쟁놀이를 하고 있었다고 착각한다.   

이 소설의 상상력은 작가의 전쟁 경험에서 비롯됐다. 제2차 세계대전 때 해군 장교로 복무한 골딩은 독일 U보트와 처절한 사투가 벌어진 대서양에서 숱한 전투를 겪었다. 전쟁이 끝난 후 미ㆍ소로 분열한 세계가 핵무기 경쟁에 돌입하자 골딩은 인간의 본성에 깊은 회의를 느꼈다. 

무인도에 갇힌 소년들이 서로를 증오하는 모습은 미ㆍ소 냉전으로 세계가 두 그룹으로 나뉜 상황과 흡사하다. 소년들의 투쟁은 절박하지만, 외부에서 본 그들의 갈등은 그저 어리석은 놀이에 불과하다. 공멸을 향해 질주하는 소년들의 모습은 냉전의 알레고리(allegoryㆍ어떠한 주제를 표현하기 위해 다른 주제를 사용해 그 유사성을 넌지시 드러내는 방법)다. 

반면 네빌 슈트(1899~1960년)가 소설 「해변에서(1957년)」에서 묘사한 풍경은 좀 더 사실적이다. 알바니아가 이탈리아에 핵 공격을 가하고, 이스라엘과 아랍국가들 사이에 전쟁이 발발한다. 소련과 중국도 사회주의 노선 차이로 갈등하다 국경에서 충돌한다. 미국은 이집트인들이 벌인 테러를 오인해 소련을 공격한다. 

이를 계기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와 소련이 정면으로 충돌한다. 이 전쟁은 지극히 짧았다. 소련과 미국이 수소폭탄을 사용하자 북반구 국가들은 순식간에 절멸한다. 남반구 국가들은 살아남았지만, 방사능 낙진이 확산하자 남반구 국가들도 위기에 몰린다. 

호주의 항구에는 미해군 잠수함 스콜피언호가 정박해 있다. 잠수함 승무원들에게는 돌아갈 조국이 없다. 수소폭탄 공격으로 미국은 이미 지도에서 사라진 후였다. 그럼에도 그들은 예전의 규율을 지키면서 생존자 수색을 계속한다. 호주 시민들도 다가오는 방사능 낙진에 동요하지 않는다. 시민들은 골프를 치고, 산책하고, 오지 않을 미래 계획을 세우면서 가까운 이들과 시간을 보낸다. 사람들은 미래가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남은 삶이라도 온전히 누리고자 최선을 다한다. 

스콜피언호 승무원들은 미국의 시애틀에서 불규칙적으로 타전되는 생존 신호를 감지한다. 만약 생존자가 있다면, 방사능 피해가 생각보다 심각하지 않다는 사실을 방증한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시민들은 열광한다. 스콜피언호는 인류의 희망을 안고 시애틀을 향해 출발한다.

가까스로 시애틀에 닿은 승무원들은 신호의 정체를 확인하고 좌절한다. 부서진 창문에 매달린 콜라병이 바람에 흔들리면서 모스 송신기를 건드린 것이다. 허무하게도 인류 최후의 희망은 흔들리는 콜라병이었다. 방사능 낙진은 예측보다 빨리 호주를 덮친다. 

영국 해군 장교로 제2차 세계대전 중 비밀무기 개발 담당 부서에 근무했던 네빌 슈트는 종전 후 호주로 이주했다. 그가 접했던 핵전쟁 시나리오에서 가장 안전한 국가는 호주였다. 네빌 슈트는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핵전쟁 이후를 다룬 이 소설을 창작했다. 

1950년대 미국의 수소폭탄 개발과 이에 대응한 소련의 수소폭탄 개발로 세계는 두 쪽으로 나뉘었다.[사진=게티이미지뱅크]
1950년대 미국의 수소폭탄 개발과 이에 대응한 소련의 수소폭탄 개발로 세계는 두 쪽으로 나뉘었다.[사진=게티이미지뱅크]

이 소설은 1959년에 영화로 제작됐다. 스크린에 재현된 핵전쟁 이후의 풍경을 본 관객들은 깊은 충격을 받았다. 1962년, 쿠바 미사일 사태가 벌어졌을 때 이 소설과 영화는 가장 현실적인 경고가 됐다. 당시 미공군 참모총장 르메이는 선제폭격을 강력하게 주장했으나 케네디 대통령은 결국 타협을 선택했다. 어쩌면 케네디는 결단의 순간에 네빌 슈트의 소설과 영화를 떠올렸을지도 모른다. 

두 소설은 냉전 시대에 맞선 문학의 응전이었다. 여전히 전쟁이 계속되는 현실에서 인간의 악한 본능과 어리석음을 다룬 두 소설이 주는 울림은 크다. 증오하는 상대를 박멸할 수 있다고 착각하는 자들은 「파리대왕」의 소년들과 그리 다르지 않다. 우리는 소설과 영화로 모든 것이 무너진 세계의 풍경을 즐기지만, 실제로 핵전쟁 이후의 세계를 볼 수 있는 자는 거의 없다. 

이정현 평론가 | 더스쿠프
21cbach@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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